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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특집I/내가 기억하는 시 한 편/백우선/'알맹이' 를 잊은 적은 없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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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I
내가 기억하는 시 한 편
백우선
'알맹이'를 잊은 적은 없으나
ㅡ신동엽,「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껍데기는 가라」(『52인 시집』,1967년)
신동엽(1930.8.18-1969.4.7)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에 깃든 정신은 내가 철든 이후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늘 영향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의 ‘알맹이 정신’은 역사적인 큰일에 대한 대처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반적인 바른 삶의 기준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껍데기가 생태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껍데기가 있어야 알맹이가 영글 수 있기 때문이다. 껍데기는 알맹이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러한 과학적인 사실을 떠나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논리에 따라 알맹이와 껍데기를 설정해 놓았다. 알맹이는 진짜나 좋은 것이고, 껍데기는 가짜나 나쁜 것으로 특정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읽으면 바로 가슴에 와 닿고, 그런 만큼 힘이 있다. 단호하고 강력하게 독자를 사로잡는 호소력이 있다. 동일 시행의 반복에 따른 점층 효과도 절실성을 증폭시킨다.
제1연의 ‘사월’은 1960년 4‧19의거를 가리킨다.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화 의거다. 민주화 실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과 그 정신이 ‘알맹이’이다. ‘껍데기’는 그 ‘알맹이’들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이나 행태, 사고일 것이다. 본질과 진정을 옹호하고, 사이비를 배척하려는 시정신이 투철하게 반영돼 있다.(내 나이 일곱 살 때의 4‧19, 그 다음 해의 5․16은 일생을 그 둘의 연장선 위에서 살게 했다.)
제2연에서는 4‧19의거의 정신이 역사적으로 무엇에 접맥돼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1894년의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이라는 것이다. 동학혁명은 1894년 1월에 시작돼 11월 공주 곰나루와 인접한 우금티 전투에서 끝나게 된다. 우금티에서는 당시 두 차례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전라 ‧ 충청 농민군이 공주감영을 점령하기 위해 총 역량을 집중했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에 수천 명이 거의 전멸해 마지막 전투가 되고 말았다. 이들의 아우성이란 바로 동학혁명의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 등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 불의한 정치 권력자들의 폭력에서 백성을 구하는 것,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는 것 등은 지금도 우리가 잘 새겨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제3연에서는 세 번째로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면서 ‘알맹이 정신’ 실현의 일면을 보여준다. 신라의 불국사 석가탑(무영탑) 조성과 관련된 전설 속 백제의 신혼부부 아사달과 아사녀를 우리나라 남녀 대표로 삼아 혼례를 치르게 했다. 껍데기로 볼 수 있는 옷마저도 입지 않은 알몸, 알맹이만으로 순수하게 부끄럼을 빛내며 맞절을 하게 했다. 다음 연을 참고하면 두 남녀는 알맹이 정신의 소유 ․ 구현자로서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는 상징적인 주인공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중립’은 중립국이다. 이 시를 쓸 당시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된 세계 질서의 틀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립하기를 바라는 시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제4연에서도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며, 우리나라 전역의 비무장지대화 곧 평화지대화를 염원한다. 최근에 발생한 비무장지대 안에서의 북측 목함지뢰 도발로 인한 우리 젊은 군인의 희생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비무장지대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북의 군비 증강 경쟁은 더 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강대국 경쟁 구도의 영향과 무관할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고민까지 떠안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적으로는 전쟁 수준의 테러와 응징도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모든 나라가 군사비를 줄여서 복지비를 늘리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 하는 함의도 읽어 낼 수 있다.
‘껍데기는 가라’의 시정신은, 내 삶의 과정에서 만난 시국 사건에의 직접 참여 여부를 떠나 의식 속에서 언제나 작용하며, 항상 알맹이를 존중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을 크든 작든 기울이게 해왔다. 이 시에서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은 ‘사월’(4·19),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동학혁명), ‘아사달과 아사녀’, ‘중립’, ‘흙가슴’이며, 껍데기에 해당하는 것은 ‘모오든 쇠붙이’이다.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을 더 확장하면 3‧1운동, 5‧18민주항쟁, 6‧10항쟁, 남북 평화통일과 반전평화 지향 등일 것이다.
이 작품에 반영된 시정신은 우리 헌법 전문(前文)과도 상통한다.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 : 필자 생략)
그리고 이 시의 ‘알맹이 정신’을 좀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참고 자료로서 신동엽 시인의 ‘시인정신론’(1961년 2월 “자유문학” 6권 2호. 1969년 “시인” 8월호 재수록)을 발췌해 덧붙인다. 신동엽 시인이 중시한 원수 ‧ 귀수성세계는 알맹이 ‧ 알맹이에로의 귀환에 해당하고, 전경인(全耕人)은 시인 중에서도 ‘알맹이 시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잔잔한 해변을 원수성세계(原數性世界)라 부르자 하면, 파도가 일어 공중에 솟구치는 물방울의 세계는 차수성세계(次數性世界)가 된다 하고, 다시 물결이 숨자 제자리로 쏟아져 돌아오는 물방울의 운명은 귀수성세계(歸數性世界)이고.
땅에 누워있는 씨앗의 마음은 원수성 세계이다. 무성한 가지 끝마다 열린 잎의 세계는 차수성 세계이고 열매 여물어 땅에 쏟아져 돌아오는 씨앗의 마음은 귀수성 세계이다.
우리들은 백만 인을 주워 모아야 한 사람의 전경인적으로 세계를 표현하며 전경인적인 실천생활을 대지와 태양 아래서 버젓이 영위하는 전경인, 밭갈고 길쌈하고 아들 딸 낳고, 육체의 중량에 합당한 양(量)의 발언, 세계의 철인적 ‧ 시인적 ‧ 종합적 인식, 온건한 대지에의 향수적 귀의, 이러한 실천생활의 통일을 조화적으로 이루었던 완전한 의미에서의 전경인이 있었다면 그는 바로 귀수성세계 속의 인간, 아울러 원수성세계 속의 체험과 겹쳐지는 인간이었으리라.
문학은 문학전문가들끼리의 특수문화가 되어 버렸다. 백성과 그들과의 아무런 연분도 없어졌다. 그들은 그들대로 만백성의 살림마을인 대지를 이탈하여 마치 무리떼 지은 하루살이의 덩어리처럼 하늘 높이 달아나고 있다.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인 것이다. 시란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인 것이다. 하여 그것은 항시 보다 광범위한 정신의 집단과 호혜적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의 시가 논의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이야기해 놓은 그 시인의 인간정신도와 시인혼이 문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철학, 과학, 종교, 예술, 정치, 농사 등 현대에 와서 극분업화된 이러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인식을 전체적으로 한 몸에 구현한 하나의 생명이 있어, 그의 생명으로 털어 놓는 정신 어린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가히 우리 시대 최고의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란 인간의 원초적, 귀수성적(歸數性的) 바로 그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시는 궁극에 가서 종교가 될 것이라고. 철학, 종교, 시는 궁극에 가서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과학적 발견—자연과학의 성과, 인문과학의 성과, 우주탐험의 실천 등은 시인에게 다만 풍성한 자양으로 섭취될 것이다.
시인은 선지자여야 하며 우주지인이어야 하며 인류 발언의 선창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신동엽, ‘시인정신론’, 구중서 편 “신동엽-그의 삶과 문학”(온누리, 1983), 291-305쪽>
**약력: 1981년 《현대시학》 시 등단. 시집 『봄의 프로펠라』.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동시집 『지하철의 나비 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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