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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소시집/이병철/개기월식과 도도한 곡예사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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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이병철
개기월식과 도도한 곡예사
너는 건조하고 습하게 긴 꼬리를 끌며 온다
비릿한 꿈은 어느 지붕 위에 두고 왔니
네가 먹다 남긴 밤 열두시는 달빛에 젖어 아직 싱싱해
나는 코르크마개처럼 압축된 방에 있어
구름에 고인 빗물이, 공기와 처음 만나는 와인이 쏟아지기 전의 시간
쪼글쪼글한 히프마저 탱탱해지는 이 어둠은 너만의 것
도도한 곡예사야, 공중제비를 돌아봐
홀쭉한 네 옆구리에서 보드라운 털들이 부풀어 오르고
별빛과 별빛 사이를 달리는 발톱이
생쥐 냄새를 잊은 채 꽃물 드는 걸 보고파
네가 벽을 타고 오른다 너는 젖지도 마르지도 않으면서 불어나지
내가 방문을 열면 너는 옷을 벗는다
물을 너무 많이 빨아들인 베고니아,
축 늘어진 빨강만 깨우지 않으면 돼
비눗방울을 불어, 내 몸에 떨어뜨려줘
땀내 가득한 숨 속에 널 가두고 말테야
비가 와, 습하고 건조하게
나는 네 속으로 들어간다 마른 네가 젖고 젖은 내가 마른다
내 손에 잡힌 꼬리가 꼿꼿이 일어서는 걸 못 참겠어
이제 네 꿈속으로 날 데려가줘
비가 그쳐, 물티슈 같은 밤이 한 장 내려와
젖지도 마르지도 않으면서 네가 간다
문을 닫아주겠니?
우산집
우산으로 만든 집에선 비가 손님이야
비가 자꾸 문을 두드려
젖지 않는 곳이 여기뿐이란 걸 알고 있나봐
비를 비 맞춘 채 우리는 웅크리고 있었다
뾰족한 손가락을 가진 비는
우산 위에서 칠판 긁는 소리로 변하는지도 몰라
네가 통과시킨 오후가 내 파란 이마 위에서 밤이 되었다
우산집이 무너지면 세상이 모두 젖게 돼
문을 열어주지 말자, 여기서 나가지도 말자
땀냄새가 강아지처럼 품을 파고들었고
우리는 자꾸만 침을 늘어뜨렸다
그림자 없는 비가 널 그림자로 만들려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집으로 가는 네 종아리에
내 손톱과 혀와 눈알이 흘러내렸다
너와 내 비밀이 이젠 나만 아픈 병이 되어버렸잖아
나는 이 세상의 손님이야
비에 젖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어
고등어조림
고등어는 한 손 두 손 하고 센다는 걸 내게 가르쳐줄 엄마는 없다
냄비 뚜껑을 열면 진흙 속에 매장된 몸통들이 매운 추깃물을 머금고 있다 김치는 시체를 덮는 비닐을 닮아 썩지도 않는다 굳어버린 국물 위에 고춧가루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건 냄비가 꽁꽁 얼었기 때문이다 묘지에 싸락눈 내리는 꿈을 꾼 날도 냄비 뚜껑을 열어야 했다
배고프기 싫어도 배고파지는 저녁, 냉장고엔 또 양은냄비가 있고
숟가락을 삽처럼 쥐고 냄비 속을 뒤적이면 삽날에 부서진 손들이 내 허기를 비린내 속에 가둔다 차가운 손일수록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고 내게 가르쳐줄 엄마도 없다 시뻘건 무덤에서 기어 나온 한 손 두 손이 등 푸른 칼을 들고 내 뱃속을 가르는데
엄마, 언제 와?
빔
프로젝터를 켠다
푸른 피를 채혈하듯
광선의 정맥을 쓰다듬는다
잉크가 번지는 물속으로
나는 물안경을 쓰고 잠수한다
사탕 같은 물고기들이 공기방울을 뿜는 바다 속
깊이 내려갈수록 숨 쉬지 않아도 숨 쉬어진다
물의 가장 깊은 곳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는데
불꽃을 떠올리자 무서운 상어가 온다
물고기들이 도망친다
내 팔다리를 입에 물고
물 밖으로 나가야 해
아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자
수압에 뒤틀리는 비대칭의 몸
달력이 해파리처럼 떠다니는 심해에서
나는 어제 읽은 책들의 높이만큼 가라앉는다
불꽃처럼 나를 보는 단 하나의 눈
불꽃처럼
불꽃처럼
파랗게 목 졸린 침대 위로
빈스크린이 내려온다
당신은 호랑이에게로
피 흘려본 적 없는 당신은 지독한 감옥이죠
혈관에 갇힌 채 종신토록 바닥을 기며
아무리 심장을 떠나도 심장으로 되돌아와야만 하는
피의 고통을 묵상한 적 있습니까
당신의 얼굴이 쉽게 붉어지는 것은
짓눌린 피가 당장이라도 정수리를 뚫고 나와
육체를 허물어뜨리고 싶어 하는 까닭이랍니다
안에서만 흐르던 것이 밖으로 흐르면 혁명이에요, 구원입니다
당신은 꼭 호랑이에게로 가세요
어떤 칼도 기계도 더 이상 당신을 겨누지 않을 때
당신은 동물원 펜스를 넘어
가장 권태롭고 가장 다정한 호랑이에게로 가세요
가서 옷과 신발을 벗고 알몸으로 춤을 추세요
호랑이 턱에 당신의 쇄골이 분쇄되고
마침내 몸통에서 팔이 떨어져나갈 때
보세요, 공중에서 폭죽이 되는 피를
바위로 달려가 꽃이 되고 모래 위 글자가 되는 피를
새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탄환이 되고 롤러코스터가 되는
피의 해방, 피의 자유로운 행진을 보세요
당신 육체의 견고한 죄가 허물어지는 것을
피가 당신 영혼에 목줄을 채우고 배수구로 산책 가는 것을
시작메모
이제 앞을 못 보는, 몸이 작아진 할머니 손을 잡아드렸다. 처음에는 내가 잡았는데 나중엔 꽤 오랫동안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추운데 어떻게 살았냐고. 손이 왜 이리 차갑냐고. 앞에 있는 나 대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면서, 나 아닌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서 내 손을 오래 잡아주었다. 할머니 손이 좋아서 그날 밤 내내 왼손으로 오른손을 쓰다듬으며 잤다. 집에만 다녀오면, 그 좁고 더러운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꼭 눈물이 난다. 그날은 눈물까지 얼어붙을 만큼 추운 밤이었다.
몇 개의 뼈아픈 거절과 절망적인 진단과 어찌할 수 없는 빈곤과 모래가 거의 다 쏟아진 시계와 몸의 붕괴가 한꺼번에 왔다. 할머니의 손을 자꾸 생각하자. 그러면 힘이 난다.
**약력:2014년 《시인수첩》으로 시 등단. 2014년 《작가세계》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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