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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집중조명/신철규/마음의 공명과 유랑의 운명 -윤석정 시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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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신철규
마음의 공명과 유랑의 운명 -윤석정 시인론
시인은 고정된 현실을 거부한다. 현실을 고정시키는 지배 질서는 우리에게 가시적인 하나의 현실만을 강요한다. 시는 일상적인 감각의 분배 체계를 교란시키고 재배열함으로써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자크 랑시에르)을 쇄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시적 인식은 기존의 질서 체계에 포섭되지 않는 사유를 실천함으로써 시는 ‘실패의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는 시인과 다른 죽을 자들(인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세계의 심연을 먼저 보고 거기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그래서 가장 멀리 나아가는 ‘모험’에서 찾았다. 시인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익숙한 사물과 언어를 넘어서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그것은 어떤 정신의 모험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만든 작품마저 부정하고 다시 텅 빈 벌판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죽은 언어들에 숨결을 불어넣고 그것을 다시 불 속에 집어던진다. 이것이 바로 시/시인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윤석정은 이러한 운명이 시작詩作의 기원임을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는 시인이다.
나는 나를 떠도는 섬
시가 된 나는 떠돌이 섬
죽음이 언어를 낳는 섬
혹은 언어가 죽음을 낳는 섬
나는 시가 된 섬
나는 떠도는 영혼의 섬
태어난 적이 없는 언어를 찾아 떠도는 섬
―「봉도(蓬島)」 제2연
시인은 신선이 살고 있는 봉래산이 있는 섬인 ‘봉도’를 끌어와 ‘떠돌이 섬’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다를 수 없는 곳이며 그 다다를 수 없음이 우리의 상상력을 배가시킨다. 이 시에서 봉도는 단순히 동양적 이상향을 대표하는 기표를 넘어 그 비현실성으로 인해 일상적 세계의 균열을 현시하는 ‘시’의 다른 기표가 된다. 그 섬은 ‘나’를 찾아 떠나지만 ‘나’에게 도달할 수 없으며 시가 되어서도 유랑을 멈추지 않는다. ‘봉도’는 나의 죽음을 통해 획득한 언어이면서 동시에 언어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나이면서 나 아닌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태어난 적이 없는 언어”를 찾아야 하는 운명에 있기 때문에 한 곳에 고정될 수 없으며 영원히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다.
위의 시에서 시인의 언어에 대한 불신이나 회의만을 읽어내서는 안 된다. 시인은 ‘나’를 통해 ‘나’를 부단히 넘어서려고 함으로써 그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는 “손에 잡히면 금방 증발되거나 흐느적거리며 내려앉는 형상”이 되고 마는 ‘물렁물렁한 착상’ 때문에 고민한다(「물렁물렁한 물고기」). 시인에게 대상은 “이데올로기 없이 유영하는 물고기”와 같으며 상상의 과도한 개입이나 성급한 일반화는 대상을 하나의 ‘주검’으로 만들어버린다. 하나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비가시성, 주관성과 기억이라는 어떤 ‘눈멂’이 끊임없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재현은 결국 현전과 부재의 교차에 의해 성립될 수밖에 없다.
윤석정은 대상의 재현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을 ‘마음의 공명’이라고 본다. 대상을 자신의 내면에 받아들이는 오랜 시간과 내적 고통을 거처야만 마음의 공명에 이를 수 있다. 즉, ‘그리운 것들’이 가시가 되어 마음에 걸려 마음을 온통 헤집을 때 시는 탄생하는 것이다. 그는 단단한 가시가 된 마음의 상처들을 보듬어 안기 위해 더 물렁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물고기의 뼈는 가시라는 것
구운 생선을 발라 먹는데
가시 하나가 목에 걸려 꺼끌꺼끌할 때
문득 알게 된 것
그리운 것들도 가시라는 것
자꾸 마음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것
빼내려 하면 할수록 더 아픈 것
마음의 뼈는 그리운 것
―「단단해지는 법」 부분
이 시는 구운 생선을 발라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린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사유가 전개된다. 그는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자신의 마음에 단단히 박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그리운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빼내려 하면 할수록 마음에 상처를 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단단한 가시를 빼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더 물렁해지려고 한다. 그의 물렁함은 허술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물렁함은 대상과의 공명을 통해 그것을 자신의 내면으로 흡수하는 작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상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젖어 있으며(「구름공장공원」) 그의 시의 말들은 다 ‘녹녹하다’(시집 「자서」).
이 ‘물렁함’은 대상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수동성뿐만 이질적인 대상들에게 다가가는 능동성 또한 가지고 있다. 그의 이러한 능동성은 한편으로는 ‘음악’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에 닿아 있다. 우선,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자.
능선으로 몰려든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 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 처마에 모아 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오페라 미용실」 부분
이 시의 배경은 좁다란 골목과 가파른 계단이 있는 산동네의 조그만 미용실이며, 시인은 ‘그’의 시선으로 오페라 미용실의 가족사를 펼쳐낸다. 이 산동네는 구름이 지붕 위에 다리를 걸칠 만큼 높은 곳에 있으며 미용실은 그 동네의 지붕들 사이에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 미용실의 이름은 어울리지 않게 ‘오페라 미용실’이다. 서민들은 일생 동안 관람해볼 기회조차 가져본 적 없는 ‘오페라’가 그 이름인 것은 미용실과 그 주변에서 퍼져 나오는 여러 생활의 소리 때문이다(추측컨대, 이 미용실 문에는 오선지와 음표로 가득한 악보의 형상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미용실의 눈썹 처마에 얹혀 있는 나뭇잎들이 내는 정겨운 ‘옹알거리는 소리’는 가정의 불화로 인한 불길한 기운에 밀려난다. 근근이 버텨나가던 미용실은 ‘어머니’의 병이 깊어지면서 몰락하게 된다. 생활력이 없던 아버지마저 떠나버리고 어머니는 쇠락한 몸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미용실을 가득 채우던 평화롭던 음표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울음’이 대체한다. 동네 아이들은 무심하게도 이 ‘울음’을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생각하며 지나친다.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오페라 미용실」 부분
이 시는 나뭇잎이 풍성하던 봄에서 시작해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로 끝난다. ‘오페라 미용실’을 말없이 지켜주던 ‘할아범 측백나무’의 잎이 모조리 떨어지고 난 뒤 함박눈이 내린다. 이 눈은 어떤 음악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덮어 버린다. 이 음악이 사라진 자리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 나와 함박눈이 쏟아지는 광경을 ‘희희낙락’ 구경한다. 이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생활과 자연은 하나로 맞물려 모두 ‘음표’가 되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삶에 예속되어 방관자적인 태도를 유지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오페라 미용실’ 주변의 세상을 덮는 장면은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위로이며 일종의 축제가 되는데, 그제야 동네 사람들은 오페라의 관객이 되면서 동시에 하나의 음악으로 참여한다. 이경수는 윤석정의 첫 시집 오페라 미용실의 해설에서 그의 시를 ‘삶을 연주하는 감각의 오페라’로 규정했다. 그는 윤석정의 시 속에 나타난 일상적인 생활의 고난이 절망으로 귀결되지 않는 힘을 ‘감각’에서 찾아냈으며 그 감각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우리의 일상을 구제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오페라’가 가능하게 한 것은 비극적 일상을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이며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일 것이다. 윤석정 시의 언어는 ‘예리’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타인의 마음에 대한 배려가 깔려 있다(「날아가는 재봉틀」).
음악이 대상들 간의 경계를 지워 공감과 조화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어둠에 대한 탐색은 사물의 이면으로 들어가 경계를 확장하여 타자와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이다.
몸을 눈부시게 열고도 길에서 떠날 수 없는
반쪽짜리 생, 그 감은 한번 꽃피자 입을 쫙 벌리고
뿌리에 달라붙은 눅눅한 어둠까지 감아올렸다
어둠은 점점 바깥을 달콤하게 부풀리며
심장에 몰려와 단단하게 여물어 갔다
눈이 내리자
쭈글쭈글한 감들이 서둘러 햇볕을 쬐러 나왔다
더는 빨아들일 어둠이 없어서 바깥을 컴컴하게 만들기 시작했는데
끝내 어둠에 덮여 어둠 속에 들어간 늙은 감들이
떫디떫은 심장을 남겨 놓았다
다시 봄이 왔다 나는 어둠을 빨아들이기 위해
가지 끝으로 옮겨 앉았다
―「떫은 생」 부분
‘감’은 새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삶이 마감되는 것은 아니다. 달콤함과 단단함이라는 속성이 없는 감들은 자신의 훼손된 몸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려 있으면서 ‘어둠’에 녹아든다. 그 ‘어둠’은 공감과 조화가 가닿을 수 없는 지점이며 주관이 도달하지 못하는 타자성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제대로 익지 못해 맛이 들지 않은 ‘떫은 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가지 끝”으로 간다. 이 ‘가지 끝’으로의 나아감은 유랑의 삶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시인이 ‘유랑’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만을 강요하는 이기심과 사랑의 기억에 매달리는 인간의 집착이다.
바람의 귀퉁이조차 건드리지 못한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아련한, 아련하게 떠오르는
하, 나마저 여기에 묻을까
내 속에 봉분 하나
타지마할, 눈부시게 숨 막히는
―「아름다운 봉분」 부분
국경을 지나
인도의 다르질링으로 슬며시 들어갔던 그해
갠지스 강가에서 몸이라는 국경을 태워
국경이 없어진 사람들이 나의 유랑을 따라와
말없이 침대에 누웠다 나는 눅눅한 침대에 앉아
머리가 희끗희끗한 히말라야를 보는데
당신보다 먼저 내 잠 속으로 비가 스며들었다
잠 든 사이 내게서 다녀간 국경 너머의 벼락이
찌릿찌릿 내 손톱 언저리를 매만졌다
벼락처럼 당신이 히말라야로 총총히 사라졌다
유랑을 싣고 간 카카르비타라는 국경,
내 생의 중간 즈음이 될 성싶은 국경을 지나는 동안
내가 떠나왔거나 버리고 갔던 당신이라는 국경들이
내 마음으로 아스라이 스며들었다
―「아스라한 국경」 부분(≪문예연구≫2010년 여름호)
「아름다운 봉분」에서 시인은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사랑의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유랑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바깥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자신 안에 가두어버린 ‘인연’이 그를 유랑으로 이끈 것이다. 그가 인도의 타지마할에서 본 것은 ‘아름다운 봉분’에 묻힌 사랑이다. 그는 그것을 보고 자신이 묻지 못한 것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그는 단순히 타지마할에 얽힌 왕과 왕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인간의 애욕을 본다. 시간의 흐름에 언젠가는 아련하게 떠오르고 마는 사랑(인연)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떠나보낸 사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다시 한 번 내 안에 가두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지막 행인 “타지마할, 눈부시게 숨 막히는”이란 모순 형용은 ‘숨 막히도록 눈부신’이라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용적인 찬사를 넘어선다. ‘봉분’은 화자의 숨을 막히게 하는 유폐이면서 동시에 자신 안에 깃든 결여를 깨닫게 하는 반성의 계기가 됨으로써 ‘눈부심’에 이른다. 떠나보내야 하지만 떠나보낼 수 없는 화자의 뼈아픈 고뇌를 드러내기에 ‘타지마할’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다.
「아스라한 국경」에서 ‘몸이라는 국경’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는 인도의 장례 의식과 갠지스 강에서의 세례 의식은 시인에게 그가 떠나보낸 국경들이 내 속에 여전히 스며들어 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몸 속에 봉분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통증’이 하나의 신앙이 된, 그래서 통증으로 가득한 몸이 하나의 ‘봉분’이 되고 마는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심장」). 이러한 경계 허물기의 작업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어둠에 대한 탐색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허공에 매달린 마음, 그 공명이 내 마음의 뿌리를 여기저기로 뻗어나게 하”(「내 마음의 뿌리」)는 것이며, 이는 시인 스스로 자신의 언어에 대한 반성적 자각을 동반한 것이기에 진실성을 획득한다(「날아가는 재봉틀」).
마지막으로 윤석정의 신작 한 편을 읽고 글을 맺고자 한다.
비 그치고 안개가 이불처럼 펼쳐진 새벽
젖은 나무들이 게워낸 꽃 봉우리는
이역만리에서 달려온 저번 생들의 발바닥
이번 생을 살고자 저번 생이 딱 한 번
꽃신 신고 북쪽으로 행군할 채비를 했고
때마침 비는 나무의 발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겨우 목숨만 챙겨왔다
내 마음에서 사는 것들은 안개보다 더 희뿌옇고
죽음에 얼룩진 발바닥을 가졌다
발바닥을 디뎌야 일어날 수 있듯
나는 죽어야 살아나는 것들을 생각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갔던 개구리들이
개울가로 기어 나와 알을 낳고 밤낮으로 울었다
우는 소리를 엿듣다가 방문을 닫으면
냉장고가 방구석에 웅크린 채 쉴 새 없이 울었다
마음을 열어 제치고 다 내어준 서러운 목숨들
나는 내 마음에서 죽은 것들을 생각했다
―「순환하는 시―봄」 전문
시인은 비와 안개에 젖은 봄 나무들에 피어난 꽃봉오리에서 지난 생들이 거쳐 온 고행을 읽어낸다. 그 꽃봉오리들은 “이역만리에서 달려온” 것이기에 발바닥의 형상을 띠게 되며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도 그처럼 굳은 발바닥을 지닌 채 죽어 있는 것들을 떠올린다. “안개가 이불처럼 펼쳐진 새벽”처럼 시인의 내면도 불투명한 죽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은 신생의 봄을 앞에 두고 “죽어야 살아나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는 그것들을 차단하려 하지만 ‘마음’을 열어젖히고 “다 내어준 서러운 목숨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목숨”을 지탱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단순한 자기 방어로는 신생을 맞을 수 없으며 죽음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 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시인은 “내 마음에서 죽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 시에 나타난 죽음을 통한 신생이 구체적인 사물과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진실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 발현되어 정착한 신서정 계열의 시들이 이룩한 성과들 때문에 범속성의 차원을 벗어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순환 자체가 아니라 순환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주체의 내적 결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물론 윤석정의 시에 나타난 ‘순환’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탈주와 회귀의 지난한 변증법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죽음을 통한 신생의 과정을 보면서 자신의 내적 결여를 깨닫기는 하지만, 주체가 그 결여를 선험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초월적 자세를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의 시의 전반적인 이행은 마음의 뿌리가 퍼져나가면서 유랑을 떠나고 유랑을 떠난 곳에서 다시 마음의 공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타자에 대한 주체의 환대로 나아가면서 그의 서정에 깊이를 더해 울림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이행이 주관과 객체의 모순과 단절이 일시에 소거되면서 화해로 마무리되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그가 유랑에서 발견한 것들이 떠오르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아스라하다’ ‘어렴풋하다’ ‘희미하다’ 등의 정체가 모호하면서도 막연한 상태를 기술하는 술어들을 동반할 때 이러한 인상이 더 짙어진다). 나는 오히려 ‘무덤 속에 갇혀 있는 언어들’(「날아가는 재봉틀」)이 날뛰는 흥겨운 광경을, 마음을 헤집는 ‘마음의 가시’들이 무른 살을 찢고 나와 그 어두운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 그의 시의 외연을 넓히면서 ‘말’의 깊이를 더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윤석정 시인이 다시 한 번 더 멀리, 더 깊이 유랑에 몸을 던지기를 희망한다.
**약력: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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