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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미니서사/박금산/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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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서사
박금산
눈사람
폭설이 내린 후 날이 포근했다. 아이야 놀자. 아빠가 말했다. 눈사람 만들어요. 아이가 말했다. 그런데 배가 고파요. 아이가 덧붙였다. 아빠는 아이의 뺨을 쳤다. 내 책임인 듯이 말하지 마. 아빠가 말했다.
나를 굴릴 수 있겠니? 아빠가 눈밭에 누워 말했다. 아이는 침을 뱉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깨끗하나 그 구멍에서 나오는 것은 더럽다. 성경의 구절이었다. 아이는 기도했다. 이 사람이 내게 사과하도록 해 주세요. 신이 응답했다. 네 아비가 사과하면 너는 아비에게 너를 낳은 죄를 물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과를 허락할 수 없다. 아이는 침을 뱉었다. 입에서 나온 것이 눈을 녹이며 점으로 변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더러운 건 시간이다. 정말? 아이는 배가 고팠다.
말아 볼게. 아빠가 말했다. 아빠는 공벌레를 흉내냈다.
그래도 못 굴려요. 힘이 없어서. 아빠는 공벌레 자세를 풀었다. 서서 눈을 털었다.
눈사람 만들어요. 아이가 말했다.
누워 봐. 아빠가 말했다. 아이가 누웠다. 눈이 차가웠다. 몸을 웅크렸다. 공벌레처럼 몸이 말렸다. 이렇게 굴려보란 말야. 아빠가 말했다. 그는 아이를 굴렸다. 아이의 몸에 눈이 엉겨붙었다. 아빠는 눈으로 커다란 공을 만들었다. 아이는 회전했다. 배고파요. 말이 눈을 뚫지 못했다. 아빠는 속도를 탐닉했다. 작은 힘에도 공은 굴러갔다. 아빠는 몰입했다. 거대한 눈사람의 일부를 만들어 놓고 땀을 닦으며 아이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신이 들었다. 얘야, 춥지. 아빠가 꺼내줄게.
꺼낼 수 있을까. 죽은 아이를 꺼낸다면? 아빠는 두리번거렸다. 공을 밀어서 굴렸다. 비탈 앞에서 그는 공에 힘을 가했다. 눈덩이에 가속도가 붙었다. 아빠는 뒤로 돌았다. 자기가 누웠던 눈밭으로 돌아갔다. 손을 호호 불며 아이의 발자국을 덮었다.
*박금산 : 소설가. 1972년 여수 출생.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고려대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소설집 『생일선물』, 『바디페인팅』,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 『존재인 척 아닌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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