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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연재산문/이경림/50일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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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10회 작성일 16-09-0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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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산문

이경림

 

 

 

 

상처

 


오션사이드에서 돌아와 사흘, 몸이 손가락하나 까딱하기 싫은 이상한 無氣力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a는 안색이 좋지 않다며 아무래도 병원에 가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며 출근했다. 블라인드가 닫힌 컴컴한 방에 누워 있으니 유리 밖에서 따갑게 쏟아지는 빛줄기를 가로 지르는 온갖 소리들이 들린다.

‘새가 우는 것은 어느 한 마리의 새소리일 뿐 아니라 그 새가 속하는 종이 시간을 뛰어넘어 내는 영원한 소리이다 ’ 라고 한 보르헤스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의 소리,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 이따금 개짓는 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그 사이 사이 알 수 없는 소음들까지 끼어들어 낮은 그야말로 온갖 소리들의 연주회장이 되곤 한다. 저마다 지금 이 시간을 뛰어넘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시간이다...... 이틀 전의 그 바닷가, 이해할 수 없던 그 검은 안개, 검은 파도, 그 속에서 기적처럼 번쩍 얼굴을 내밀던 칼날 같은 햇빛, 그리고 모래 구덩이의 사랑...... 그 모두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시간의 장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 마리엔의 입에서 불쑥 뛰쳐나온 그녀의 지난날도, 그 끝에 실수처럼 뱉어진 지네 같은 내 유년 흉터도 한낱 시간의 장난질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애를 혹은 그녀를 짓밟고 간  그 이상하고 흉측스런 일들은 과연 있었던 일이긴 한 것일까? 그 날 이후 이름을 바꿔가며 그 애, 혹은 그녀에게 찾아온 온갖 병들, 일테면 공황장애 폐결핵 늑막염 폐농양.....원인을 알 수 없는 온갖 병들은 그 아홉 살 계집아이와, 열아홉의 소녀와, 혹은 이십대의 아이 엄마와 무슨 관계일까?

확실한 것은 그 날의 아홉 살 계집아이 이면서 동시에 그 애가 아니었던 온갖 그녀들과 사월 초파일, 불공을 드리러 절에 갔던 그날의 젊은 엄마, 그날의 젊은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짜 벽난로 속에서 가짜 장작불이 빨갛게 그러나 싸느랗게 타고 있다. 그 위에 아마도 a가 어느 여행지에서 샀음직한 남녀의 인디언 인형이 짐승가죽을 찢어 만든 치마를 입고 창을 들고 서 있다. 그들의 옆에는 엄청나게 큰 솔방울 두 개가 함께 놓여 있다, 그 모두 a가 건너온 시간의 파편들이리리라. 벽 걸린 거울 속에서 핏기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거울 밖을 보고 있는 저 노파 속 어디에 그 계집아이가 있는가?. 축 처진 볼, 툭 불거진 눈시울, 초점 없는 눈동자......표정이 거세된 듯한 노파는 마치 수 십 년 전 흑백사진 속 인물같다. 아니 오래된 식탁이나 소파, 혹은 침대, 주전자, 식기, 컴퓨터, 뭐 그런 사물같기도 하다.
 

그녀의 어디에도 ‘서양인형’이란 별명을 가졌던 호동그랗고 총명한 눈을 가졌던 그 계집아이의 흔적은 없다. 짓뭉개진 산나리 꽃들의 발치에 피 묻은 속옷을 밀어 넣고 겁에 질려 울던 그 만신창이 아홉 살 계집애도 없다.
 예순이 훨씬 넘어서야 그녀는, 일테면, 속에서 이글거리던 분노와 슬픔이 조금씩 희석되고 그날의 사건을 보다 냉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그녀는, 그날 자신에게 닥친 그 사나운 일이 우연히 찾아온 불운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정교하게 짜여진 생의 그물이 만들어 가는 하나의 시퀀스의 시작에 불과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테면 그 사건은 젊은 시절 할아버지의 치기어린 사랑놀이에서 시작된 듯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니 어쩜 그 보다 수세기 전에 시작된 인과의 사슬에서 귀결된 어쩔 수 없는 결과 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녀가 기억하는 존재들의 그물망 안에서는 적어도 할아버지의 소실댁과, 그녀가 데려온 아들인 그, 그리고 할아버지의 장자인 아버지가 애증이 범벅이 되어 벌인 어떤 사나운 필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 그는 고등학교 이학년 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려서 잘 몰랐지만 小室이 데리고 온 자식이라고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보는 할머니와 식구들의 눈길을 피해 그는 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쩌다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면 섬뜩할 정도로 그는 늘 적의에 차 있었다. 식구들은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다가도 그가 나타나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날은 사월 초파일이었다. 엄마와 할머니는 봉암사로 불공드리러 가고 아이는 금방 온다는 사촌언니를 기다리며 텅 빈 집 툇마루에서 혼자 반두께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때 그가 들어왔다.

  -여기서 혼자 뭐 하노?
  -반두께.....
  -심심하지?
  -응......아니?
  -요 뒷산에 산나리 꽃이 마이 핐더라,.....같이 가 보까?’
  -응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지척에 있었다. 이따금 고사리니 삽추싹 두릅 등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는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머루니 다래 혹은 산딸기 같은 것을 따먹기도 하던.
그는 성큼성큼 앞서 걸으며 얼크러진 칡덩굴들을 밀치고 길을 만들어 주었다.

  -니 이 칡넝쿨의 뿌리가 얼마나 긴지 아나? 한도 없다 마.
  -뱀보다 더 기나?
  -그렇게 긴 뱀은 지옥에나 있을 기다 마 

계집아이는 문득 무서워 졌다. 질기고 억센 뱀들이 시푸른 잎사귀를 달고 산을 칭칭 감고 있었다. 아이는 문득 눈물이 났다.

 - 니 와 우노?
  - 무서워서
  - 뭐가?
  - 칡넝쿨이
  -지지바 니 참 벨나다. 무섭으먼 내 손 잡아라

그녀는 훌쩍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조금 올라가니 그의 말대로 산나리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기슭이 있었다.

  - 봐라 진짜 마이 핐다 아이가? 내는 거짓말 안한다.

그는 산나리 꽃 한 송이를 따 주며

  -냄새는 벨로다. 내는 이 꽃 안 좋아한다

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와?
  - 주근깨투성이 꽃이 뭐가 좋노? 냄새도 나쁘고 색깔도 맘에 안 든다. 마 우쨌든 내는 싫타
  - 그가 내 곁에 앉으며 산나리 꽃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 때 불쑥 아이가 물었다

  -작은 할매는 어데 갔노? 아제 엄마 말이다.
  -모르겠다
  -사람들이 그라는데 작은 할매는 아제를 우리 집에 버리고 도망갔다 카더라.
그 때 그의 얼굴에 언듯 분노 같은 것이 스쳐가는 것을 아이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의 운명은 자꾸 그의 이글거리는 분노를 건드리고 있었다.

  -작은 할매는 왜 첩이 됐는지 모르겠다 마, 맘도 착한데.
  -.......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서 삼촌은 울아부지한테 와 덤벼 들었노? 그라이까 맞제.
  -이 지지바가?
  -아제가 공부도 안하고 만날 돌아다닌다는 건 다 맞는 말 아이가? 그란데 삼촌이 아부지한테 자꾸 말대꾸하고 그라이까 귀때기를 맞제. 내는 삼촌이 나뿌다고 본다.
그 때 였다. 그가 벌떡 일어서서 그 아이의 팔을 질질 끌고 산나리 밭으로 들어간 것은.
그리고......그는 한 상상도 할 수 없이 사나운 한 마리 짐승이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사냥감을 발기발기 찢어 먹고는 바람처럼 산을 내려갔다.
기명색 나리꽃들 사이로 햇빛이 눈을 찔렀다. 짓밟히고 짓이겨진 산나리들이 아이와 함께 늘비하니 누워 있었다. 세상이 뿌옇게 지워지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뭔가 부스럭거렸다.
‘다람쥐, 아니 토끼인지도 몰라.’  아득히 그런 생각이 났다.
   -뻐꾹 뻑, 뻐꾹
뻐꾸기 한 쌍이 울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방금 지나간 것은 꿈일지도 몰라.’ 
아이는 여기 저기 긁히고 찢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산나리 꽃들의 주근깨가 눈물에 번져 어룽거렸다. 확실한 것은 한 무서운 짐승이 아주 불쾌한 고통과 함께 딱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던져주고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삼촌’이라 부르던 그 사나운 짐승에 대한 의문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는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그럼 귀신일까? 괴물일까?
그러니까 매일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쓰고 눈을 보여주지 않았을 지도 몰라. 그런데 그 사나운 짐승은 왜 우리 집에 살게 되었을까? 
 산더미 같은 의문과 딱히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쓰러진 산나리 꽃들이 낄낄대며 일어나고 있었다. 아이는 한 쪽 종아리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속옷을 벗어 찢어지고 피 흐르는 상처들을 닦았다 그리고 피투성이 속옷을 산나리들의 발치에 던졌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산 아래 냇가로 갔다.

 곰바위, 여우바위, 의자바위..... 계집아이들이 소곱놀이하며 붙여준 이름들을 몰래 품고 바위들은 모두 제 자리에 있었다. 아이는 공룡의 발자국이 새겨진 한 넓적한 바위에 앉아 나뭇가지에 긁혀 상처난 종아리며 팔 그리고 넓적다리를 씻었다. 상처 자리가 쓰리고 아팠다.
  - 아무에게도 말하면 죽어!
그가 날듯이 산을 내려가며 한 말이 생각났다.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기도 했다. 자꾸 할매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다.

    -더러운 여자들은 살 가치가 없다-
아이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아이는 점점 말이 없어졌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엄마는 여전히 부엌에서 열 명이 넘는 식구들의 끼니를 준비하느라 땀을 뚝뚝 흘렸고 할매는 밤마다 들마루에서 동네 할매들에 둘러싸여 숙영낭자전을 읽고 별들은 쏟아질듯 고요했다. 이따금 건너편 옥녀봉 중턱을 가로지르며 휘이익 호랑이 불이 지나가기도 했다.
다만 그 날 이후 어디론가 사라진 그에 대해서 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터헝가 거리가 형형색색의 점멸등으로 반짝거린다. 창틀, 나무들의 밑둥, 베란다의 난간들, 지붕의 아우트라인들이 집중 조명되고 있다. 심지어 길가 전봇대 옆에 옹기종기 피어있는 몇 송이 앉은뱅이 꽃들에 까지 아우트라인에 동그랗게 조명등이 애워싸고 있다. 그들은 일 년에 한 번 쯤은 인간의 거리 한 구석에서 소품으로 잊혀있는 존재들을 돋을새김 해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봐라, 쓰레기 통 옆을 나직이 지나가는 이 앙증맞은 앉은뱅이 꽃들을! 아무도 몰래 하늘을 업고 있는 저 지붕들의 아우트라인을! 하고
 옷가게에는 멋지고 센서불한 옷들이 중저가의 텍을 달고 손님을 유혹한다. 중세풍의 도자기 가게, 선물센터, 악세서리 가게들이 현란하게 번쩍이고 있다. 그 사이로 까페 몇이 노란 혹은 핑크 빛 실내등을 켜고 고즈넉하다, 그 옆에 스시집, 파스타 집, 그리고 길모퉁이에 있는 타코 가게까지, 그냥 ‘상점’이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성장을 하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저마다 부여받은 시간들을 꺼내들고 자신을 건너고 있는 존재들이 눈부시다. 문득.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안에서 살아간다’ 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안에서...... 중얼거리며 걷는데 손에 들고 있던 셀폰이 부르르 몸을 떤다. 친구 경이다.
  - ‘27일 우리학교 미주 동창회가 다운타운에서 있는데 너도 갈 수 있지?’
대답을 하려는데 전화기 저 쪽에서 연신 ‘ 왓? ’ ‘오케이’ ‘ 노 프라불럼’
하는 고객 접대용 멘트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아, 미안해, 손님이야, 이제 됐어
하고 나의 답을 기다린다.
  -글쎄......
하고 망설이는데  
  - 글쎄는 무슨 글쎄야, 너 왔다고 센프란시스코에 사는 영분이도 온다더라. 너 그날 어디 가지 않지?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됐어 여섯시 쯤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나 지금 바빠서 끊는다. 다시 전화하자.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그녀는 왔다 간다. 늘 그랬다. 모든 것이.
 
 돌아오는 길, 람프 에비뉴를 지나는데 ‘선인장들의 정원’이 있는 모퉁이 집에서 머리가 훌렁 벗어지고 맘씨 좋아 보이는 중년 남자가 새로 들여온 선인장을 심고 있다.  외줄로 길게 뻗은 선인장들이 나란히 누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모종삽이라기에는 큰 삽으로 흙은 퍼 내는 그를 보다가 내가
   -what,s name of it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고개를 들고
  - a kind of Ferocactus. it's Christmas commemoration planting
  (왕가시 선인장의 일종이죠. 크리스마스 기념식수예요)
하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 It' has fancy spiny.
하며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화려한 가시?’ 생각하다가 나도 웃는다.
여기 저기 크리스마스의 설레임이 두근거리고 있다. 집으로 가는 어빈 에비뉴 쪽으로 코너를 도는데 누가 감아놓았는지 a의 집을 에워싸고 있는 일곱 그루 팜츄리의 밑둥들이 눈부시게 번쩍거린다. 문득, 저 꼬마 점멸등들의 열기가 나무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불현, 수 십 년 전의 그 악몽이 떠오른다. 살갗이 칼로 베듯 아프다. 건너편 붉은 돔형의 지붕을 가진 집에서 가만히 크리스마스 케럴이 흘러나온다.

 

*


  -엄마, 오늘 크리스마스 이븐데 칠면조 고기 사 올까? 오늘 나 오전 근무야.
  a가 현관 신발장 안에 걸린 차의 콘트롤 키를 내리며 묻는다.
  - 너희들이 좋아하면.....
  -엄만 싫어?
  - 아니 나도 좋아.
  - 그럼 사 온다? 그리고 뭐 살까? 아니 이따 와서 엄마랑 같이 갈까?
  아뭏튼 일찍 올게요.
소리치며 계단을 내려간다. 티모티도 데니얼도 아직 꿈나라다. 문 밖을 지나는 발소리들이 평소보다 활기차고 뭔가 명절 전 날의 들뜬 분위기가 전해진다. 블라인드를 젖히니 눈이 부시게 새파란 하늘이 유리에 꽉 찬다. 12월의 햇빛이 눈을 찌른다. 오늘 낮 기온은 화씨 60도라고. 

 

*


크리스마스 이브의 거리가 마트가 백화점이, 아니 모든 집들, 나무들 이름없는 풀들이 온통 불야성이다.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티모티는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고 데니얼은 절친 루이스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를 받고 잔뜩 멋을 부리고 나갔다.
 a는 모처럼 여유있고 즐거운 표정으로 마트를 어슬렁거리며 카트에 이것, 저것 먹을 것을 담는다. 조리된 칠면조 한 마리, 연어회, 호두와 아몬드 체리가 범벅이 된 크고 둥그런 호박파이, 그리고 망고....... 아보카도....... 한국산 배...... 세일 중인 요구르트 한 박스......
카트 가득 크리스마스의 두근거림이 담긴다.
  - 여기도 한국배추가 들어왔네. 미국 마트에는 한국배추가 없었는데...... 한국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겠지? 엄마, 보쌈김치 담글 줄 알죠? 엄마계실 때 보쌈김치 한 번 담궈 볼까?
  -그러지 뭐

기다렸다는 듯 내가 배추 두포기를 카트에 담으며 대답한다.
  - 사과 당근, 대추, 밤, 배, 무, 잣, 미나리, 문어, 그리고 생선은 뭘 넣을까?
  -아까 산 연어회 넣어도 될 거야.
  -그럼 됐네, 근데 엄마, 이거 사면서 보니 우리 조상들 말야 어떻게 하면 아녀자들을 골탕 먹일까 연구하던 사람들 같지 않아? 이렇게 복잡하고 디테일한 음식은 세계 나라에도 드문 것 같아.
  -그런 면이 있지, 그렇지만 다른 나라 음식도 나름 복잡하지 않나?
  -미국은 전통 음식이랄 게 없는 것 같아. 쏘스가 다양해서 그저 고기를 굽거나 튀기거나 해서 다양한 소스를 뿌려 먹는 거지 별 요리법이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리고 햄버거, 소시지, 뭐 그런......인스턴트 식품들, 어떻게 보면 여러 면에서 덜 진화된 사람들 같기도?
그는 후후 웃으며 주위를 살피는 흉내를 낸다. 우리는 공연히 옷가게들을 기웃거리다 돌아온다

*

현관문을 여니 갇혀 있던 공기들이 후끈 몰려나오며 이상한 열기와 냄새를 뿜어낸다.
  -이상하지? 엄마,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집들은 각각 독특한 열기와 냄새를 생산해 내는 것 같아. 특히 동양인과 서양인이 거주하는 집은 냄새가 많이 달라,
음식이 달라 그런 건가?
  -그렇겠지.
  - 근데 엄마, 나는 가끔, 생각에도 냄새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사온 재료들을 식탁 위에 꺼내 놓으며 재미있다는 내가 듯 묻는다.
  -몰라, 아뭏튼......아이 아빠가 한창 말썽을 피울 무렵, 어느 날 문득 그의 냄새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어. 그 무렵 그가 귀가해 가라지에 차를 넣는 소리가 들리고 뒷문을 여는 순간 울컥 그 쪽에서 역겨운 냄새가 몰려오곤 했거든? 마치 입덧하는 사람처럼.
  -예민해서 그런 거지.
  -그런데 그 후 우리 회사에서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어. 일테면 어느 날 부턴가 그 사람의 냄새가 달라지는......그리고 얼마 후 그 사람이 우리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생각을 몰래 진행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하하, 너 혹시 냄새로 신 내림 받은 거 아니야?    
  -엄마는?
우리는 배춧잎 하나하나를 따서 소금을 뿌리고 사과 배 대추 등, 속이 될 재료들을 씻고 썰고 버무렸다. 밤 열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 둘의 조촐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성찬은 차려졌다. 그녀는 맥시코에 출장 갔을 때 사왔다는 와인의 마개를 따고 커다란 와인 잔에 따르며 말했다
  - 엄마, 우리 오래 오래 같이 살자. 말썽쟁이 딸도 쭈글쭈글 늙어 가면 이혼할 일도 없을 거고. 그럼 울 엄마 행복할 일만 남았네? 그런 의미에서 부라보!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잔이 투명한 종소리를 내며 오래 운다.

 

*

자정이 가깝자 여기저기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에서 가든파티를 하는지 음악소리가 들리고 웅성거리고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a 의 전화기가 부르르 몸을 떤다. 
  -데니? 루이스 집이야? 응 그래, 1시 쯤 데리러 갈게.
파티에 간 데니의 전화다.

그녀는 다운 받아놓고 못 본 영화 한 편을 보고 데니를 데리러 가야겠다며 티비 리모컨을 누른다. 
 -제레미 아이언스 나오는 데미지 어때? 
 -멋진 아저씨였지.

식탁 위에는 육 등분으로 잘린 호박 파이와 연어회, 그리고 씨만 남은 망고가 냄새를 풍기며 자신들의 마지막 시간을 건너고 있고 화면 속에는 며느리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희긋희끗한 머리카락이 지나간다.
  -이남자 매력 있지? 엄마.
  -너도 저런 남자 하나 만나서 연애나 해라.
  -나는 됐어요  엄마나 한번 쯤 어때?
  -나도 됐어요. 따님, 어서 데니 도련님이나 모셔 옵시다.
우리는 낄낄대며 가라지로 내려갔다.

루이스의 집 넓은 정원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저마다 감춰두었던 각양각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과 정장차림의 남자들이 두셋씩 모여 와인 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루이스와 데미는 구석에서 남은 폭죽을 피융 피융 쏘아올리고 캄캄한 하늘에 휘황하게 터지는 불꽃들을 향해 휫휫 휘파람을 분다. 모두 손뼉을 치며 웃는다. 웃음이 팝콘처럼 터진다. 검은 하늘 에 크리스마스이브가 섬광처럼 지나가고 있다.

 

 

 

 

* 동창회

 

 

jj 그랜드 호텔은 한인 타운 중심에 있었다. 주인이 한인이라 LA지역 한인들의 각종 모임장소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현관을 들어서자 **고등학교 45회 동창회 ** 여고 35회 동창회 대구 ** 여고 동창회 등 각종 동창회의 안내판이 즐비하다 방마다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우리는 2층 복도 맨 끝의 예약된 방으로 들어간다. 켈리포니아에 사는 친구들 20명이 모이기로 했다고 경이에게서 들었는데 방안은 그들의 남편들까지 배는 될 것 같았다.   
우리가 자리를 찾아 막 앉으려 할 때 머리카락이 명주실 같은 노파가 다가와 나의 손을 덥썩 잡는다. 내가
  -누구?
하고 어색해 하자 그녀는
  -나 인서야, 고 3때 너랑 짝이었잖아.
한다.
  -어머.....인서? 그 E대 갔던?
  -그래 나야
  -네가 왔다 해서 맘먹고 왔다. 그래, 지금 어디에 묵고 있어?
  -응 이 근처야 스튜디오 씨티.
  -그래? 나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약국하고 있어.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약대에 진학했던 생각이 났다. 여기저기서 내 쪽을 향해 나 **야’ 하며 손짓을 한다. 남편들 중에는 외국인도 다섯이나 있다.
아아, 이 노파들이 반세기 전에 눈이 초롱초롱하던 그 단발머리 소녀들이란 말인가?
경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인서는 약국을 세 개나 가지고 있는 알부자야
하고 귀뜸해 준다. 그 때, 늦어서 미안하다며 다운타운에서 내과 병원을 한다는 예숙이 부부가 들어온다. 
  -자 이제 거의 다 오신 것 같네
회장인 소봉이 개회사를 하자 모임은 본격적으로 무르익어 간다.
건너편에 앉았던 영애가 남편 존과 함께 다가와 인사를 한다. 그들은 이십년 전 a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오랜지 카운티 시의 풀러톤이라는 마을에서 딸과 이웃에 살았다.
  -너희 애들은 이제 다 컸겠네
  -그럼 고등학생들이야.
  -그래, 살다보면 고생도 끝이 있더라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남편들 중 반 이상이 우리가 다녔던 C여고의 이웃에 있던 K고등학교나 C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야, 너 저 사람 생각나니? 왜 A극장 사장 아들.....영애랑 연애한다고 소문났던.....제들 결혼해서 정말 잘 살아. 남편 S 공대 건축과 나와 여기 센디에고 대학에 유학하고 건축사업을 했는데 우리 동창 중 제일 잘 살지. 산타 모니카에 있는 그 애의 집은 완전 케슬이야.
  -모두 얌전한 것 같았는데 할 짓은 다 했구나
나의 농담에 모두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아마도 수 십 번 되풀이 되었을 이민 초기의 무용담이 시작되고 늙은 계집아이들의 수다는 끝날 줄 몰랐다. 밤 열시가 다 되어서야 모임은 끝났다. 우리는 긴 여행에서 방금 돌아온 사람 같은 기분 좋은 피로에 싸여 검정색의 두꺼운 유리문을 밀고 나온다.
 가죽혁대 처럼 길고 질긴 끈들이 수세기의 자신들을 돌아 나와 캄캄한 길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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