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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책 크티릭/한명섭/낱말은 교환되고 시인은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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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한명섭
낱말은 교환되고 시인은 부활한다.
박장호, 이제니 시집
1. 실점하는 추격조에게도 희망이 있기를
- 박장호 시집, 『포유류의 사랑』,(문예중앙시선36, 2014.11)
내 시 속엔 시인이 없지만
자살한 시인이 행간을 걷는다고 나는 써보는 것이다.
인간은 상상을 하는 동물이어서
그가 죽기 전의 시인인지 죽은 후의 시인인지
매몰찬 독자는 내게 물을 것이다.
인간은 말을 꾸미는 동물이기도 해서
걷는 시인의 죽음도 죽은 시인의 걸음도 상상할 수 있다.
마음의 문법엔 시제 일치가 없고
내겐 독자가 없으므로 대답할 의무 없다.
(중략)
째깍째깍 장작 타는 소리 불 꺼지는 장작에 달라붙고
반짝이지 않는 생각의 별이 아궁이 속으로 쏟아진다.
흩어지는 안개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인의 손
살자, 오늘 만난 어제의 아내야.
살자, 내일 죽을 남편의 아내야.
개 한 마리 구워 먹고 쓸모없는 논의였다 하면
매몰찬 독자는 내게 물을 것이다.
개 같은 건 논의가 아니라
붉게 자라는 검은 머리털의 시인이 아니냐고.
비유의 경계는 편견뿐이고
마음의 마침표는 물음표뿐이어서
파티션에 가로막힌 개가 짖는다.
까만 털이 붉게 물든 개가 짖는다.
(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개」 )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면서 말을 꾸미는 동물이며, 마음의 문법에는 시제의 일치가 없다는 시행은 흥미롭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시인의 정의와 가까운 말이자 시론을 담아내고 있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내겐 독자가 없으므로 대답할 의무 없다’는 시행의 앞에는 매몰찬 독자가 질문을 한다는 시행이 배치되어 있어 의문이 생긴다. 시인들은 안개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살아가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무언가를 매몰찬 독자는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독자들이 미처 시선을 주지않은 무언가에 가 닿은 자들이 바로 시인이다.
‘파티션에 가로막힌 머리카락이 자란다./붉게 물든 까만 머리카락이 자란다.’의 시행을 ‘파티션에 가로막힌 개가 짖는다./까만 털이 붉게 물든 개가 짖는다.’와 연결지어 보자. 머리카락이 자란다와 개가 짖는다가 같은 위치에 놓여있고 ‘붉게 물든 까만’과 ‘까만 털이 불게 물든’은 동일한 의미라고 본다면 ‘머리카락이 자란다’와 ‘개가 짖는다’는 동일한 의미로 읽어야 한다.거기에 ‘붉게 자라는 검은 머리털의 시인’까지 연결해 본다면 이 시편에서의 ‘개’가 지칭하는 대상은 ‘시인’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편의 제목인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개’의 의미를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왜 시인으로 보이는 개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것인가? 아궁이로 쏟아지는 ‘반짝이지 않는 생각의 별’은 죽은 시인의 다른 이름이다. 아궁이는 좀 무리해서 생각해보자면 무덤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개는 시의 서두에 언급되는 ‘자살한 시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시 속에서 부활의 시인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살한 시인은 단순히 죽은, 죽은 후의 시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활한 시인이 걷는 시의 행간에는 ‘경제적 무장을 해제한 시인들이/말로 세운 안개의 건물 속으로 들어가/시대의 아픔과 개인적 정서의 소용과/미적 진보의 향방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말로 세운 안개 속에서도 시대의 아픔과 미적 진보, 개인적 정서를 논의한다는 것이 박장호 시론의 한 표현이 되는 것은 아닐까.
비닐로 칭칭 감긴 집에서
나는 살고 있네
이 집은 너무 투명해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네
집만큼 투명한 사람들이
상냥하게 동거해왔네
볼 수 없는 소리만 들릴 뿐
만질 수 없는 촉감만 느낄 뿐
나는 눈뜨고 있네
(중략)
섞여도 투명한 것들은 투명할 뿐
감각은 공포의 여백일 뿐이네
처음엔 투명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네
지금은 투명해서 온통 투명해 보이네
나 여기서 영영 죽고만 싶네 ( 「사랑의 집」 )
비닐은 투명하기 때문에 투과해서 반대편이 보인다. 그러나 한 겹은 투명하다고 하더라도 여러 겹이 겹쳐졌을 때는 다른 속성을 띄게 된다. 투명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투명하지 못함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투명이 강조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투명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해도 지나친 강조의 이면에는 무언가가 있다. 지나친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쉽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지만 사실 감각은 우리가 믿는 것만큼 완전한 것은 아니다. 시인은 ‘감각은 공포의 여백일 뿐’이라고 적고 있다. ‘볼 수 없는 소리만 들릴 뿐/만질 수 없는 촉감만 느낄 뿐/나는 눈뜨고 있네’는 눈을 뜨고는 있지만 무엇도 인지할 수 없는 화자의 상태를 보여준다. 사랑도 어떤 의도를 담고 언급하냐에 따라 애초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과는 전혀 다를 수가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 해서는 안 되는 시절을 살고 있다.
나는 나를 꼬였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꽃을 사고 있었다. 너에게 줄 꽃이었다. 나는 항상 빨간 꽃을 산다. 나는 빨간 꽃을 사는 내 모습에 빠져 나를 꼬였다. (중략) 나와 내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조차도 꼬이지 못한 나는, 살금살금 나를 쫓아가 나와 나를 슬쩍 바꾸어버렸다. 나는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너에게 줄 꽃을 손에 넣은 것이다. 킬킬
나는 나와 바뀌었다. 나는 꽃을 사고 있었다. 나는 항상 빨간 꽃을 산다. 나는 빨간 꽃을 사는 나에게 빠져 나를 꼬였다. (중략) 꽃을 받을 네가 없다는 걸 나는 모른다. 나와 내가 점점 멀어진다. 나는 또 빨간 꽃이나 사러 가는 거지 뭐. 기적처럼 내가 너를 만나길 바라면서. 끅끅
(「꽃을 든 남자」)
이 시 속의 화자인 ‘나’는 남자이며 꽃을 사서 드는 행동을 하고 있다. 시 전반부에서는 나와 나를 바꾸어서 너에게 줄 꽃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꽃을 받을 너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시의 제목이면서 화자이기도 할 ‘꽃을 든 남자’에게는 빨간 꽃을 선물하고 사랑을 얻어내야 할 ‘너’란 존재를 아직 마주치지 못했다. 화자인 ‘나’의 내면에서 벌어진 상황이 시의 내용인데 사실 우리가 사랑을 꿈꾸는 상황을 그려보면 시 속의 정황이 전혀 낯설지 않다. 상대의 마음을 얻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기 쉽다. 나의 취향 내지 선호를 위주로 할 때 사랑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았을 거라고 자위하지만 나를 제외한 타인들의 눈에 나의 변화는 이미 드러나버린 후이다.
3연전의 마지막 날입니다. 7회말. 관중이 하나둘 자리를 떠납니다. 오늘도 역전의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그동안의 패턴을 통해 우리는 알 만큼 알고 있습니다. (중략) 강판하며 바라본 더그아웃에서 골키퍼 출신의 감독이 타자 출신의 투수 코치, 투수 출신의 타자 코치와 내일 경기를 구상합니다. 스코어가 몇 대 몇인지조차 그들은 모릅니다. 우리 팀 타자들이 활약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잘 던지면 경기는 끝납니다. 상대 팀 타자들이 봐주지 않는 이상 우리가 못 던지면 경기는 지속됩니다. 죽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경기. 지는 전략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또다시 피안타. 난타당하는 우리를 눈앞에 두고 감독과 코치는 내일의 사령탑만 쌓아 올립니다. 차라리 원정 경기였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추격조원끼리는 마운드를 인수인계할 때 언젠가부터 글러브를 부딪치며 이런 말을 주고받았죠. ‘우리의 힘없는 직구가 낙차 큰 변화구가 될 경이의 순간을 위해.’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기는 우리의 홈구장입니다. (「실점하는 추격조」)
‘추격조’는 역전의 가능성이 남아 있고 역전을 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동반되었을 때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시 속의 ‘추격조’는 전혀 그런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 감독과 코치, 그리고 선수들까지도 승부가 이미 결정된 경기에 관심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실점하는 추격조」의 ‘추격조’는 이미 존재의 의미를 잃은 상태가 된다. 추격조들의 바람과는 달리 ‘힘없는 직구’가 ‘낙차 큰 변화구’가 될 경이의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시는 이렇듯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삶의 국면을 잘 담고 있다.
2. 낱말은 교환되고 너와 나는 둘이 아닌 하나다.
-이제니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2014.11)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중)을 보면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피는 꽃은 우리가 자신을 몰라본 것 만큼이나 우리를 모른다. 시집의 제목인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보면 우리가 우리를 모르는 상황은 관심없음을 의미한다. ‘잊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인가. (중략)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떨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중) 나 없이는 우리도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제니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많이 거칠게 적어보자면 단어 배열의 문제와 주체에 대한 문제의 두가지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 「나선의 감각 –목소리의 여행」에 나오는 ‘낱말은 교환된다.’,‘너는 이동한다. 나는 사라진다.’는 시행은 이제니 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비유없이도 시어들이 교환되고 병치되면서 차분하게 의미망을 짜 나가고 있다.
너의 이마 위로 흐르는 빛이 나의 이마 위로 흐르고 흘러 해는 지고 새는 가고 바람은 불고 구름은 떠돌아 언덕 위로 기우는 빛이 다시 너의 이마 위로 흐르고 흘러
언덕을 지우고 구름을 지우고 얼굴을 지우고 얼룩을 지우고 물결을 지우고 눈물을 지우고 해를 지우고 새를 지우고 바람을 지우고 기억을 지우고 다시 나의 이마 위로 흐르고 흘러
왔던 길을 돌아가듯 빛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의 이마 위로 흐르는 빛이 다시 너의 이마 위를 희미하게 물들이고
빛으로 바람으로 구름으로 나무로 번져나가는
언덕 위의 두 사람
(「너의 이마 위로 흐르는 빛」 전문)
위 시의 1연과 2연에서 보여지는 순환론적 태도는 모든 관계의 연결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3~4연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 존재에서 저 존재로 번져나가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너와 나는 다른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말의 뜻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말과 말 사이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상대적인 진리입니다.’(「모르는 사람은 모르게」 중)와 같은 시행들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시인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감이 먼 목소리로 너는 말한다. 이것이 내 사과다. 사과는 어둡구나. 사과는 부드럽구나. 부드러움과 미래는 가깝구나. 사과를 받은 내 마음은 고요하다. 사물들은 끝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사과 이전에도 사과 이후에도 한없이, 가없이, 동시에, 일시에, 간헐적으로, 산발적으로, 한 마음에서 한 마음으로 건너갈 때, 한 마을에서 한 마을로 건너가듯이, 영영 뒤돌아섰지만 다시 뒤돌아서게 될 겁니다. 어쩌면 다시 제대로 만나게 될 겁니다. 사과는 감이 멀었지만 우리는 감으로 다 알아들었다. 가장 순한 순간에도 가장 악한 악한이 될 수 있다. 아무도 누구도 너를 비난할 수 없다 오직 너 자신 외에는, 맺힌 것이 있었던 것처럼 너는 울었다. 매끄러운 곡선 위를 흐르는 하나의 물방울처럼, 울면 풀리는구나. 풀리면 가까워지는구나. 탁자 위에는 작고 둥근 것이 놓여 있었다. 흐릿하고 환하고 맑고 희었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이제 막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사과 이후에 문득 가까워진 감이 있었다. (「사과와 감」)
이 시의 제목만 볼 때는 과일인 ‘사과’와 ‘감’을 의미하는가 싶지만 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과’와 ‘감’ 모두 과일의 이름이 아니다. 사과와 연결된 다양한 서술어들을 잘 배치함으로써 시인은 사과의 길을 열어준다. 사과는 그 길을 통해 가까워진 감을 획득한다. 사과와 감은 서로 연결할만한 특징은 없지만 사과에 다양한 서술어를 조합함으로써 결국 사과를 더욱 선명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인의 배려가 부드럽다. 시인은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검은 것 사이의 검은 것. 모든 문장은 모두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똑같은 낱말이 모두 다 다른 뜻을 지니듯이’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중)라고 적고 있다. ‘똑같은 낱말이 모두 다 다른 뜻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문장은 모두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시행은 전하고 싶은 기의에 다양한 기표가 있을 수 있다는 다양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하며 주체의 문제에 왜 시인이 천착하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주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전하고자하는 기의가 선명해질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명섭 : 소설가, 2009년 계간 『서시』로 등단, 현재 가천대, 동덕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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