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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신작시/허림/귀여운 농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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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허림
귀여운농담
강원도 홍천하고 동막골에 사는 내가
오랜만에 서울 가려고 이른 새벽부터 서두르고 있다
늙은 어머이는 새벽밥을 짓고
나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머리를 감고
장농에 넣어두었던 속내이도 꺼내 입고
장날에 사주신 비니루 구도도 꺼내 닦는다
하루 세 번 오는 버스를 타러 고개를 너머 간다
어머이는 가면서 먹으라고 삶은 계란과 고구마를 싸 주신다
한눈 팔지 말고 잘 댕겨 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울은 멀다
아무리 잘 차려 입고 가도 몸에선 풀내가 난다
나는 갈 때마다 멀미를 한다
멀미는 멧새울음 같다
나도 멧새처럼 말투와 발걸음이 어수룩하다
어머이는 멀미가 나려하면 흙내를 맡으라고 하신다
서울 흙내를 맡으면 더 멀미가 나요 하면
비싸서 그럴 게야
하하 웃으신다
푸른 벌레와 함께 시 읽다
푸른 개를 읽다가
시의 행간을 기어가는 벌레와 마주쳤다
불 켜진 창 넘어 들어온
종도 이름도 알 수 없는 벌레
행간 속에 담긴 생의 본적과 주소를 찾아 천천히 읽어가는 동안
그는 인간의 마을에서 낯선 생의 행간을 기어갔다
날개도 다리도 보이지 않을 만큼 그는 작았고
시 한 편을 읽고 가는 동안
잠시 머무른 순진한 노역의 행간을 나도 따라 읽었다
그는 이쯤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기어갔고 맴맴 돌기도 하다가 팔짝 뛰기도 했다
무엇이 그를 절박하게 했을까 그의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아뿔싸, 벌레의 몸 밖으로 내비친
푸른빛의 피. 그가 날고 기어가는 힘이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생의 몸은 바다였다
바다 같은 핏기가 있고 파도 소리가 들렸다
그가 천천히 시의 행간을 기어가는 동안
나는 생이 닿아있는 행간 속에 머물러 뭔가를 되새김하다가
뜨겁게 실어 나르는 생의 유속을 감지한 듯
다음 행을 읽는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다만
푸른 피를 가진 벌레가 깃 든 단칸방 같은 행간
날다 기다 써놓은 형상문자
푸른 피를 가진 벌레와 함께
생의 행간을 사유하며 읽는 생생한 시 한 편
그가 문밖으로 날아가자
내가 읽다만 시가 낮설어졌다
**약력:1988년 〈강원일보〉신춘문에 시 당선.《심상》으로 등단. 시집『말주머니』 ,『울퉁불퉁한 말』등 다섯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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