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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책 크리틱/김성조/언어적 길 찾기와 길 밖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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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김성조
언어적 길 찾기와 길 밖의 여행
ㅡ이희원 시집 『코끼리 무덤』
1.
이희원 시인의 첫 시집 『코끼리 무덤』은 2007년 등단 시점에서부터 출간까지의 시간적 거리를 보더라도 꽤 긴 기간 동안의 시적 발자취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등단 이전의 치열한 시작수업 과정의 작품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시인의 경우, 등단 절차를 거치기 전에 이미 활발하게 시작활동을 하고 있었고,『오거리』라는 공동시집도 출간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이번 첫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그 양적인 면에서 오히려 간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시인이 평소 다작을 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해주는 부분이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보다 엄선된 작품만을 묶으려는 나름의 고심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의 시적 지향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 된다. 시인의 첫 시집이 단단하게 제 중심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희원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특히 무게를 두고 탐구해가고자 하는 주제는 말(言)이다. 제1부에 실려 있는 상당량의 작품들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새로운 주제로 전환되어가고는 있지만, 2부와 3부의 작품들도 엄밀히 이와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언어에 대한 자각과 선택, 활용이라는 명제에 기반 해 있고, 이로 인한 고뇌와 좌절, 허무적 심연에 침잠해 있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관심과 접근은 시를 쓰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절실한 과제이다. 그래서 언어와 조우하고 이별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시인의 시편에 자주 등장하고 있듯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수반한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의 언어가 시 속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또 어떤 의미로 확장되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될 것이다. 이때의 언어는 직접적으로 시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시 속에 용해되어 한 편의 시로서만 그 구체적 성과를 체감하게 한다.
이희원 시인의 경우는 이와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살펴봐야할 필요가 있다. 시인은 ‘말(言)’ 그 자체를 직접적인 시적 소재 혹은 주제의식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이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시 속에 등장시키면서 이를 지속적인 시적 화두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작(詩作)의 지난한 여정과 이에 대한 반응을 ‘언어’를 통해 풀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어의 본질을 사유하려는 일련의 목적과 함께 그것이 가지는 모순과 한계, 그 허상까지 성찰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따라서 말을 주시하고 탐구하고 해체해가려는 시인의 시적/심리적 구도에 초점을 두고 그의 시를 파악하고자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갈등양상들이 곧 언어적 혹은 길 밖(현실적)의 풍경들을 형상화해내는 시적 파장이면서 긴장을 이끌어가는 배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말을 건다
하나는 책을 뜯어 말 조각들을 끄집어내거나
하나는 만나는 것들을 먹어치우는 일이다
커피를 만나면 커피를 먹고, 샌드위치를 만나면 샌드위치를 먹고
그녀를 만나면 그녀를 먹고 그녀의 혀 속에 길을 내보는 것이다
말과 말이 부딪쳐 넘어지면 글이 된다
책 속엔 언제나 그들이 흘린 피비린내 가득하다
혀가 찢어지는 아픔 없이
누가 사랑을 이야기하는가
그러나 폭식은 그대의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
말과 말이 부딪쳐 떨어지는지 오늘은 첫눈이 온다
눈은 아마도 말들의 주검인지 모른다
그대에게 가기 위해 나는 오늘도
말의 주검을 밟으며
커피를 먹고, 샌드위치를 먹고 그녀를 향해 돌격 중이다
-「어떤 작위作爲」전문
시인에게 “말”은 “글”, “책”이라는 대상물로 표상되고 있는 시 혹은 시작(詩作)과 맞물린다. 그리고 “말과 말이 부딪쳐 넘어지면 글이 된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과정은 치열한 고통을 담보한다. 여기서 “말과 말”은 서로 상충하는 관계이면서 한편으로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관계이다. 즉, “말”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갈등상황에 부딪치게 되고 그 결과 “글”이라는 또 다른 결과물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책 속엔 언제나 그들이 흘린 피비린내 가득하다”, “혀가 찢어지는 아픔”, “눈은 아마도 말들의 주검인지 모른다” 등의 표현 속에는 시인의 “말”에 대한 독특한 사유의 흔적이 묻어있다. “피비린내”, “아픔”, “주검” 등에서 그 확연한 파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말”이 글이나 책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말”의 선택과 그것의 온전한 쓰임에 대한 고충을 극단적인 용어들로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일별해 보면, 시인이 말을 통해 체감하는 세계는 밝고 긍정적인 측면보다 무겁고 어두운 구도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말들의 주검”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듯이 생성보다 소멸의 속성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말을 의미화 하는 과정으로서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겠지만, 더 내밀하게는 시인의 내면풍경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구체적인 완성의 세계보다 그 과정에서 체득되는 불완전하고 소모적인 상황에 더 깊이 침잠해 있다. "지금은 오타를 부풀려 찐 신문이 배달된 굶주린 아침”(「오기誤記」), “세상의 모든 혀들이 몰려오고 있었지/작란雀卵을 감추기 위해 작란作亂을 준비했어”(「말작란作亂」)에서도 말의 모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드러난다. 정확성을 기본으로 해야 하는 신문의 ‘오타’나 놀이의 형식으로 전락하고 있는 ‘말작란作亂’의 논리에서 시인의 말에 대한 불신과 한계가 감지된다.
위 시의 제목「어떤 작위作爲」에서의 ‘작위’ 또한 이러한 맥락 속에 포섭된다. ‘작위’는 인위적인 행위와 의도된 결과물을 전제로 한다. 시인이 설정해 놓은 시적공간은 이처럼 언어적 고통의 흔적과 이를 부정하는 회의적인 색채가 공존한다. 언어에 대한 절실한 심연과 함께 그 반대편에서의 자기부정의 하향 이미지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긍정적인 자아와 그 자아를 부정하는 냉소적 자아가 상호 대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언어 행위와 그 결과물로서의 충만이 배제될 수밖에 없다. 시인의 시편에 내재해 있는 시적갈등은 대부분 이러한 구조 속에서 생성되고 또 확장되어 간다. 이는 말 자체를 즐기고자 하는 ‘작란(作亂)’의 배경과 ‘작위(作爲)’의 행위 등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커피를 먹고, 샌드위치를 먹”는 일상처럼 말에 뛰어들고 말을 생성하고 말을 소멸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아이러니적 구도가 바로 이희원 시의 골격을 이루는 긴장의 축이 된다.
참 말 꼬랑지를 한 백년 묻어 놓으면
말이 될까?
참 당신들 건방지게 내 꼬리 건들지 마!
나는 늘 입 밖에 살아
-「말꼬리찜」부분
이걸 먹고도 못 일어나면
내 레시피 따윈 미련 없이 찢어버리겠어
너는 시인도 아냐
-「말밥 레시피」 부분
나는 입술을 기억하지 못하는
핏빛 말들을 칼질 한다
이젠 누가 그어 놓은
밑줄에 앉아야 하나
어떤 페이지는 마침내
아무 것도 씌이지 않는다
-「후 토크」부분
‘말’의 순례는 말의 긍정적인 효용성을 지향하면서도 모순과 불확실성의 이면을 확인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이로 인한 갈등요소나 비판, 좌절의 정황을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한 과정으로 보여 진다. “참 말 꼬랑지를 한 백년 묻어 놓으면?/말이 될까?”, “이걸 먹고도 못 일어나면/...../너는 시인도 아냐”, “어떤 페이지는 마침내/아무 것도 씌이지 않는다” 등의 시적 사유 속에는 “말”에 대한 냉소와 자기비판, 회의적 심연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언어에 대한 본질적 질문과 이를 사유하고 성찰하는 과정으로서의 반성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앞서도 짚어보았듯이 말의 순례에서 체득되는 시인의 정서는 충족보다 자기회의에 닿아있다. 이는 끊임없이 언어에 몰입하면서도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상황적 모순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언어적 한계와 언어를 추구하는 자아에 대한 한계가 동시에 드러나는 순간이 된다. 따라서 매순간 절박한 자괴감의 심리를 시의 행간에 심어둘 수밖에 없다.
언어를 추구하는 것은 언어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고, 그 쓰임을 극대화하겠다는 내적 열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양한 위치에서의 언어적 탐색은 시적 충만을 확보해가려는 일차적 화두가 될 것이다. 또한 자아인식의 파장을 보다 섬세하게 감지해가려는 미적 근간이 되기도 한다. 이는 시의 개별적 특성은 물론 이를 실천하거나 혹은 좌절하는 자아의 위치를 규정하는 지점이 된다. 언어탐색은 자아탐색이다. 이런 점에서 언어부정은 곧 자아부정이 된다. 시인의 긍정과 부정의 심리적 기저에는 언어의 불확실성만큼이나 자기존재의 불확실성이라는 메시지가 전제되어 있다. 이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갈등하게 하고 반복적 흐름을 이끌어가게 가게 하는 이유가 된다. 언어에 대한 환상과 이러한 환상을 깨고자 하는 열망이 시의식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2.
이희원 시인의 사유의 저변에는 공백이 있다. 공백의 정서는 그가 흘려 놓은 언어의 촘촘한 그물망의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그 진폭을 드러낸다. 시인의 공백은 흔히 공백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생략이나 말 줄임 등의 구도와는 다른 측면이다. 오히려 시의 행간에서 포착되는 이미지의 울림이나 정서적 정황이 그 주된 배경이 된다. 즉, 언어와 현실을 사유하고 실천해가는 주체의 내면의식의 섬세한 파장에 핵심이 놓인다. 나와 세계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어느 만큼의 거리가 존재한다. 따라서 시적 주체는 언제나 일정 거리 밖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관여하고 또 나름의 존재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나와 세계의 위치를 구분 짓고 규정해가는 이 ‘거리’가 바로 이희원 시의 공백을 주도해가는 정서의 근원이다. 여기서의 ‘거리’는 여유와 관조의 형식에 근거한 ‘비어있음’ 혹은 ‘비워둠’과는 구분된다. 주목해보면, “이방인의 언어로 엽서를 남길지 몰라”(「불쌍한 마더리즈」)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일종의 이방인 의식과 연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 의식으로 명명할 수 있는 정서적 흐름은 그 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희원 시의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정신적 방황의 형식으로 결집되는 이러한 정서는 시의 내ㆍ외적 색채를 물들이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시인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혹은 사회적 구조가 불러들인 완고한 틀 속에 정착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늘 어딘가로 떠돌고 있다. 언어 순례 또한 크게 이러한 떠돎의 형식 속에 포섭될 것이다. 여기에는 나와 세계 그리고 긍정과 부정을 경계 짓는 강렬한 자의식의 세계가 개입해있다. 이러한 자의식의 심연이 곧 이방인의 정서를 추동하는 자괴감과 소외의식의 심리적 기저가 되고 있다.
공백의 사유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표상해내는 시적 장치일 수도 있고 무의식의 작동으로 볼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 언어에 천착하는 시인의 의도적 갈등의 형식으로 집약되고 있지만, 오래 체감해온 경험적 시간들이 무의식의 형태로 반영되기도 한다. 시인의 시편에 ‘시간’에 대한 반응이 상당부분 사유의 무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백의 정서를 아우르는 ‘거리’와 자괴와 소외, 이방인의식 등이 곧 이번 시집의 중심 배경이 된다. 언어적 그리고 언어 밖(현실적)의 풍경들도 대부분 이러한 기반 위에서 생성되고 의미화 되고 있다. 아래에 인용하는 시「기쁜 시정마」는 이희원 시의 출발과 질곡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시편은 ‘시정마’라는 특정 존재를 통해 시의 여정은 물론 자아의 심리적 반응까지 내밀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려면, 한여름 찌는 뙤약볕과 살을 에는 바람과 함께해야 한다. 홍어처럼, 식당 한구석에서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푹푹 썩어갈 때 사랑은 발효한다. 모두들 지쳐 돌아갈 때 내 사랑은 빛난다. 허울 좋은 참사랑 따위에 빠져 갈급해져선 안 된다. 이만한 사랑도 내겐 너무 과분하다. 종마가 올 때까지가 나의 임무다. 미친 듯이 사력을 다해 절규해도 소용없다. 사랑은 원래부터 프로그래밍 속에 없다. 그녀의 행복을 빌며 발걸음을 돌려야겠다. 히이힝
-「기쁜 시정마」부분
‘시정마’는 잘 알고 있듯이 종마와 암말이 순조롭게 짝짓기를 할 수 있도록 암말을 흥분시키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종마가 나타나면 그 즉시 퇴장해야 하는 것까지가 그의 임무다. 최선을 다해 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은커녕 강제적으로 쫓겨나는 비애감을 안게 된다. ‘시정마’의 역할과 존재의 상징성은 비단 말(馬)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여러 측면에 적용되고 또 해석이 가능해진다. 가장 손쉽게 자본과 소시민의 위치, 사회/현실적 측면에서의 갑을 관계의 모순성 등을 짚을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띄는 혹은 띄지 않는 범주에서의 크고 작은 차별성과 편견, 부조리의 배경들이 곧 ‘시정마’를 통해 상징화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징의 근저에는 처음부터 비판과 반성을 요구하는 문제의식들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인 잣대를 벗어나 시인이 표상하고 있는 ‘시정마’의 특성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위 시의 ‘시정마’는 여느 시정마와는 달리 자신의 소신을 그 역할 속에 충분히 극대화하고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위치와 역할, 그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수용하고 체념 혹은 절제할 줄 안다. 따라서 약자로서의 모습이나 비굴한 구걸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암말의 “절규‘까지 무시하고 발길을 돌리는 단호함과 주도적인 자기관리의 철저함이 부각된다. 자신의 역할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또 이를 자신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에너지까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시의 전면에 깔리는 극단적인 비애감의 무게를 포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시정마‘가 결코 ’종마‘가 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정마‘의 계산된 사랑의 형식이 강렬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비극성은 보다 극명해진다.
무엇보다 위 시의 비극성은 이러한 현실을 ‘시정마’가 명징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정마’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이를 뛰어넘고 자신만의 존재방식을 확보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 행동양식도 결국 적극적 자기방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편에 흐르는 냉소적 어투와 작위적인 행위, 그 위를 교차하는 슬픔은 ‘시정마’의 위치를 보다 명징하게 일깨워준다. 여기서 우리는 늘 선 밖에 서있는 듯한 혹은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시인의 사유의 근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긍정과 부정을 넘나드는 이른바 긴장의 끈을 조이다가도 어느 순간 스스로 풀어버리는 회의와 갈등의 실체도 감지할 수 있다. 위 시편은 제2부 <여자라는 종에 관한 보고>에 실려 있는 작품인 만큼 에로스와 연계해서 읽을 수도 있다. 이 시편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독특한 관계설정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쁜 시정마”의 ’기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편은 이러한 관계보다 훨씬 큰 역설적 진폭을 내장하고 있다. 모순성을 동반하는 언어적 공간과 이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독특한 존재방식이 ’시정마‘라는 키워드로 상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기 하늘을 놓친 깃털이 있다
족쇄 채워진 새의 일부가 있다
내가 지상으로 내려온 지는 수억 년이 넘었다
내가 이렇게 묶인 지도 1만 년은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말의 노예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온 하늘과 태양을 노래하고 싶었다
나를 먹물 속에 담그거나
언제부터인가 내 몸에 먹물을 집어넣고는
내 몸에서 말즙을 짜내기 시작했다
어떤 기록은 왜곡의 산실産室이다
내 깃가지를 비틀어도
나는 그런 말을 토해낸 적이 없다
내 거처는 저 텅 빈 하늘이다
애초부터 나는 정착을 모른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새다
-「깃털」부분
시인의 언어에 대한 절망은 상처의 형식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깊고 집요하다. “족쇄”, “노예”, “말즙”, “산실(産室)” 등에서 보여 지듯이 여기에는 혹독한 자기 벼림의 고통이 제시되어 있다. “하늘을 놓친 깃털”, “족쇄 채워진 새의 일부” 등도 이러한 처절한 상황을 확인시켜준다. 언어의 효용을 극대화해야할 시의 길에서 “말”을 놓친다는 것은 대단히 모순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처음부터 말의 노예가 아니었다”라는 고백은 대단히 의미 있게 다가온다. “처음부터”는 말의 노예가 되기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상정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언제부터 언어를 갈구하고, 언어에 종속되고, 언어에 절망하게 되었을까. 이는 당연히 시작(詩作)과 관련해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위 시는 “말”의 의미를 새삼 일깨우고 성찰해가는 과정으로서의 무게를 담고 있다. 특히 말과 자아와의 관계 즉, 시와 현실을 대비적 갈등의 차원에서 상기시키고 있다. “깃털”과 “새”는 본래적 자아를 의미한다. 이는 언어에 종속되기 이전의 현실적 자아 혹은 스스로 설정해 놓은 이상적 자아의 상징일 수도 있다. 따라서 종국에는 찾아가야할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승지향점이 된다. “말”의 세계가 “족쇄”, “노예”, “말즙”, “산실(産室)” 등의 억압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면, “깃털”, “새”는 자유를 표방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처음부터 말의 노예”가 아닌 시간들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말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응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또한 “애초부터 나는 정착을 모른다”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방황의 정서와 맞물리고 있다. “새”는 정신적 자유와 승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속에 떠돎의 속성 또한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개의 정서적 흐름이 곧 이희원 시인의 시적 구도이고 스스로 성찰해가고자 하는 자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언젠가부터 당신과 나 사이의 언어가 불통되기 시작했다. 닫힌 귀에 부딪친 내 말들은 튀거나 부서져 전달은 되었으나 늘 차단되고 있었다.
늘 안개가 피어 있었다. 아마도 벽 밖에서 내 얼굴을 보았다면 회춘했다며 놀렸을 것이다.
가끔은 벽의 안과 밖이 바뀌는 날이 있다. 그날은 당신이 벽을 떠나 끝없는 드라이브를 떠나는 날이다.
벽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불안과 초조가 달려들 것이다. 방음벽은 어디에나 있다. 아니 어디에도 없다.
방음벽은 안과 밖이 따로 없다
-「방음벽」부분
살펴보았듯이, 시인의 언어에 대한 천착은 언어를 전면에 두고 지속적인 화두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욕구와 이를 부정하고 회의하는 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긍정적 측면에서의 언어지향의 몸짓과 언어적 한계와 모순성을 감지하는 또 다른 시선을 동시에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혹은 시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으로서의 발자취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시적 구도는 어느 한 시점에서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위 시 「방음벽」이 바로 이러한 반응과 변화를 감지하게 하는 경계에 있는 것 같다. ‘방음벽’은 외부와 내부의 소리를 동시에 차단하는 특성을 안고 있다. 따라서 보다 완고한 형태의 단절을 그 안에 내장하고 있다. 이는 시인의 언어추구의 여정에 비춰보면 생경하고 극단적인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시인이 펼쳐내고 있던 갈등구조와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내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위 시는 앞의 시「깃털」에서 보여준 언어와 자아와의 대비적 갈등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불통’이라는 보다 확연한 심리적 변화를 체감하게 한다. 언어는 소통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런 측면에서 “언젠가부터 당신과 나 사이의 언어가 불통되기 시작했다”라는 반응은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한다. ‘언어불통’은 언어적 기능상실 뿐 아니라 크게 세계와의 단절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방음벽’이라는 구조물과 연계되면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울림으로 다가온다. “당신과 나”는 “벽의 안과 밖”에 서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을 야기 시키는 “방음벽은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방음벽’의 폭력은 우리의 삶의 곳곳에 파고들어 정신을 경직시킨다. “불통”, “차단”, “안개”, “벽” 등의 이미지들은 삶의 보폭을 축소시키는 소통부재의 상황을 상징한다.
시 「방음벽」은 「기쁜 시정마」와 마찬가지로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언어와 관련해서 시인의 내면의식의 반응과 단계적 변화의 조짐을 짚어봐야 할 것이다. 언어추구를 지속해오던 시인이 “언어가 불통되기 시작했다”를 경험하게 되는 과정은 또 다른 충격과 상처를 맞닥뜨리게 되는 시간이다. 시인의 이번 시집은, 말의 지향과 절망 이로 인한 회의와 갈등, 심적 공백, 이를 무산시키려는 역설적인 냉소, 정신적 방황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방음벽」의 세계는 이와 연장선상에서 체득하게 되는 또 다른 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언어불통’의 단절을 깨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을 모색해가야 하는 극점이 바로 그것이다. 즉, 새로운 시적 화두를 열어가야 할 필요성이 감지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는 또한 역설적이게도 언어를 놓아야 언어가 보인다는 단순한 진리와 맥이 닿아있다. 따라서 “나는 고작, 한 여자에게서 꺼내온 울음 하나를 쌀쌀한 봄날, 이 도시에서 영구 추방한다”(「에코가 사육하다」)라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갖는다. 시인은 이제 언어에 천착하기보다 절실하게 시를 열어가야 할 때라는 것을 시「방음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그의 돈키호테적 방황을 더 끈질기게 지켜봐야하고, 새로운 집을 짓게 될 두 번째 행보를 뜨겁게 기다려야할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약력:한양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3년『자유문학』으로 시, 2013년『미네르바』로 평론 등단. 시집『그늘이 깊어야 향기도 그윽하다』『새들은 길을 버리고』『영웅을 기다리며』. 학술저서 『부재와 존재의 시학-김종삼의 시간과 공간』 등. 현 한양대에서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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