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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최정/동인천에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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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최정
동인천에서
아빠가 되어 앞머리가 다 빠진 동기와
살이 좀 붙어 중년 티가 나는 선배와
연애를 포기한 후배와
줄지 않는 술잔을 들고 옛날처럼 앉아 있다.
세상은 감쪽같이 우리를 속였다.
도망치던 골목길을 쳐다본다.
최루가스 눈물콧물 범벅되어 뒷걸음만 쳤다.
무서웠다고 고백하지 못했다.
부러진 깃발을 들고
우리가 감쪽같이 세상을 속였다.
함부로 희망 따위를 말 하는 게 아니었다.
각자 택시를 잡아타고 총총히 흩어진다.
새벽 별 하나, 겨우 갈지자로 따라온다.
갑을 관계
나에게 갑은 날씨이다.
가물면 웅덩이 물 퍼 나르고
폭우가 쏟아지면 배수로를 낸다.
나에게 갑은 풀과 온갖 벌레들이다.
고추에는 진딧물이 극성이고
톡톡이가 배추 이파리에 숭숭 구멍을 낸다.
풀을 뽑다가 지치면 갑이 자라게 둔다.
갑들의 횡포에 어리석게 저항하지 않는다.
잊을 만하면 고라니가 들어와
양배추와 콩잎을 얌체같이 잘라 먹고 간다.
두더쥐는 잘 익은 단호박만 골라 파먹는다.
슈퍼 갑인 땅에게는 자발적 노예가 되기로 한다.
휴일과 특근 수당 정도는 가뿐하게 반납한다.
최저 생계비도, 4대 보험도 미련 없이 반납한다.
다만, 죽고 나면 한 줌 흙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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