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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집중조명/윤석정/순환하는 시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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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12회 작성일 16-08-23 14:58

본문

집중조명

윤석정





순환하는 시

-골목


  

집 나간 옆집 개

이 골목을 지우면서 몰래

혼을 꺼낼 곳으로 숨었을 것이다

 

개 짖는 소리

문틈으로 몰려든 무더위보다

내 방안으로 끈질기게 들이쳤고

골목의 언저리를 물어뜯었다

 

미친 새꺄 시끄러

 

집 밖에서 날뛰던 개에게 나는 소리쳤다

개는 골목을 빠져나간 혼에게 짖었을 것이다

 

마비된 왼쪽 다리를 끌어당기며

그는 밤의 골목을 오갔고

골목에 찌든 지린내를 풍겼다

그는 날마다 골목의 편린들을 그러모아

대문 안쪽에 쌓아두었다

 

무더위가 시작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거나하게 취한 그가

세상 참 좆같다 소리쳤다

 

미친 새꺄 시끄러

 

누가 그에게 대꾸했다

밤의 골목을 물어뜯던

개 짖는 소리

 

늙은 개가 집을 나간 뒤

어느덧 무더위는 몰려나갔고

이 골목에서 그도 지워졌다





순환하는 시

-



비 그치고 안개가 이불처럼 펼쳐진 새벽

젖은 나무들이 게워낸 꽃 봉우리는

이역만리에서 달려온 저번 생들의 발바닥

이번 생을 살고자 저번 생이 딱 한 번

꽃신 신고 북쪽으로 행군할 채비를 했고

때마침 비는 나무의 발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겨우 목숨만 챙겨왔다

내 마음에서 사는 것들은 안개보다 더 희뿌옇고

죽음에 얼룩진 발바닥을 가졌다

발바닥을 디뎌야 일어날 수 있듯

나는 죽어야 살아나는 것들을 생각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갔던 개구리들이

개울가로 기어 나와 알을 낳고 밤낮으로 울었다

우는 소리를 엿듣다가 방문을 닫으면

냉장고가 방구석에 웅크린 채 쉴 새 없이 울었다

마음을 열어 제치고 다 내어준 서러운 목숨들

나는 내 마음에서 죽은 것들을 생각했다





고백의 형식



당신과 내가 만났을 때 미래의 인연을 감지했거나 풋풋한 떨림이 있었던 건 아니다 예상을 빗나가는 게 예상이라면 당신과 나의 거리가 이토록 좁혀질 줄 몰랐던 그 순간 당신은 나에게로 나는 당신에게로 서로를 당기듯이 이끌려왔다 어느 봄밤, 벚꽃나무 아래 앉아 당신은 깊어진 눈으로 나의 서툰 고백을 들었다 두근대던 나를 감추지 못했을 때 벚꽃들이 나를 휘감아줬고 당신과 나의 거리에 내게서 이탈한 고백들이 수북이 쌓여갔다 당신이 나라는 형식을 그러모았던 그 순간 당신과 나의 거리는 예상을 빗나가는 게 예상이 아닌 두 행성이 충돌하여 합체되는 형식이 아닌 지구와 달이 평생 밀고 당기듯이 가변적으로 형성됐다





밤의 병원



발들이 밤의 강가를 걷는다

휴식의 이면으로 자정이 흐른다

손들이 낚싯대를 드리운다

수면을 뚫고나온 물고기가 중력을 잃고

물 밖으로 입원한다

밤의 자식들이 의자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물의 결을 지켜본다

그 결들이 결의 결에 갇혀 허우적댈 때마다

아픈 마음들이 낚시 바늘에 꿰인 듯

물속으로 던졌다 솟구친다

허우적거리던 미끼를 잃은 바늘들

허공으로 너무나 가볍게 솟구친다

 

()이 사()에 갇힌 건지 사가 생을 가둔 건지

몸이 마음을 가둔 건지 마음이 몸에 갇힌 건지

눈물이 눈에 갇힌 건지 눈이 눈물을 가둔 건지

 

어둠에 가려진 얼굴을 비추는 액정들

손들이 만지작거린다

수만의 물고기들이 액정 속에서 헤엄친다

밤은 눅눅한 손을 뻗어 진찰하듯

몸들을 문지른다

야행성이라는 주사바늘을 꽂는다

밤의 자식들은 병명(病名)을 모르므로

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워야 하는 물고기처럼

계속 뻐끔거릴 뿐이다

 

잘린 손가락을 봉합한 자

찢어진 손을 붕대로 감은 자

부러진 왼팔을 깁스한 자

아픔을 잊게 하는 환자복을 입고

손들을 심장 위로 든 채

밤의 링거를 맞으며 강가를 걷는다





순환하는 시

- 안부



늦은 저녁, 전화를 받았다

아가냐?

어느 할머니가 세 번 전화를 잘못 걸었고

세 번 뚝 끊었다

 

돌연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잘 지내니 너도 잘 있거라

재생버튼을 누른 듯 안부의 안부가 반복되었다

나는 잘못 지낸 적이 없었다

술은 비울수록 가득 채워졌고

살은 뺄수록 더 쩠다

 

어느 할머니가 네 번 전화를 걸었다

아가, 오늘도 잘못 지냈어?

시를 읽었더니 오늘은 견딜 만 했어요

너나 나나 비슷하겠지

저는 할머니의 얼굴을 몰라요

 

시집을 뚝 덮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읽을수록 투명해지는 얼굴들에게 안부를 전했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친애하는 얼굴들을 반복해서 저장하고 덮었다

본적 없던 얼굴들은 금방 잊혀졌다





<시론>

바람의 노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내가 나를 이렇다고 말하기 어렵듯 시를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더 어렵다. 시를 논한다는 것은 몹시 까다롭고 힘겨운 일일 텐데 나는 끊임없이 묻고 답했다. 넌 대체 뭐니? 난 그냥 시지. 내 안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내 바깥으로 바람이 불어나가듯이 시는 내 안팎에서 말했다. 폴 발레리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했듯이 나는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중얼거렸다. 나는 시에게로, 시는 내게로 불어왔다. 살아있는 것은 의식과 무관한 호흡을 지녔으므로 나의 리듬은 호흡과 바람의 순환으로 생겼다. 그 순환에 따라 시의 리듬이 태어났다.

시의 리듬은 나의 몸으로 흘러 다니더니 나의 영혼으로 스며들었다. 시가 음악이고 음악이 시라고 믿었으므로 시는 내 영혼에 깃든 선율이 되었다. 가끔 나도 모르는 노래가 내 안에서 흘러나올 때도 있었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듯이. 삶을 이렇다고 말하기 어렵듯이 바람을 이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게서 나온 바람이 내게로 불어오므로 나의 시를 바람의 노래라고 불러본다.


  

절망의 노래

 

시는 자유로운 언어로 재창조된 세계이다. 처음 내가 시와 인연을 맺었을 때 시가 삶에 기대거나 삶이 시에 기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을 배제한 시는 영혼 없는 육신이라고 생각했다. 시에 어떠한 영혼이 깃들었느냐에 따라 시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시는 삶에서 발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처음 내가 삶을 노래했을 때는 긴장감 없는 말을 풀어놓았고, 은유 없는 정황을 그리기 일쑤였다. 그러한 시들은 나의 삶을 일상적인 언어로 드러냈지만 시적 창조가 없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를 자유롭게 풀어놓지 못했던 탓이었다. 옥타비오 파스가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고 했던가. 나는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하지 못했으므로 나에게서 흘러나온 노래가 누군가에게로 가닿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절박하게 시적 언어를 찾아 헤맸지만 순환하지 않는 세계에서 절망의 노래만 불렀다.

 

 

멀리, 제대로

 

절망의 노래가 끝나자 나의 껍데기만 남았다. 나의 껍데기를 정확히 들여다봤을 때 내 안에 있는 내가 서서히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대상(사물)의 본질을 보려고 애셨다. 대상의 본질은 어떠한 삶과 맞닿아 있으며 시적인 사유는 은유나 이미지로 드러났다. 삶을 이렇다고 말하기 어렵더라도 삶을 시적으로 비유하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숙명이 아니었던가. 나의 시들도 세상을 향해 날개를 펼치고 바람의 속도와 방향을 읽으며 훨훨 날아가려고 했다. 나는 시가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뒤바꿀 수 있다는 허상을 품지 않았지만 시가 되도록 멀리, 제대로 날아가길 희망했다.

 

 

매일 손에 잡히지 않는 삶처럼

 

나는 노래가 되지 못하는 노래들을 시라는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 나의 노래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 추구하지 않았다. 추악하고 불편한 것들이 진짜 아름다움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때 내 안으로, 내 바깥으로 감동이 찾아왔다. 한때 나는 아름답고 세련된 이미지,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시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설익은 시심에서 나온 착각이 나를 지배했을 때 내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그 시절 나도 모르는 바람이 시의 공간을 어지럽혔다. 그런데 바람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을 때 그 바람이 가지는 힘을 똑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바람의 실체가 보이지 않지만 먼지를 일으킬 때나 나무를 흔들 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매일 손에 잡히지 않는 삶처럼 바람은 내 안팎에서 정처 없이 순환하므로, 영영 완성될 수 없으므로 나는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고 외치며 계속 바람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약력: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오페라 미용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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