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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집중조명/백인덕/서정의 확장(擴張)과 세계 이해의 접속(接續)-김종의 신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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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68회 작성일 16-08-2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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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백인덕





서정의 확장(擴張)과 세계 이해의 접속(接續)-김종의 신작시



1.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상대성의 기준이 되어줄 상대를 설정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선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상대성이라는 개념은 그 내부에 다른 것(타자)’의 핵심 인자(因子)를 중심으로 변화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모든 서정시의 기본 원리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시가 소통의 차원을 넘어 궁극적으로 공감과 상호 이해의 층위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믿는 시적 태도에 있어서는 의심할 바 없이 자명한 원리라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주체대상(세계)’객체의 차원에서 포획, 변형을 가하면서 자기의 위상을 확립해 왔다. 시적 자아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우리시의 경우, ‘시적 자아라는 개념이 퍼소나, 무의식, 주체, 시인 등 여러 개념 층위들을 함부로 얽어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소지가 되곤 했다. 지금도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앞서 기술한 서정의 원리에 침윤하는 경우, 시적 자아는 주체나 시인으로 곧바로 환원되어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앞의 원리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즉 감정이입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일 뿐, 뒤의 목적, 진정한 소통과 이해라는 층위로 상승하기에는 그 역량이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김종 시인은 우선 근 사십년에 이르는 시력(詩歷)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우리시의 서정 정신과 가치를 올곧게 지켜 온 시단의 중진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번에 접하게 된 신작들은 근대적 주체로서의 시적 자아가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시적 형상화를 통한 서정성의 확장을 이뤄내면서 이를 보다 깊은 세계 이해의 경지에 어떻게 접속해 나가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바람 끝이 차다는 말이 귀에 감긴다

장롱구석에 위리안치 시킨 내복을 풀어준다

내복들도 답답했던지

구겨진 팔다리를 흔들어보고 한참을 부산하다

잔소리처럼 죄어오던 답답한 구속에게

다리도 내어주고 팔도 내어준다

내복은 뱃구레부터 어머니의 약손처럼 문질러준다

싫지 않게 가려운 게 애완견 뭉치의 혀끝 같다

고요가 싫어지면서 얻어온 뭉치는

오나가나 발끝에 척척 감긴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발걸음을

온몸이 귀가 되었다가 입술이 되었다가

현관문을 열면 한달음에 앞산이 되었다가

같이 놀아주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인다

첩첩이 숨어있던 때 절은 살림살이에

고요의 한기를 몰아내준 뭉치처럼

들러붙은 세월의 한기를 내복이 몰아내주려나

뭉치와 내복이 한 동무 하려나

마음과 몸의 온도를 1씩 올렸으니

이 정도로 무장하고 길을 나서면

저토록 시퍼렇게 주름주름 흘러가는

노을 강의 웃음 위를 건널 수 있을는지.


                                    -1에 목이 메이다전문


 

시의 표면은 일상의 사소한 느낌으로서 내복뭉치의 이야기로 엮여있다. 이 작품은 생동감 있는 표현과 자연스러운 시행의 흐름, 주제를 압축하는 시인의 솜씨 등이 모두 수월한 하나의 특징으로 언급될 수 있지만, 필자는 작품의 구성을 중심으로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가치와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연 구분은 되어 있지 않지만, 시적 서사의 흐름을 따르면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1 ~ 8행까지 내복을 중심으로, 다른 하나는 9 ~ 18행까지로 뭉치를 중심으로, 끝으로 19 ~ 22행까지는 화자의 정서적 대응으로 묶을 수 있다. 시인은 바람 끝이 차다는 말이 귀에 감기는 계기로 장롱구석에 깊숙이 넣어둔 내복을 꺼낸다. 내복을 껴입는 행위는 곧, “뱃구레부터 어머니의 약손처럼 문질러준다는 느낌을 통해 어떤 따스함의 기억을 상기시키고, 이는 자연스런 연상을 통해 뭉치와의 교감으로 이어진다. 이때 교감이란 결국 문득문득 목이 메이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할 수 있는데, 결국 내복뭉치는 시적 화자의 마음과 몸의 온도를 1올려주어 그가 저토록 시퍼렇게 주름주름 흘러가는/노을 강의 웃음 위를 건널 수 있을는지질문 앞에 서게 한다. 요약하면, 이 작품은 계기행위기억연상통찰(성찰)’이라는 경로를 따라 형상화되는데, 이는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의미 있는 단단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내복과 뭉치로 비유된 마음과 몸무장이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라 할지라도 결국 저토록 시퍼렇게 주름주름 흘러가는/노을 강의 웃음을 만나 그것이 비관적이든 회의적이든 색깔을 논외로 하고 하나의 보편성으로 자연스럽게 승화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적 역량은 결국 시인이 관심을 기울여온 시적 대상(객체)에 대한 태도에 의해 그 크기가 한계지어지기 마련인데, 김종 시인은 작품, 무릎을 통해 그 한계의 임계(臨界) 어디쯤을 보여준다.

  

  

누나는 우리 집 무릎이었다

누나가 시름시름 앓아누워도

무릎만은 까딱없는 줄 알았다

인고의 활액막이 찢기고

온몸이 벌겋게 부어오른 누나는

그제서야 큰애도 큰누나도 아닌

건강이 난파된 열다섯 살 소녀였다

뒷산 뻐꾸기에게 누나가 시집간 날

비자나무 무릎은 모래처럼 허물리고

벼랑에 내몰린 우리 가족의 무릎은

졸지에 허리 꺾인 돛폭이거나

직립이 불가능한 퇴행성 앉은뱅이란 걸

뻐꾸기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무릎부분

    

 

시가 결국은 진정한 자기 체험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보편적 특성을 발굴해 이를 소통과 이해의 층위에 올려놓는 것이라면, 모든 서정시는 일정 부분 기억의 음영(陰影)’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날 것으로서의 경험이란 언제나 순간일 뿐이며 정서와 인지의 좌표어디에도 채 기입(記入)되지 않았음으로 인해 시적 계기로 작동할 수 없다. 언제나 강렬한 기억만이 시적 계기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김종 시인은 가족 애사(哀史) 한 편을 무릎이라는 충분히 상징적이지만 그만큼 지시적인 사물(명사)’로 치환하여 그려내고 있다. 시인은 무릎이 꺾이자/비자나무처럼 단단하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무릎은 중의적으로 신체의 일부분과 사회적 맥락의 일상어 용법상의 의미 두 가지를 다 지칭한다. 1연에서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즉 감정의 동요 없이 열다섯에 시집간 큰 누나를 생각한다. 우리 민족의 미시사에 소양이 조금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다자녀 세대에서의 맏딸의 역할과 조혼의 풍습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이 작품이 애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마지막 연에서 큰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 “뒷산 뻐꾸기에게 누나가 시집간 날은 누나의 죽음의 완곡한 표현이지만, 이는 또한 언제나 영혼이나마 가까이에 두고 싶은 간절한 바람의 표현이기도 하다. 시인은 뒤늦게 누나는 우리 집 무릎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의 이해가 여기에 머물고 말았다면 이 작품은 진정한 성찰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집 무릎보다 중요했던 것은 결국 큰누나가 건강이 난파된 열다섯 살 소녀였을 뿐이라는 것을 늦게나마 알아채는 것이다. 이 안타까움과 후회가 종국에는 나의 꺾인 무릎을 너머, 즉 나의 상황과 기억의 접속을 통해 서정의 어떤 원형질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2.

이번에 접하게 된 김종 시인의 신작들은 한 편을 제외하고 무릎, 집게, 겨울산, ‘당산나무등 시적 대상(표제인가 여부에 상관없이 객체’)이 사물을 명료하게 지시하고 있다. 이는 주체와 객체’, 또는 시적 자아와 대상을 일단은 분리, 객관화하겠다는 것인데, 객관화는 필연적으로 거리(距離)를 만들고, 거리감은 지나친 감정이입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서정을 세계 파악의 색인으로 확장하는데 보다 유효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시를 소통과 이해의 차원으로 끊임없이 밀어 올리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생생한 현실의 한 자락을 살짝 들치면서 항상 보호용이나 위장용으로 제 집을 이고 지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인간형 집게를 보여준다.

    

 

감골댁은 건축가다

노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무게와 부피의

허섭스레기를 개미처럼 물어 나른다

헌 박스와 나일론 끈과 스티로폼과 비닐봉지와

헌 막가지가 감골댁 건축재료의 전부다

 

아이들 다섯을 낳고

바람 치는 들판에서 혼자된 감골댁은

사글세 월세방을 전전하며

언제 내칠지 모르는 노심초사로 청상을 건넜다

구십 고개가 코앞인 지금에도

무주택의 설움은 떠날 줄을 몰랐다

뼛속까지 달라붙은 사람괄시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집게부분

    

 

어쩌면 시가 현실의 재현이거나 불충분하지만 어쨌든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논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여든하고도 일곱 해를 산 한 노파, ‘감골댁의 거의 생존 본능에 가까운 집착을 낳은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해 분노하게 될 것이다. ‘청상의 외로움과 고초, ‘무주택의 설움’, ‘사람괄시는 분명히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에 의한 핍박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현상으로서 감골댁건축가로 정의하고 있다. 그것도 노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무게와 부피건축재료를 사용할 줄 아는, 그래서 한 채 박스집으로 자신의 설움을 스스로 해원(解寃)하는 당당한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시인의 세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없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억과 현재적 욕구가 결합된 세계의 표지물로서 당산나무를 소환하여 그 한량다운 풍모와 그의 소리 없는 공헌을 상기하고 있다.


소리 북처럼 득음한 세월을

팔 벌려 안아보았다

칠백년 된 강건한 몸이

허공 멀리까지 육중하게 만져졌다

손 모아 밤샘 기도하는

삼천갑자 동박삭을 뵙는 듯했다

 

풍우를 막아서던 가지 몇 개가 부러졌다

다람쥐보다 빠른 사람들이

어떤 것은 받쳐주고 어떤 것은 절단했다

절단된 뒤에도 나무는

솥단지 같은 제 속을 보란 듯이 열어놓고

높은 키 등대처럼 온 마을을 밝혔다

 

마을 대소사를 너털웃음에 내바람하던

풍채 좋고 팔자 좋은 당산나무는

노환에 링거 꽂고 시름거리면서도

하늘 높은 별들과는 밤 새워 소곤거리고

넓게 편 그늘자리에는 평상을 놓아

펄펄 끓는 삼복더위를 거뜬히 건네신다

 

정든 사람 정든 마을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이리 태평한 세월은 없다시는지

하늘만큼 땅만큼 멀리 웃어 보이고

한량으로 이날 평생을 살랑이신다

                                 

                                    -당산나무 한량께서는전문

    

 

시인은 칠백년 된 강건한 몸팔 벌려 안아본다. ”소리 북처럼 득음한 세월허공 멀리까지”, ‘당산나무의 시공(時空)을 시인의 몸으로 느끼고 이해한다. “뵙는 듯 했다는 시각적 인지는 다음이다. ‘으로 을 만나는 접촉의 경지를 보여준다. 뒤이어 2연에서는 다람쥐보다 빠른 사람들의 조급과 솥단지 같은 제 속의 당산나무의 여유가 대비를 이루고, 3연에서는 마을 대소사는 물론 일상의 작은 행복에까지 관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한량의 풍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마지막 연에 이르러 정든 사람 정든 마을을 한자리에 앉혀놓고/이리 태평한 세월은 없다살랑이시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당산나무지만, 그 이면에는 시인의 바람이 깃들어 있다. ‘당산나무야말로 고향 마을의 가장 주요한 상징 계열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는 현재의 한량같은 당산나무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인이 그리는 고향에서의 미래상, 혹은 만년상(晩年像)일지도 모른다. 이를 시적 화자가 직접 감정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적확한 대상에 대한 정서적 조응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서정의 개념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받아들여 감정이입을 통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에만 함몰되고 만다면, 이는 결국 시를 자기 자신에게로만 재귀(再歸)하는 고백과 독백의 한계에 가두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반면에 주체를 무의식에 의해 추동하는 욕망의 집합체로 인식하면서 개인적 억압에 집중하는 것 역시 소통을 거부하면서 난해성의 회로에 갇혀버리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김종 시인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비틀비틀 눈물 사이로 산이 되는 일이다/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그곳에 가서/눈폭풍이 몰아쳐도 눈꽃 피우는 일이다”(겨울산)라는 시적 명제를 통해 나이듦“, 아니 시작(詩作)‘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바흐찐의 주장처럼, 시가 진정한 소통과 세계 이해의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주체객체의 상호성에서 객체(대상)이 들려주는 말 또한 주체의 그것과 똑 같이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즉 타자(대상, 세계)가 또한 주체라는 것을 흔쾌히 인정해야만 한다. 김종 시인은 이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눈폭풍을 이기는)눈꽃으로 형상화해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앞으로의 작품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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