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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특집I/내가 기억하는 시 한 편/김성대/나는 백지 앞에 앉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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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I
내가 기억하는 시 한 편
김성대
나는 백지 앞에 앉지 않는다
ㅡ김성대,「야수의 선택」
사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잖아. 세상에 하고 싶은 거 하나 없는 인간이 시라는 걸 쓰는 거니까.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걸 감추려고 쓰는 거니까.
그 말에 나는 숨을 골라야 했다. 자리는 어느새 시인 조롱 내지 냉소 모임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시집을 팔러 다닌 적이 있다. 비 오는 날 손수레를 끌고 시위를 하듯 시집을 낭송하며. 그는 시집을 쌓아 태운 적이 있다. 어느새 불타버린 재투성이 시집들. 같이 시 쓰자고 하는 말, 같이 죽자고 하는 말 같았는데,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다시 숨을 골랐다.
매일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건 사실일까. 시만 쓰고 산다는 건 아무래도 그렇잖아. 그러고 살 수도 없겠지만. 지지리 궁상을 떤다기보단 어딘가 지리멸렬해 보여. 낯간지러워 보여.
극소수자들이지. 이미 끝나버린 놀이를 혼자 하고 있는 것같이... 스스로 최면을 거는, 스스로 고립되는.
나는 낯이 간지러웠다. 그들의 농담에, 막다른 농담일지, 여지없는 냉담일지,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자루 빠진 빗자루같이 간지러운 낯으로 애써 웃음을 지어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시도 그랬다. 쓸수록 나를 갉아먹고 옭아매고... 사라지게 했다. 살면서 사라지는 삶, 쓰면서 지워지는 글이었고, 쓰는 것이 곧 잃는 것이었다. 자신의 유령, 시를 쓸 때면 나는 나의 유령이었다. 자신이 쓴 글이 보이지 않는 글쓰기. 잃어버린 것이 아닐 거라고 직감했지만 잃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야수였지만 야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 일도 그렇다. 첫날은 집에 돌아와 미미를 안고 울었다. 짖지 않는 개도 함께 울었다.
00월 00일. 황소개구리 0마리, 뉴트리아 0마리
이 일은 강한 어깨가 소용없었다. 동그란 새가 열리는 나무가 있는데 그 새는 모두 검다. 시간이 청소해 줄 거야. 눈을 불어 주면서 미미가 말했다. 뒤집어진 새를 다 바로 해 놓고 나는 숨을 골랐다.
00월 00일. 황소개구리 2마리, 뉴트리아 1마리
시작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덫을 놓으면 되지 풀스윙을 하거나 산산조각 낼 필요는 없다. 운 나쁘게 헛스윙을 하거나 킬러가 될 필요는 없다. 뭍에서 물로 뛰어드는 개구리로 못이 자박자박했다. 추리닝 속에 추리닝과 함께 삶은 새가 종종거리고 있었다.
00월 00일. 황소개구리 3마리, 뉴트리아 2마리
마구 잡아들이거나 씨를 말려서는 안 된다. 가령 뉴트리아의 항문을 꿰매 뉴트리아의 멸종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 밥줄이 끊기기 때문이다. 운 좋은 날이라고 운을 탐하지 않는다. 운 나쁜 날이라고 운을 탓하지 않는다. 적절히 잡고 적절히 멈추면 되는 것이다. 까마귀들과 다툴 때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발이 빠르다.
00월 00일. 황소개구리 3마리, 뉴트리아 3마리
어느 날은 비둘기가 추가되었다. 생계와 생태계가 헛갈렸다. 시간이 소독해 줄 거야. 미미가 사온 장화는 붉고 개의 발은 검다. 비가 오면 시체가 떠오르곤 했다. 내가 잃어버린 배트를 쥐고 있기도 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닐 거라고 직감했지만 잃어버리기로 한다.
00월 00일. 황소개구리 2마리, 뉴트리아 2마리, 비둘기 0마리
새가 발을 헛딛는다. 새의 실수가 잦아지는 계절이다. 날아야 할 것들이 바닥에 있다. 시력이 나빠져 가는 눈이 오는 길에 남는다. 나는 달리다가 테라스에 앉아 있는 나를 보았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야수의 선택」,『세계의 문학』 2015년 여름호
말을 잃은 후의 말 같은 것. 말의 몸짓 같은 것. 나는 눈을 감고 쓴다. 시와 시 사이의 시간을 덜어내며 시를 잃은 이후에 쓰는 시를 생각한다. 거기에 닿기 위해 쓰는 시, 어디에도 가닿지 않기 위한 시쓰기, 시로부터의 개종을 생각한다. 전도의 형식으로 온 거니까 끝내 개종의 형식으로 보내리라고...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한다. 시로부터의 개종은 과연 가능한가, 하고 묻지 못한다. 이것은 소리 없는 말들이고 귀먹은 문장들이다. 문장에서 떨어져 나온 몇 뼘의 여백, 소진되지 않고 끊어진 불완전한 여백. 나는 백지 앞에 앉지 못한다.
시를 시인에게 맡겨 둬선 안 돼. 그럴 필요도 소용도 없어...... 시를 시인에게서 해방시켜야 해. 시에서 시인을 해방시켜야 해. 시인은 있어도 시는 없는 시대가 가고, 시는 있어도 시인은 없는 시대가 올 거다... 그러니까 차라리 목메어 외쳐야 한다. 어서 죽을 거라고,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죽고 있다고,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 그게 가능해야 한다.
그가 말했다. 입술이 타들어 가는 말이었고, 목이 불거지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나를 멈추게 했으나, 멈추지 못하게도 했다. 모래알 같은 말이 스르르 안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입안에 고였지만, 목에 걸린 머리카락처럼 간질였지만, 내뱉지는 못했다.
나는 그 자리를 구성하는 게 싫었다. 내가 구성원인 게 싫었지만, 나는 내가 구성원인 게 싫은 그 자리에 종종 나간다. 그들이 나를 구성하지 않듯 내가 그들을 구성하지 않으니까. 나를 유령으로 봐주는 그들에게 나는 유령이다. 툭 터놓자는데 툭툭 털어 버리자는데 무엇을? 무엇을? 시력이 나빠져 가는 눈으로 나는 듣는다.
나는 백지 앞에 앉지 않는다. 모든 곳이 백지가 아니고, 모든 첫 문장은 다시 씌어진다.
이 문장을 비워 둔 이유를, 지우지 않고 남겨 둔 이유를, 그들에게 들어볼 것이다. 눈을 잠시 멀게 하는 사이다를 마시며, 사이다의 힘을 빌어, 쓸데없는 것을 쓸데가 필요하다고. 이렇게까지 써야 할 쓸모를 찾기 위해 이렇게까지 써본다고. 우연히 읽히는 한, 뜻밖에 새로 씌어지는 한, 내내 미완성일 거니까. 설마 시인인가? 그렇다. 그들을 시인으로 만드는 게 최종 목적이다. 같이 죽자.
**약력:2005년 『창작과비평』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사막 식당』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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