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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특집I/내가 기억하는 시 한 편/김경인/순교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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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I
내가 기억하는 시 한 편
김경인
순교하는 마음
ㅡ황인찬,「건축」
친척의 별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따금 슬픔이 찾아올 때는 숲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때의 일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기하학에 대해,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시는 지난 여름 그와 보낸 마지막 날로부터 시작된다
“이리 나와 봐, 벌집이 생겼어!”
그가 밖에서 외칠 때, 나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불 꺼진 거실에 한낮의 빛이 들이닥쳐서 여러 가지 무늬가 바닥에 일렁였고
“어쩌지? 떨어트려야 할까?”
그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벌집은 아직 작지만 벌집은 점점 자란다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날 것이다 그가 말했지만 큰일이 무엇인지는 그도 나도 모른다
한참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벌이 무섭지도 않은 걸까 그것들이 벌집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니고 육각형의 방은 조밀하게 붙어 있고 그의 목소리가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아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
“하지만 벌이 사라지면 인류가 멸종한댔어”
돌아온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쯤 여름이 끝났던 것 같다
여름의 계곡에 두 발을 담근 두 사람이 맨발로 산을 내려왔을 때,
늦은 오후에 죽어 가는 새의 체온을 높이려 애썼을 때,
창을 열어 두고 외출한 탓에 침대가 온통 젖어 어두운 거실의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었을 때,
혹은 여름날의 그 어느 때,
마음이 끝났던 것 같다
다만 나는 여름에 시작된 마음이 여름과 함께 끝났을 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도무지 알기가 어렵고
마음이 끝나고 나는 살아 있구나
숲길을 걸으면서 그가 결국 벌집을 깨트렸던 것을 떠올렸다 걸어갈수록 숲길은 더 어둡고
가끔 무슨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는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 때는 아름다운 겨울이고
나는 여전히 친척의 별장에 있다
잔뜩 쌓인 눈이 소리를 모두 흡수해서 아주 고요하다
세상에는 온통 텅 빈 벌집뿐이다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ㅡ황인찬, 「건축」
물이 왈칵 엎질러졌을 때 걱정했었어, 시집이 젖을까 봐. 그리고 문득 네 생각을 했지. 네가 지금보다 더 젊었던 때, 네가 특히 사랑하는 시집들을 조금의 낙서나 접은 흔적 없이 아주 새 것 그대로 고요하게 서가에 꽂아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었어. 내가 사랑하는 시집들은 매우 더러웠거든. 커피를 쏟거나 손때를 묻히거나, 마음에 드는 시를 접어놓았거나 하는 식으로.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든 책장에 꽂힌 시들에 나를 새겨놓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혹시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런데 그건 정말 사랑이었던 걸까?
마음, 이라는 말 참 좋지. 마음-하고 소리 내면, 찹쌀로 만든 말랑말랑한 떡의 감촉 같고, 홀 마크 카드에 그려진 어린 양의 곱슬곱슬한 머리털과도 같아. 어떤 마음- 언제부터인가 나는 마음은 저 멀리에 두고 온 것만 같은데,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문득 없는 마음이 갖고 싶어졌어.
그 여름에 ‘나’는 ‘그’와 벌집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어. 벌집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구조물로서의 마음이라니.( 나에게도 꿀이 흐르는 마음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나?) 육각형 모양으로 빼곡히 들어찬 방에 ‘그’와 ‘나’는 어떤 추억을 넣어 둔 것일까? 벌집이 자라나면 큰일이 일어난다고 했지만, 무엇이 큰일인지는 ‘그’도 ‘나’도 모른다고 말하지.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 마음 속에 찰랑찰랑하게 차오른 마음이 입 밖으로 왈칵 엎질러질까봐 두려워지는 순간이 있어.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큰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해서 ‘그’는 벌집을 깨트린 건 아닌지.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무화과 숲」)을 꾸는 시인이니까. 깨져버린 마음. 공들여 지은 건축물이 와르르 무너졌을 때. 숲길은 일순 어둑해지겠지. 숲은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의 탄생지니까.
벌집이 깨진 순간 영원한 여름은 끝나지. 사랑이 끝나고, 더불어 죄의식이 끝나고, 그러니까 단 한 번의 영원한 여름은 끝나도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 그것이 슬펐겠지.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슬픔이 찾아올 때는 숲길을 걷는 수밖에. 온통 소리가 사라진 순백의 겨울에 나는 친척의 별장에 와 있다고 해. 집이 아닌, 친척의 별장에 왜 ‘나’는 와 있지? 뜬금없게도, 시 속의 ‘나’는 내 집을 친척의 별장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나’는 내가 아닌 ‘나’의 피를 조금만 공유한 사람, 즉 친척이고 싶은 것 아닌지, 내 집이 아니라 영원히 친척의 별장에 머무르고 싶은 건 아닌지 하는 쓸모없는 생각 말이야.
독자인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너를 생각하곤 해. 너는 발자국이 나지 않은 눈길 같고, 너는 눈이 채 녹지 않은 숲 위에 환히 내려쬐는 겨울 햇살 같고.
왠지 너는 이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만 같아서. 누군가의 책을 처음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타자他者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일 것만 같아서.
나는 이런 마음을 가진 적이 없어서, 오늘만은 이런 마음에 순교하는 마음으로, 너에게.
**약력: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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