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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특집I/내가 기억하는 시 한 편/김중일/다시 맞는 '삼십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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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I
내가 기억하는 시 한 편
김중일
다시 맞는 '삼십세'에 대하여
ㅡ최승자, 「삼십세」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삼십세’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청춘의 국경처럼 생각 된다. 또한 ‘스무살’은 ‘청춘’을 비로소 발견하고 맞이하게 되는 시절이다. 스무살 때 나는 최승자의 시 「삼십세」를 처음 읽었다. 아직 어떻게 살아야할지 도무지 결정 하지 못했을 때였다. 내 나이 스물이던 그 해는 법정에 선 전두환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던 해였다. 또한 그 해는 강릉에 잠수함이 침투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해였다. 스물을 목전에 두었던 열아홉이었던 이전 해에는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으며, 또 그 전년도 가을에는 등교 시간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또래 무학여고 학생 7명을 포함한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열여덟, 열아홉 매년 대형 참사가 일어났고, 그 시절을 통과하자 나는 스물이 되어 있었다. 성인인 것도 성인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청춘인 것도 청춘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청춘은 상처의 리트머스종이와도 같다. 내 청춘을 물들일 변변한 상처가 없었으므로 청춘이 아니었고 어른도 아니었다. 이십대는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오고 있는 상처를 마중하는 시절이었다.
두툼한 열역학이론 전공서에 이마를 대고 강의 중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다가, 친구들과 어울려 구내식당에서 돈까스를 먹고 줄담배를 피우고 더러 낮술을 마시며 목적 없이 학생회관을 전전하다가 우연찮게 교내 문학동호회에 발 들이게 되었다. 특별히 다른 관심사도 없었기도 해서지만, 문학동호회에서 운영하는 독서토론에 나는 곧잘 참여했다. 부끄럽게도 당시 나로서는 거의 체험해보지 않은 생소한 ‘분야’였으므로 그 낯섦에 호응했던 것 같다. 읽어 가야할 책을 빌리려 도서관을 배회하다가, 정작 찾는 책이 아닌 최승자의 시집을 우연히 먼저 꺼내들게 되었다. 최승자를 비롯한 시인들의 이름이 생소할 때였다. 집어든 최승자의 첫시집 「이 시대의 사랑」을 아무 페이지나 펼치자 우연히도 처음 등장한 시가 「삼십세」였다. 당시 ‘삼십세’는 내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고 예측할 수 없는 먼 미래였다. 나는 ‘삼십세’라는 시절에는 지금보다는 더 풍성한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그 자리에서 시집 한권을 다 읽었다. 다 읽고 나니 가슴이 아리고 없는 자궁이 얼얼했다. 무엇보다 그날부터 ‘삼십세’를 향한 최승자의 저 유명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라는 구절이 내 뇌리에 깊이 각인 되었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시절로 가는 터널이 이십대라니, 이미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생의 의미를 좀처럼 찾지 못하던 스무살 보내고 있던 나로서는 당혹감이 꽤 컸다. 또 그만큼의 호기심도 생겼다. 내가 스물일 때 그 머나먼 서른에 대한 ‘아득한’ 불안과 호기심을 안겨준 시가 최승자의 「삼십세」다. 나는 좀 더 단단히 각오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결국에 나는 최승자의 표현대로 ‘루머’처럼 이십대를 살다가 겨우겨우 삼십세가 되었을 때, 첫번째 시집의 교정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 생의 놀랄만한 단 하나의 반전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시인이 되다니, 더구나 곧 시집을 내다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이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최승자,「삼십세」
2006년 나는 최승자의 시「삼십세」를 읽었던 스무살 때부터 그토록 상상하던 삼십세가 되었다. 독일월드컵과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열렸으나, 봉준호의 영화 『괴물』이 1,300만 관객을 넘겼으나, 내 나이 서른이던 그 해는 내게 뚜렷이 기억되는 어떤 일도 없었다. 다만, 시집으로 묶을 원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문득 엄습하는 절망감과 부끄러움을 대면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복도, 최승자의 시에서처럼 차라리 항복이 행복할 정도의 커다란 절망도 없었다. 얼결에 등단한지 오년이 지나고 있었고, 등단 이듬해 발병한 아버지의 병도 호전되고 있었고, 생에 처음 겪은 실연도 이미 두 해나 흘러 무덤덤해졌으며 회사 생활도 삼년차로 접어들어 익숙해져 있었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행복한 것일까 불행한 것일까. 최승자처럼은 아니더라도, 내게 고작 이런 식으로 정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가 온 것인가. 적어도 당시 내게는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할 낭만 정도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내 이십대와 삼십대의 경계는 행복도 불행도 유실된 무중력의 상태였다. 그 무중력 속에는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출처 없는 불안이 가득 차 있었다. 이십대와는 다른 성분의 불안으로 마음 편히 늙지도 못하는 삼십대였다. 다시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튼’ 아버지는 결국 고인이 되셨고, 벌써 이별한지 두 해나 지났지만 생생불식 그대로인 실연의 흔적이며, 어느새 십년을 훌쩍 넘긴 사무원 생활은 하면 할수록 더 적응되지 않는 무력감이 쌓였다. 그 모든 생채기는 이십대에 비해 잘 아물지 않았다.
작년 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올해도 지구상의 내전은 수년째 계속되고 있으며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인 아일란 쿠르디도 터키 해변에서 목숨을 잃었다. 십년전에 비해 이 세계에 참혹한 일들이 모르긴 몰라도 훨씬 더 많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나는 그런 세계와 시간을 뚫고 ‘삼십세’가 된지 십년만인 내년 2016년 마흔을 맞게 된다. 사실 그 동안의 내 고통과 상처도 뼈 시리게 아픈 것이었지만, 나를 한 입에 집어 삼키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곧 마흔이 될 나는 놀랍게도 여전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상태 그대로다. 당황스럽게도 조만간 나는 ‘삼십세’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사십세를 맞게 될 것이다. 나는 더 오래도록 어쩌면 평생에 걸쳐 ‘삼십세’를 맞게 될지 모른다. ‘그냥 이렇게 이대로 살 수 있을 것 같고 또는 내일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생각될 때까지, 나는 십년마다 새로운 ‘삼십세’를 맞게 될 것 같다.
마흔이 되어 또 다시 맞는 ‘삼십세’가 기껍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까. 불안이 멈춰지지 않는 것에 대해, 그 청춘의 증세에 대해서 뭐라고 할까. 아직 확답할 수 없다. 다만 오래된 육체에 머무는 ‘청춘’은 삼십세 이전의 청춘과는 다르다는 것. 나는 그런 내 ‘청춘’을 두고, 망자의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내 곁에 가득하다고 말하겠다. 또한 십년 주기로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기 직전 더이상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이 갓 낳아 놓고 간 눈도 못 뜬 어린 것들이 여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내 불안의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려 작은 입을 꽃잎처럼 벌리고 있다고 말하겠다.
**약력: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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