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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책 크리틱/권경아/언어로 빚어낸 자연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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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권경아
언어로 빚어낸 자연의 향연
ㅡ이외현의 시집『안심하고 절망하기』
1.
이외현의 안심하고 절망하기는 자연에 대한 섬세한 시선으로 가득하다. 시인이 그려내는 자연은 도시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친근하고 낯익은 풍경이다. 그의 시에는 ‘봉선화’, ‘강아지풀’, ‘개망초’, ‘토끼풀’, ‘자귀나무’, ‘배롱나무’와 같은 소박한 자연의 모습들이 자주 등장한다. 깊은 산골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라기보다 도시의 생활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풀과 꽃, 그리고 나무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자연들을 시인 자신만의 섬세한 언어로 빚어내고 있다. 시인은 주변에 존재하는 많은 자연들을 우리의 삶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이는 도시의 삶과 자연을 언어를 통해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다. 이외현은 자연의 화려한 향연을 언어로 빚어내고 있다. 안심하고 절망하기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꿈꾸며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자연의 향연이다.
갯벌에서 조개를 데려와 모래를 토할 때까지 간지럼을 태우네. 저수지의 초승달을 건져내어 쌀뜨물로 달국을 끓이네. 한소끔 끓으면 조개를 넣고 바다안개로 국간을 하여 갈대고명을 얹는다네.
명사십리 바닷가의 참깨별을 건져 샛별과 은하수로 잡곡밥을 하네. 무쇠 솥뚜껑이 게거품을 물면 아궁이 불을 줄여 물안개 뜸을 들이네. 며느리밥풀로 아기 죽을 끓이고, 명아주나물 무쳐 접시꽃에 담는다네.
해넘이를 데려와 석쇠에 굽고 달국, 별밥으로 상상의 저녁밥을 먹는다네. 굶주린 산짐승이 사냥에 나선 시간, 드러누운 뱃가죽에 연못이 패이면 밤참으로, 감히 태양의 간을 꺼내먹어 붉어진 홍시로 시린 배를 채운다네.
-「달국 별밥」 전문
저수지에서 건져낸 초승달로 달국을 끓인다. 갯벌에서 데려온 조개 넣고, 바다안개로 간을 하고, 갈대로 고명을 얹은 달국을 끓인다. 바닷가에서 건져낸 샛별과 은하수로 잡곡밥을 한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무쇠솥에 밥을 한다. 명아주나물을 무쳐 접시꽃에 담아낸다. 해넘이를 데려와 석쇠에 굽고 달국, 별밥으로 시인은 저녁밥을 한 상 잘 차려내고 있다.
「달국 별밥」은 이외현의 시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갯벌의 조개’, ‘저수지에 뜬 초승달’, ‘바다안개’, ‘갈대고명’, ‘바닷가의 샛별’ 등 자연이라는 재료를 언어로 적절히 다듬고 요리하여 화려하지 않은 듯 화려한 밥상을 차려내고 있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언어를 통해 이루어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와도 같은 것이다. 이 시집은 시인이 우리에게 차려내고 있는 ‘달국 별밥’이라 할 수 있다. 소박한 듯 화려하고, 화려한 듯 소박한.
매미들이 도열하여 크레센토로 써어썰썰 배꼽 인사한다. 바람개비 돌리는 아프리카봉선화를 열 발짝쯤 지나 해바라기 밭에 이르면 써얼 왁, 써얼 왁, 말매미와 맹꽁이의 현악 이중주가 들린다. 시멘트 바닥을 튕기고, 음표 위를 뒹굴며, 중간 마디에 쪼로롱 쫑, 쏙쏙쏙 새들의 합창이 오선지 위를 난다. 빨간 고추잠자리가 강아지풀과 개망초 사이를 스타카토*로 건넌다. 캉캉춤을 춘다. 토끼풀 손에 이끌려 잔디구장 뒤편으로 돌아 나올 때, 야구장에서부터 쫓아온 말벌이 다가와 위이잉 물수제비 뜬다. 불화살 쏘아 땀에 젖은 몸의 포로를 자빠트린다. 미군부대 담장을 넘던 며느리밑씻개, 가시 박힌 꽃대가 레가토로 갸우뚱 기운다.
-「부영공원을 돌며」 전문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자연은 도시의 삶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도시의 공원을 산책하다보면 쉽지 마주치게 되는 매미들, 봉선화. 강아지풀, 그리고 개망초꽃들. “시멘트 바닥을 튕기고 음표 위를 뒹굴”며 노래하는 새들의 합창. 시인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연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무심히 스쳐지나가던 풀과 꽃들을 생동감 있는 언어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도시의 공원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생명의 모습들을 잔잔하게 그려내면서도 역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살아있음을 그려내고 있다.
빌딩숲이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간다.
철커덕철커덕 철길을 따라 일출을 보러 간다.
도시의 달은 알코올에 취해 초점을 잃었다.
스멀스멀 밤안개 홑이불 덮어 기침하는 달을 가린다.
새벽의 정동진역, 메뉴판의 안주 같은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그 사이에 해변의 달은 몰래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떠나간 달 대신 촉촉한 이슬에 바다는 소주가 된다.
메뉴판의 글자들이 첨벙첨벙 바다에 뛰어든다.
새벽기차는 철길이 없는 바다로 길을 낸다.
안주가 이슬을 마신다. 이슬이 안주를 먹는다.
기차와 이슬과 안주가 서로를 먹고 마신다.
파도가 갈지자로 출렁이며 모래 위를 뒹군다.
부침개가 먹고 싶은 날,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가면,
바다가 보이는 갈매기횟집 통유리창 너머로,
프라이팬에 쟁반같이 둥근 해를 부쳐내는
아주머니가 있다. 없다.
-「정동진에 가면 있다, 없다」 전문
시인이 그려내는 자연이 항상 인간과 ‘함께’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연의 생동감 있는 장면을 묘사하면서도 그것은 언제나 인간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빌딩숲이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간다” 빌딩숲이 도시를 떠나 정동진의 바다로 간다는 것은 도시의 사람들이 바다로 향한다는 것이다. 새벽의 정동진역에 도착한 사람들이 바닷가로 몰려나와 소주와 안주로 위안을 삼는 동안 “해변의 달은 몰래 서울행 가차에 오르”고 있다.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도시의 풍경과는 다른 바다를 꿈꿀 때 “해변의 달”은 반대로 “서울행 기차에” 오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해변의 달”은 오히려 사람들의 숲, 빌딩숲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꿈꾸는 자연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자연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둘러보면 “해변의 달”이 와 있는 것이다. 정동진 해변의 달과 서울의 달은 결국 하나라는 인식이다.
2.
이외현의 시에서는 풀, 꽃, 나무 등 자연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름과 관련된 유래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등 자연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시에 그대로 녹아들어있는 것이다.
연초록 꽃대에 황금 불상이 정좌하여 예불을 드린다.
날아오르는 새의 발톱에 찍힌 나무가 파르르 떤다.
가지를 떠나는 부처들이 황금 꽃비 되어 내린다.
꽃 진 자리에 청사초롱 꽈리 봉인된 자궁을 단다.
해가 말아 올린 속살에 알알이 초록 사리가 박힌다.
바람이 설레발치다가 뒷발로 꽈리자궁을 걷어찬다.
떼구르르 설익은 염주 한 알이 개똥밭을 구른다.
-「모감주나무」 전문
이외현의 시에 등장하는 풀, 꽃, 나무 등의 자연에는 저마다의 소소한 사연들이 있다. 종자로 염주를 만든다는 ‘모감주나무’의 이야기는 이 시의 주요한 이미지가 된다. “연초록 꽃대에 황금 불상이 정좌”하여 예불을 드리는가 하면 가지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은 “황금 꽃비 되어 내리”는 ‘부처’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꽃이 진 자리에 맺히는 씨앗들은 “해가 말아 올린 속살에” 박힌 “초록 사리”이다. 바람이 설레발치다가 걷어차면 “떼구르르 설익은 염주 한 알”이 툭, 떨어지는 것이다.
붉은 화관을 둘러쓴 새색시의 자태로
산중턱에 갸우뚱 기대 선 누리장나무
엄마는 구수한 콩고물 냄새라고 반기고
아이는 누린내가 난다고 손사래 치네.
-「누리장나무․2」 전문
한편 마편초과에 속하는 ‘누리장나무’는 “붉은 립스틱을 덧칠하고 온갖 수벌들을 홀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끝끝내 돌아보게” 하기도 하고(「누리장나무․1」) “붉은 화관을 둘러쓴 새색시의 자태로 산중턱에 갸우뚱 기대 선” 모습이기도 하다. 누리장나무는 개나무, 노나무, 깨타리 등으로 불리고 냄새가 고약하여 ‘구릿대나무’라고도 한다. 시인은 이와 관련하여 “엄마는 구수한 콩고물 냄새라고” 반기는 것과 달리 “아이는 누린내가 난다고” 손사래를 치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연의 이야기를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시인의 시선이 섬세하고 따뜻하다.
여름 해질녘, 붉은 화장솔로 단장한 여인이 가지 끝에 홍등을 단다.
태양의 수신호에 공작의 나래처럼 펼쳐진 잎들, 낮을 접어 오므린다.
홍등의 꽃술이 바람을 부르고 짝을 맺은 잎들의 밭농사가 한창이다.
첫 꽃이 피면 팥 씨를 심고, 자귀꽃이 만발하면 팥 농사가 풍년이다.
외양간에 매어놓은 황소가 좋아하는 쌀밥나무 밤새 조록조록 영근다.
신혼방 문살에 다리를 걸치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자귀가 신랑을 닮았다.
달달한 참외 향이 코끝을 간질여 홍등이 열병을 앓는 열대의 밤이다.
-「자귀꽃」 전문
자귀나무는 해가 지고 나면 펼쳐진 잎이 서로 마주보며 접혀진다고 해서 부부금슬을 상징하는 합혼수, 합환수로 불리며, 이런 이유에서 산과 들에 자라는 나무를 마당의 정원수로 많이 심었다고 한다. 이 시는 이러한 나무의 유래나 배경 이야기에서 이미지가 발현된다. “해질녘, 붉은 화장솔로 단장한 여인이 가지 끝에 홍등”을 달고 홍등의 꽃술이 바람을 불러 잎들은 짝을 맺는다. 자귀꽃이 만발하면 농사가 풍년이라 한다. 소가 잘 먹는다 하여 소쌀나무라고도 하는 자귀나무. “코끝을 간질여 홍등이 열병을 앓는 열대의 밤”이 풍요롭다.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 명자가 숨죽이고 서 있네.
개불알풀 고개 들어 노을빛 명자와 눈을 맞추네.
더부살이 골방처녀 늘어진 어깨가 속울음 우네.
명자 눈물방울이 개불알풀 초록 심장을 뒤흔드네.
개불알풀 괴발개발 쓴 연서, 명자 붉게 꽃물 드네.
-「명자, 명자꽃」 전문
이 시에서 장미과에 속하는 명자나무는 ‘장미’와 ‘명자’라는 이름으로 여성성을 상징한다.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 숨죽이고 서 있는 명자꽃이 속울음을 울고 있다. 명자의 눈물방울이 뒤흔든 것은 “개불알풀 초록 심장”이다. 연모의 마음을 담아 쓴 ‘개불알풀’의 연서에 명자 꽃이 붉게 물들고 있다.
후미진 역전 골목에 연분홍 배롱나무 꽃이 피어 있다.
정오의 태양이 보내온 자외선 피톨에 탱탱해진 사내들,
핫팬츠에 착 달라붙은 연분홍 나시 입은 배롱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이 거시기를 데인 듯 따갑다.
다가가서 오빠야, 팔짱을 끼자 화들짝, 감은 손을
벌레처럼 떼어내고 생각을 털어 골목으로 사라진다.
사내의 뒤통수에 대고 큼지막한 감자 한 방 먹이고
너 씨 없는 수박이지. 에이, 개나 줘라.
메롱, 혓바닥을 내밀며 흘깃 눈치를 살핀다.
태풍이 지나간 후, 뭇 사내들만 보면
배롱배롱 혀 내밀던 연분홍 꽃이 지고 없다.
-「배롱나무 꽃잎 지다」 전문
명자나무나 배롱나무는 정원이나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이다. 사람들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연을 그리는 시인은 배롱나무의 한들한들한 흔들림을 보고 있다. 지나가는 사내들을 유혹하는 연분홍 배롱나무꽃. 뿌리치고 사라지는 사내들의 뒤통수에 “메롱, 혓바닥을 내밀며 흘깃 눈치를 살피”던 배롱나무. 뭇 사내들만 보면 “배롱배롱 혀 내밀던 연분홍 꽃”이 이제는 모두 떨어지고 없다. 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을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해서 ‘간지럼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하늘거리는 배롱나무의 잎에서 뭇 사내들을 유혹하는 여인의 몸짓을 그려내는 이 시는 자연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과 관련지으려는 시인의 시선이 잘 녹아나고 있다.
3.
해바라기도 지고,
달맞이꽃도 지고,
별똥별마저도 떨어지고 나면,
나는 아버지에게로 간다.
아버지, 눈에 가득 일렁이는,
해와 달을 품고 나를
따뜻한 등 내밀어 업어주신다.
나 아버지 등에서 중얼중얼
시를 쓴다.
-「시를 쓰는 일」 전문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하늘에 낚시를 드리우고 바람을 낚는” 것과 같다. “해바라기도 지고” “달맞이꽃도 지고” “별똥별마저도 떨어지고 나면” 시인은 아버지를 찾는다. 삶에 거듭되는 좌절과 시련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찾아가는 곳. 그곳은 바로 아버지이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눈에 가득 일렁이는 해와 달을 품”은 아버지는 따뜻한 등을 내밀어 시인을 업어주시는 것이다. 시인의 시는 이러한 따뜻한 아버지의 ‘등’에서 피어난다.(「시를 쓰는 일」)
심장에 이식한 포자가 발아한다.
남자는 생간을 떼고 익은 간을 달았다.
연탄화덕에 등을 지지고 있는 생선을 뒤집는다.
가스가 새어나오는 연기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남자, 하늘에 낚시를 드리우고 바람을 낚는다.
남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이가
유독 자기를 닮은 남자에게
바람을 낚지 말라, 말씀한다.
먼저가신 아버지, 할아버지도 지키지 못한,
또 한 명의 남자도 지키지 못한 그 말씀이
하늘공원 가족 봉분을 사부작사부작 거닌다.
-「그 말씀」 전문
도시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친근하고 낯익은 자연의 풍경을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이외현의 시쓰기는 “바람을 낚는” 행위와 다름 아니다. “하늘에 낚시를 드리우고 바람을 낚는” 남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남자. 이 남자는 자신을 닮은 남자에게 “바람을 낚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한 남자 또한 지키지 못한. “아버지, 할아버지도 지키지 못한”. 비록 허망한 행위일지라도 “바람을 낚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록 “하늘에 낚시를 드리우고 바람을 낚는” 행위라 해도 이외현은 시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눈에 가득 일렁이는 해와 달을 품”은 아버지의 따뜻한 등을 만나는 길이며 또한 사람들과 자연 사이에서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도시의 삶과 자연을 언어를 통해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빚어내는 시의 향연이라 할 수 있다.
**약력:문학평론가. 2003년《시와 세계》로 등단.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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