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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특집/시와 일상/최금진/시인의 일상(나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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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와 일상
최금진
시인의 일상(나의 일상)
아침 10시쯤 일어나 스마트폰을 열어 뉴스를 보고, 낚시 게임을 조금 하고, 교수 채용 정보를 뒤지고, 스포츠 소식을 검색하고, 다시 누워서 잠을 잔다. 운이 좋으면 25년 전쯤에 헤어진 첫사랑을 꿈에 볼 수도 있다. 어쩌면 물고기를 많이 낚는 꿈을 꿀 수도 있다. 그런 날은 즐겁게 꿈을 해몽하느라 더 늦게 일어난다. 눈을 뜨고 일어나면, 창밖에 안개가 끼었으면 좋겠다. 안개는 희고 어둡다. 나는 안개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지워지고 다시 희미하게 살아나는 것이 좋다. 나는 안개 속을 걸어서 교회를 다녔고, 안개 속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고, 안개 속을 걸어 지금 살고 있는 이 도시로 이사를 왔다. 안개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디를 가고 있든, 어느 정도의 면죄부를 준다. 가려주고 덮어준다. 안개는 피로와 안식을 적절히 섞은 한 잔의 우유와 같다. 안개를 생각하며 한 잔의 우유를 마신다. 우유는 골다공증에 좋고, 위염에 좋다. 우유를 좋아하지 않지만 우유를 마시는 아이러니가 좋다. 아침이 온 것이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은 순식간에 쌓인 피로와 짜증 속에서 숨이 막힌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두려운 것은 없다. 이상적인 삶이란 보다 할 일이 없는 일상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가는 배를 한 척 사서 여길 뜨는 게 소원이다. 몽롱함 속에서 불안한 오후가 시작된다. 몽롱한 기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내 몸을 차지하고 있다.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얼굴 앞의 텅 빈 공간을 본다.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처럼 사람들의 웃음과 대화가 굴절된다. 상이 제대로 맺히지 않는 눈은 쉽게 피곤해진다. 도피의 기분은 더럽다. 그것은 패배의 느낌과 비슷하다. 피로감에서부터 도피하는 사람은 뒤가 구린 사람처럼 늘 옹색한 변명거리를 갖고 다닌다. 바쁜 일이 있다, 집에 일이 있다, 몸이 안 좋다, 급한 일이 생겼다. 다양한 핑계거리를 만들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귀신같이 나의 어정쩡한 표정을 알아챈다.
오후 4시쯤 되면 몸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무겁고 쑤시고 아프다. 나는 최근에 갑자기 늙은 것이다. 몸은 오랫동안 나를 속이고 있다가 한꺼번에 나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긍정적인 생각이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억지로 세상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이다. 비관적인 생각은 나의 약점이다. 사람들은 그 약점을 쉽게 눈치 챈다. 그리고는 뾰족한 말과 예리한 속임수로 내 틈을 파고 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뾰족함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서너 잔은 마셔야 한다. 몸과 마음 모두에 친절함을 베풀어야 한다. 커피는 나를 위한 나의 위로. 몸이 너무 쑤신다. 어디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해는 지고 날은 선선하다. 눈이 밝아진다. 눈이 밝아지면 정신은 지나치게 예민해진다. 공통점과 차이점, 상식과 몰상식의 구별이 쉬워진다. 유쾌해지기도 한다. 나는 유쾌한 사람이라고 믿어도 좋을 만큼 유쾌해진다. 유쾌함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쾌해지기도 한다. 강요한다. 웃어야 한다. 웃지 않고서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랴. 웃지 않는 사람은 잔인하고 음흉한 사람이다. 종종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감정 싸움부터 말싸움까지 다양하다. 사람들과의 부조화를 그럴 듯하게 잘 넘길 자신이 없다. 다툼은 늘 너무 과하거나 너무 모자라다. 저녁을 먹는 일은 거의 의무에 가깝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어제 먹은 것을 오늘 다시 먹는 경우가 많다. 평생 같은 솜씨로 살아온 어머니의 반찬을 먹는 것이니, 이토록 단조롭고 일정한 패턴이 나를 먹여 살린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는다. 스마트폰을 열어 뉴스를 확인하고, 게임을 조금 하고, 스포츠 소식을 검색한다. 아이는 자고 있고, 아이 손가락을 가만히 만지다 보면 슬프고 쓸쓸한 생각이 조금 든다. 무방비의 삶, 아비에 대한 대책 없는 믿음. 아이는 자면서도 손을 뻗어 제 옆자리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다.
내가 시를 떠난 게 아니라, 시가 나를 떠난 것이라는 불쾌한 허무감을 지우기 위해 거실에 나가 TV를 본다. 내가 즐겨 보는 건, 자연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다. 그들은 모두 약초를 캐러 종일 산속을 헤매고 다닌다. 그들은 모두 머리카락이 덥수룩하며, 옷이 더럽다. 그리고 그들은 옥수수나 감자를 먹으며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도 뭔가를 먹어야 한다. 하루 두 끼를 먹는 삶은 왠지 억울하다. 먹는 것 말고는 재미있는 일이 없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적이고도 따뜻한 위안을 얻는 삶은 내게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혼자 거실에 유령처럼 둥둥 떠 있다. TV에 나오는 자연 속의 사람들은 노루나 고라니 같다. 이쯤에서 모든 걸 접고 고향 산자락 어딘가로 숨어든다 해도 아쉬울 게 없는 삶이다. 시를 쓰는 것은 욕망 그 이상의 폐허를 경험하는 일이다. 이런 일을 25년 넘게 하고 있다. 나는 시가 싫다. 시가 지긋지긋하다. 시를 쓰지 않고 있는 이 순간들도 지겹다.
나는 잠을 자기 위해 노력한다. 잠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눕는다. 아이 옆에 눕는다. 아이 손가락을 하나씩 만져본다. 아이 옆에서 아이처럼 웅크리고 누워 자는 시늉을 한다. 세상에는 없는 행복을 꿈꾸며, 내가 살아있는 시늉을 한다. 어른인 시늉을 한다. 자는 시늉을 한다.
꿈속에선 첫사랑 그 애가 나왔으면 좋겠다. 안개 낀 그 어느 날, 저수지 둑길을 걸어오던 너를 몰래 숨어서 기다리던 저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런 저녁, 공기는 청량하고 가벼우며, 세상의 모든 길들은 자전거 바퀴처럼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끝없이 너의 집을 향해 달려간다. 내가 오직 너였던 그날들로 돌아가고 싶다. 아그배나무, 붓꽃, 라일락, 교회당 종소리, 후투티새, 카시오페이아자리, 달팽이, 달로 가는 시내버스.
**약력: 2001년 제1회 창비신인시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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