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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집중조명/이현승/펜 뚜겅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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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이현승
펜 뚜껑
가방을 잃어버렸다.
펜은 없고 펜 뚜껑만 남아서 내버렸는데
가방에서 펜이 나와 뚜껑을 찾으러 간 사이였다.
가방에 든 신용카드와 여권과 함께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펜 없는 펜 뚜껑처럼, 펜 뚜껑 없는 펜처럼
없어서 더 분명해지는 존재가 있다.
잃어버린 가방과 집시의 희미한 미소.
내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데
어디에서 왔냐와 무얼 하러 왔냐가
공연한 의심과 문책이 되는 순간들
증명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필사적으로 내가 되어야 하다니 불공평하다.
놀러왔는데 테러하러 온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고
조그만 아시안은 그만 불친절해지고 싶은데
경직된 미소는 난처한 의심만 만들어낸다.
뚜껑만 남은 펜처럼 없어서 있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어서 투어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나는 펜을 줄 테니 가방을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
테러범 같은 집시를 만나야 하고
여행은 반드시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일 수밖에 없고
살인광 시대
린제이 로한의 사망기사를 보았다*.
가망 없는 악동에게 남은 기대는 죽는 것뿐이지만
굶주린 상어들에게 던져 넣을 핏덩이는
미안하지만 아직 새로운 사내를 꼬이고,
그의 지갑으로 쇼핑을 하는 중이다.
지켜보는 상어들이야 지겨울지 모르지만
연애란 새로 딴 술병처럼 새로운 취기를 담고 있는 법이다.
머리가 떨어져나가는 숙취처럼 수습하기 곤란한 일일망정
술이나 연애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 죽었다고 해도 놀라울 것이 없는
삶이 여전히 가장 놀랍다.
상어는 배고파서 그렇다 치고
왜 미녀는 상어를 위해서 이미 죽어야 하는가.
한 손으로는 제 유방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거웃을 가리느라
붙들린 머리채를 어쩌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말레나의 저 개탄스러운 머리결*.
세속이란 머리채 같다.
어디에 숨어들어도 머리채가 붙들려 나온다.
하지만 안심하라. 놀랄 만하지 않을 때엔
아직 상어밥이 아니다.
* 헐리웃의 악동 린제이 로한이 다년간 알코올과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기자들이 사망기사를 써놓고 기다린다는 뉴스가 있었다.
* 쥬세페 토르나토레가 만들고 모니카벨루치가 연기한 영화의 제목이자 극중 여주인공의 이름이 말레나다.
귀신도 살고 사람도 살고
스승이 없었다면 오늘날 네가 있었겠느냐
하지만 제자가 없다면 스승이 있겠습니까.
가르치는 일이 새우는 일이기도 하고
교학상장이란 말도 있지만
배우겠다는 사람은 없는데 가르치려는 사람은 왜 이리 많은가.
본래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 예의는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것은
궁금한 건 많은데 알려주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공부는 지식만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서
학교가 반드시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니라서
커피숍도 있고, 화장품 가게도 있는 학교에는
학교가 없고, 제자가 없고, 스승이 없고, 가끔 친구는 있는데
교장선생님 말씀과 주례사의 미덕은 올바름에 있지 않고
그건 눈높이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길이의 문제이다.
짧아야 좋은 것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견딜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은 본부중대장님이셨는데
아, 스승님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은 왜 보느냐고 하시지만
처음부터 관심은 손가락에도 있었다. 당신은 손이 예뻐요.
따지고 보면 제사도 지내고 젯밥도 먹는 것이 사람의 일이지요.
귀신도 살리고 사람도 살고. 기왕이면 다홍치마고.
반걸음
저녁은 먹었냐는 물음에
화요일엔 식구들이 늦게 온다는
그대의 화답에도 반걸음
자도 피곤 깨도 피곤
어쩐지 몸은 죽죽 쳐지는데
창밖 목련 가지에 꽃눈 올라온 거 보고
때맞춰 내리는 비에도 반걸음
세상엔
모두 모여서 각자 외로운 가족도 있는 법이라서
그대가 종종 외롭다고 말할 때
종종과 외로움을 저울질 해 보는
내 생각도 반걸음
많이 아프냐는 걱정에
좀 쉬면 괜찮을 거라는 그대의 대답에
다시 반걸음
그대가 말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고
나는 언제나 그대의 침묵을 오래 듣느라
반 걸음, 다시 반 걸음
마음이 어두워지는 저녁에는
남은 불씨 위에 재를 뿌리듯
마음이 어두워지는 저녁에는
희미해서 박명은 더 어둡고
저녁 별들은 잔망스럽다.
남은 식구들이 둘러앉아
고춧가루를 가득 풀어 끓인 대굿국을 뜨며
받아낸다는 말의 무서움을 생각한다.
고춧물을 견디는 대구의 진국이
비린내를 누르는 고춧가루가
인생처럼 받아낸
국물을 뜨러가는 손목의
오래 빨아 해진 옷깃처럼
마음이 어두워지는 저녁에는
꼭 지금은 아니어도 좋다는 기별이 있고
괜찮아서 섭섭한 인연이 있다.
명년 봄에 세상 버린다는 어머니의 말처럼
마음이 어두워오는 저녁에는
함께 있어서 고맙다는 말은
생각할수록 아픈 말이다.
시론
모든 진지한 시는 나쁜 시라고 말한 사람은 오스카 와일드였지만, 진지하게 집중하면 그 자체로 희극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오스카와일드 자신과 모든 코미디언들이 가장 먼저 터득한 직업원리 같은 것이다. 요즘은 뉴스나 교양 프로그램보다 개그 프로그램이 더 시사적이고 비판적이며, 결론적으로는 더 사실적이다. 진지한 시나, 진지한 말처럼 지루한 말은 없지만 진지함을 일종의 희극으로 바꿔버리는 사태 속에서는 진지함이란 어차피 작정한 개그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도 그러한 객관화 위에서 발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시가 뭐냐고? 시 같은 게 왜 필요하냐는 질문을 자꾸 받는 것이 불편하다. 어쩌면 그런 질문이야말로, 한 직업의 대표자에게 전해지는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는 시는 왜 그렇게 어려운가라고 묻거나, 시가 꼭 필요하냐고 묻거나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시 써서 얼마나 버느냐고 묻는 것이나 시인들은 무얼 먹고 사나요 라고 묻거나. 웃길 수도 없고, 웃기지도 않는 삶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렇지 않아도 영감이 메말라 붙은 삶에서 시 쓰는 일이 더 어려워지는 거 같다. 시인이라고 별것을 먹을 리도 없고. 가장 좋은 대답은 반문이 아닐까 싶다. 왜 시가 뭐냐고 물어야 하는가? 시가 필요한가를 물어야 하는 이유는 뭔가?
나는 죽은 양종철이 남긴 개그를 가장 좋아한다. 자신의 뇌는 거의 새것이나 진배없다고 했던 말. 나는 이 말이 너무나 우습다. 저 ‘거의’라는 말의 정교함이, 세련됨이 저 유머의 대부분이라고 한다면 이게 시 쓰는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자신의 뇌가 새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은 뇌를 거의 쓰지 않았다는 말인데,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나이가 있고 하니 ‘거의’라는 능청스러운 부사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해도 듣는 사람 나름으로는 대통령이 ‘거의’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거나, ‘거의’ 혼잣말을 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거니까. 아무튼 저 ‘거의’라는 말에는 사실에 육박해가는 어떤 과장이, 그 과장을 능청스럽게 밀어붙이는 부드러운 유머가 있다. 나는 작정하고 슬프거나, 작정하고 기쁜 일은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표백된 감정이라고 왜 없을까마는 세상일에는 슬픈 일에도 기쁜 면이, 기쁜 일에도 애석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우울하고 서글프고 못난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가 세상을 꼭 그렇게만(우울하고 서글프고 못났다고 진지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러한 시가 바로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나쁜 시일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 시대가 얼마나 유머를 갖기가 어려운 시대인지를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졸시 「코뿔소」에서 “불행한 사람에게 묻는 안부처럼”이라고 썼지만, 너무 끔찍한 상처를 안고 고통 받는 사람들 앞에서 세련된 유머란 그 자체로 모욕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객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참극이 다만 참극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할 사유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한 객관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희미한 유머라도 있어야 한다. 개그 프로그램이 더 시사적이라는 작금의 사실에는 그러한 뜻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눈에 들어간 모래처럼 지분거리는 세상이지만 작은 웃음이 필요하고, 웃자니 어이없는 현실에 대한 개탄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까닭 말이다. 웃음도 개탄도 필요한 상황이 우리의 감정의 계발이 처한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개탄과 비판에 해당하는 일을 담당할 만한 건전한 미디어 환경이라면 시나 개그는 조금 더 경쾌한 방법으로, 좀 더 멀리까지 자기 부정을 밀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닫힌 사회에서 시는 경쾌함보다는 나쁜 진지함을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시가 상대하는 세계는 완강한 사실의 세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성의 세계이다. 시가 만들어내는 사실성의 깊이만큼만 사실에 다가가는 것이다. 진지하기만 하고 재미없는 시는 사실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사실로 말하자면 나는 지금 세계는 거의 폭동이 일어날 만큼 심각하게 불공평한 상황이라고 느낀다. 쓰디쓴 웃음, 웃픈 현실을 앞으로도 시나 개그에서 계속 만나야 할 것 같다./안희연
**약력:2002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현 계간 《파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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