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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집중조명/김종/1℃에 목이 메이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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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김종
1℃에 목이 메이다
바람 끝이 차다는 말이 귀에 감긴다
장롱구석에 위리안치 시킨 내복을 풀어준다
내복들도 답답했던지
구겨진 팔다리를 흔들어보고 한참을 부산하다
잔소리처럼 죄어오던 답답한 구속에게
다리도 내어주고 팔도 내어준다
내복은 뱃구레부터 어머니의 약손처럼 문질러준다
싫지 않게 가려운 게 애완견 뭉치의 혀끝 같다
고요가 싫어지면서 얻어온 뭉치는
오나가나 발끝에 척척 감긴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발걸음을
온몸이 귀가 되었다가 입술이 되었다가
현관문을 열면 한달음에 앞산이 되었다가
같이 놀아주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인다
첩첩이 숨어있던 때 절은 살림살이에
고요의 한기를 몰아내준 뭉치처럼
들러붙은 세월의 한기를 내복이 몰아내주려나
뭉치와 내복이 한 동무 하려나
마음과 몸의 온도를 1℃씩 올렸으니
이 정도로 무장하고 길을 나서면
저토록 시퍼렇게 주름주름 흘러가는
노을 강의 웃음 위를 건널 수 있을는지.
무릎
무릎이 꺾이자
비자나무처럼 단단하던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을 달래려고 어루만질 때마다
열다섯에 시집간 큰누나가 생각난다
첫딸을 낳자 기꺼워하던 부모님은
큰딸을 살림밑천 삼으셨다
부모님이 뒷개 논배미에 일하러 가면
집안일과 동생보기는 큰누나 차지였다
부모님을 대신할 때 큰누나는 큰애였다
큰애는 우리를 자상하게 단속했고
큰누나를 통과해야 부모님에 닿곤 했다
누나는 우리 집 무릎이었다
누나가 시름시름 앓아누워도
무릎만은 까딱없는 줄 알았다
인고의 활액막이 찢기고
온몸이 벌겋게 부어오른 누나는
그제서야 큰애도 큰누나도 아닌
건강이 난파된 열다섯 살 소녀였다
뒷산 뻐꾸기에게 누나가 시집간 날
비자나무 무릎은 모래처럼 허물리고
벼랑에 내몰린 우리 가족의 무릎은
졸지에 허리 꺾인 돛폭이거나
직립이 불가능한 퇴행성 앉은뱅이란 걸
뻐꾸기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집게
아들네 집에 사는 감골댁은
여든하고도 일곱 해를 살았다
이른 아침에 모실 나가면
어둑해서야 돌아오곤 했다
감골댁은 건축가다
노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무게와 부피의
허섭스레기를 개미처럼 물어 나른다
헌 박스와 나일론 끈과 스티로폼과 비닐봉지와
헌 막가지가 감골댁 건축재료의 전부다
아이들 다섯을 낳고
바람 치는 들판에서 혼자된 감골댁은
사글세 월세방을 전전하며
언제 내칠지 모르는 노심초사로 청상을 건넜다
구십 고개가 코앞인 지금에도
무주택의 설움은 떠날 줄을 몰랐다
뼛속까지 달라붙은 사람괄시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산속 빈터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엉덩이만 들어앉혀도
아들 집보다 산속이 백배는 편했다
내 집 한 채로는 설움이 풀리지 않았다
또 한 채 박스집이 아홉 채로 늘었다
오늘도 감골댁은
서리머리에 사과박스를 이고 간다
감골댁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집 한 채가 지어지고 있다.
당산나무 한량께서는
소리 북처럼 득음한 세월을
팔 벌려 안아보았다
칠백년 된 강건한 몸이
허공 멀리까지 육중하게 만져졌다
손 모아 밤샘 기도하는
삼천갑자 동박삭을 뵙는 듯했다
풍우를 막아서던 가지 몇 개가 부러졌다
다람쥐보다 빠른 사람들이
어떤 것은 받쳐주고 어떤 것은 절단했다
절단된 뒤에도 나무는
솥단지 같은 제 속을 보란 듯이 열어놓고
높은 키 등대처럼 온 마을을 밝혔다
마을 대소사를 너털웃음에 내바람하던
풍채 좋고 팔자 좋은 당산나무는
노환에 링거 꽂고 시름거리면서도
하늘 높은 별들과는 밤 새워 소곤거리고
넓게 편 그늘자리에는 평상을 놓아
펄펄 끓는 삼복더위를 거뜬히 건네신다
정든 사람 정든 마을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이리 태평한 세월은 없다시는지
하늘만큼 땅만큼 멀리 웃어 보이고
한량으로 이날 평생을 살랑이신다
겨울산
겨울산은 보디빌더다
냉철한 근육질로 남기 위해
이두박근 삼두박근이 용트림을 한다
갈빛에 억새가 아름다운 이유는
새끼손톱을 날카롭게 벼리기 때문이다
가슴살에, 엉덩살에
생의 통각을 깨우는
저 단단한 벼랑의 꽃들
늦바람난 근육들 날아오른다
답답할 때는 겨울산을 보라
드러난 침묵은 감싸듯이 빛나고
지금의 결빙으로 산은 무장하였다
청둥오리처럼
수면 아래 발길질로 쉬어가는 중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비틀비틀 눈물 사이로 산이 되는 일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그곳에 가서
눈폭풍이 몰아쳐도 눈꽃 피우는 일이다
허수아비처럼 서있는 갓길의 고목들도
에둘러 눈물구멍에 연기 피우다가
상처마다 꽃 피어 울끈불끈 웃으라고
은빛 지느라미 불씨처럼 눈뜨라고
새벽시간 기침 한차례씩 쿨룩이면서
화로처럼 겨울산을 꾹꾹 눌러 밟고 간다.
**약력:1976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장미원』, 『궁금한 서쪽』, 『그대에게 가는 연습』 등 10권. 저서 『전환기의 한국현대문학사』, 『바다는 방패가 있다』, 『한밤의 소년』(역서) 등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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