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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신작시/임경섭/검은 연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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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임경섭
검은 연기
프리모 레비는 카스텔로 광장에 서 있었다
광장 둘레로 전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한 번 들어온 전차는 도무지 그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지만
레비가 서 있는 동안 전차는 벌써 여러 번
광장 언저리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프리모 레비는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목격되고 있지 않은 것은 모두 사라진다
레비의 입장에서 전차는 사라졌지만
전차의 입장에선 자신이 사라졌다
광장 바닥에 빽빽이 들어찬
사괴석과 사괴석의 구분들은
광장을 떠나는 순간 사라질 것이었다
광장 정면에 버티고 선 마다마 궁전은
궁전을 서성이는 몇 명의 관광객들은
관광객들이 들고 있는 사진기들은
사진기 속 필름에 기록된 이미지들은
이미지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뒤돌아서는 순간 모조리 사라지고 말 것
프리모 레비는 오후의 광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카스텔로 광장에서 학교까지는 두 블록 거리였고
레비는 학교를 향해 서 있었다
화학실 창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학교는 보이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비누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의 고향에선 볼 수 없었던 대리석 문양의 비누였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바라보며 그곳의 짙푸른 해안선을 한참이고 떠올렸다 그곳은 시간을 두고 촘촘히 흘러내린 비누의 마블링 같은 섬들로 가득했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의 해안선을 떠올리며 여행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에 대해 생각했다 비누 하나 다 닳을 때까지 여행을 기억할 수 있다면 자신은 충분히 여행가가 될 자격이 있다고 나카타는 생각했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여행가가 될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신혼여행 말고는 변변한 여행 한 번 해 본 적 없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고민했다 한 번도 홀로 떠난 적 없었으므로 자신의 꿈이 아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을 거라고 나카타는 걱정했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아내 없이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해 고민하며 욕실 나무 선반 위의 비누를 바라보았다 비누는 몸집이 부쩍 작아져 있었지만 아내는 살아 있는 한 닳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나카타는 안도했다
그리하여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닳아 없어지지 않을 아내를 생각하며 아내만큼 소중한 크로아티아 비누를 매만졌다 아낄수록 비누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약력:2008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죄책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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