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58호/연재산문 3/이경림/50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5,744회 작성일 15-07-13 12:58

본문

연재산문 
이경림 

여행


 때로 生은 설명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어리둥절, 서 있는 자신을 당황스레 바라보게 하기도 한다. 마치 타인처럼. 아니 그 때 그는 분명 타인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국의 한 도시에서 노랑머리 파란 눈을 가진 마리엔를 만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리고 思慮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리며 깊은 믿음의 눈길을 던지고 있는 그 때의 나도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라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운명처럼, 나는 매일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모퉁이 엔틱샵 유리 너머로 이방인인 나를 기다리고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그녀를 따라 오랜 이웃을 찾듯 들어가곤 했다. 
 우리는 띄엄띄엄 이야기 했다. 그 날 읽은 책에 대하여, 날씨에 대하여, 태국 음식을 맛있게 하는 식당에 대하여, 며칠 후 있을 여행에 대하여...... 
 그날도 그녀가  
-이번 일요일에 제키와 센디에고에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겠어요?
하고 물어 왔을 때 나는 처음 무슨 뜻인지 몰라  
-홧?
하고 되물었다. 그는 웃으며 주말에 있을 가까운 여행에 동참해도 좋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정말 그래도 좋아요?
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그는
-물론, 그러나 우린 먼 길은 운전 하지 않아요. 기차를 타죠. 유니온 스테이션에서 암트렉을 타면 2시간 반 정도 걸려요. 오션 사이드란 역에 내려야 하죠. 거긴 종점 이예요. 해변이 참 좋아요. 날씨가 좋으면 낚시도 할 수 있죠. 잠깐 놀다 올 수 있는 곳으론 마주 적당한 곳이죠. 함께 가고 싶으면 이번 금요일에 내가 당신 아파트로 데리러 갈게요. 
 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니 우린 마치 어릴 때 친구 같군요.
 그녀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거리에 어스름이 도착해 있다. 어스름을 따라 걷는다. 부드러운 바람이 가만히 자켓의 앞섶을 만지며 지나간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어스름 속에서 비로소 또렷해지는 것들이 있다. 산등성이에 문득 솟아오르는 몇 그루의 싸이프러스, 점멸등과 함께 반짝이기 시작하는 집들의 아우트라인, 아기자기한 가게들, 그 사이 혈맥처럼 흘러가는 헤드라이트의 행렬,조금씩 환해지는 상처, 그리고 슬픔......       
 그녀의 제안을 되뇌어 본다. 여행......그것은 어쩌면 不可知를 향한 영혼의 날갯짓인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모든 길은 未知였다. 수없이 지나왔던 길도 다시 갈 때는 未知였다. 알고 보면 그때 그 길은 다시 가는 길이 아니라 그 때 그 순간 처음 가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지나온 적 없는 새 길이기 때문이었다. 태어난 이래 헌 것을 본 적은 없는 셈이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 태어나고 순간순간 사라진다. 오늘 오전 도서관으로 향할 때 내 앞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잿빛 개는 어디로 갔는가? 개가 사라진 그 길, 그 공기, 그 바람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 때 건너편을 지나가던 한 무리의 어린 학생들,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눈부신 빛, 그 때 내가 이고 섰던 그 도넛구름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 때 지나온 도너츠 가게, 그 때 지나온 바버 샵, 그 때 지나온 길모퉁이 공원 모두 그 때의 그것들은 아니다. 네거리 코너에 있는 이스람 교회는 여전히 뽀얗게 침묵하고 있지만 오전의 그것은 아니다. 그 옆의 제퍼니스 젠 센터도 맞은편에서 서 있는 팜 트리 몇 그루도 모두 그 때의 그것은 아니다. 보도 한 귀퉁이 동그랗게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몇 그루의 펜지 꽃 속에 반짝, 켜지는 점멸등처럼. 조명등처럼. 그 모두 순간이 꺼내놓는 작고 눈부신 것들이다. 모두 여행 중이다. 한 발 떼어 놓는 이 일이 알 수 없는 이 여행의 시작이며 끝이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한 별에서 불쑥 생겨나 살고 병들고 사라지는 이상한 여행의 가운데다. 죽음 ? 그것이야 말로 두렵고도 흥미진진한 여행의 시작이 아닐까. 문득 여행이란 시 한편이 떠 오른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 여자도 첫 키스도 첫 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얼마나 눈부신가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 번 똑딱 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햇빛, 첫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 터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을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빗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로
책상도 의자도 걸어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의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대도 한곳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은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곳으로 여행 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가지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더라도  
                               (여행 이진명)
 
그러나, 어쨌든 여행은 설렌다.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아서 눈부시다. 첫 키스처럼, 첫 애인처럼.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가슴이 모자란 자들.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 목적도 없이 방향도 없이 무작정 내달리는 자들.      
   
그날 저녁, 마리엔과의 여행계획에 대해 이야기 하자 a는 
-진짜? 그 사람들과 같이?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할머니와 엄마가 그렇게 빨리 친해지게 한 것이 뭐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에게 나는.
-글쎄...... 비슷한 나이? 외로움? 무엇보다 여자라는 게 공통분모가 되었나? 
아, 좋아하는 책? 도서관?....... 뭐 그런?
-글쎄...... 나이 들면 그렇게 되나? 
-그렇게 되는 게 어떻게 되는 건데?
내가 시비조로 묻자
-조건 없는 무장해제.
-라잇
 내가 검지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정확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러고 보니 나이 드는 일도 나쁘지 않은 것 같네. 경계가 없어진 거잖아. 그게 진짜 자유네? 회사 ,집, 거래처, 비지니스, 직원관리......뭐 그런 시시하고 복잡한 것에 시달리다 보면 이따금 온 몸을 고무벨트로 조이고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히기도 해. 그럴 땐 흘러내린 실크 스카프처럼 주름이 조글조글한 얼굴로 기다란 핑크빛 니트 원피스를 입고 느릿느릿 공원을 산책하는 할머니들이 부럽기도 해. 
-늙는다는 건 편안해지는 거야.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중얼거린다.
-아아, 이 끝없는 프리젠테이션!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으으 이 아이들은 왜 아직 안 오지? 
중얼거리며 그녀가 셀폰을 집어 들었다.

책상

또 한 아침이 오고 습관처럼 부정맥이 왔다. 놈은 대책이 없다. 불시에 불쑥 불쑥 자신의 존재를 들이민다. 내 안의 어느 먼 곳이 구불텅 구불텅 기어오는 것을 속절없이 보고 있는 듯한 공포를 데리고. 
그리고는 몇 초간 심장을 틀어잡고 급박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벼랑 위에 서 있는 듯한 공포가 전신을 꽁꽁 얼린다. 누웠다 앉았다 놈을 달래느라 쩔쩔 매다보면 알 수 없는 치욕감이 전신을 휩싼다. 이렇게 벌벌 떨며 잡고 있는 것이 무언가?  삶과 죽음이 양 다리 사이를 흘러가는 시궁물 같다. 
 일단 오늘 도서관에 가는 것은 무리다. 천천히 일어나 아이들의 방을 정리 한다. 
책상 둘과 그 위에 컴퓨터 이 쪽 저 쪽에 하나씩 놓인 싱글침대가 가구의 전부다.
데니의 책상 위에 메모장만한 노트가 펼쳐져 있다. 며칠간의 스케줄이 띄엄띄엄 보인다. 

3-5시 Board riding. 
5-9시 Study at lewis,s hous  
math **
Labo Science **
.......

**로 정리 해 놓은 곳은 좀더 신경을 써야할 과목인 것 같다. 열일곱 사춘기 소년의 고민치곤 너무 단순하다.  그는 지금쯤 학교가 짜 놓은 스케쥴을 소화하느라 바쁠 것이다. 
 여기 저기 뱀허물처럼 벗어 놓은 피곤한 일상을 주워 세탁 바구니에 넣는다. 맞은 편 티모티의 책상을 본다. 구석에 Timothy라 쓰인 사진 하나가 덮게 유리 속에서 웃고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그저 텅 빈 평면이다. 울컥 목이 멘다. 어린 그의 방황의 시간이 이 텅 빈 평면 위에 추상적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이 사각의 평면 속 어느 미로에 지금 그는 있을 것이다. 사흘 째 노스 할리우드에 있는 친구 집에서 돌아오지 않는 그가 보고 싶다. 유리 속에서 언제나 웃고 있는 그는 어디로 갔나. 구리 빛 건강한 얼굴에 보조개가 매력적인 소년 티모티.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이 사각의 무한 속에 감춰진 무서운 역동성으로부터 잠시 도망친 것인가? 그 속에 감춰진 未知의 엉뚱한 얼굴들을 미처 상상조차 못한 채. 
 맨 처음 내가 만난 책상이 생각난다. 일곱 살 때쯤, 할머니가 목공소에서 짜다주신 앉은뱅이 책상이었다. 그 무렵의 아이들에게 가장 설레는 일은 입학 날을 기다리던 일. 우주만큼이나 커 보이는 운동장, 기차처럼 기다란 건물 속에서 울려 퍼지는 합창 소리,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 와그르르 유리창으로 쏟아져 나오는 웃음소리, 일곱 살 계집아이의 밤잠을 설치게 하기에 충분했던 그것들...... 교실 창밖에서 깡충깡충 뛰며 잠깐 씩 넘겨다 본 교실에는 처음 보는 언니 오빠들이 책상 앞에 앉아 뭔가 대단한 것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이로 키가 훤칠한 선생님이 책을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 때 그것들은 어떤 光輝에 싸여 아득하고도 신비로웠다. 아마도 학교를 그리워하게 하게 된 첫 번 째 원인도 책상이었던 것 같다. 그 앞에 앉으면 어딘가 눈부신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갈 것 같은! 
 그러나 막상 입학을 하고 보니 3학년까지는 책상이 없었다. 횅한 교실에 달랑 교탁 하나가 놓여 있을 뿐. 그 앞에서 육십 명이 넘는 아이들이 줄줄이 앉아 바닥에 책을 놓고 영이야 놀자, 철수야 놀자,를 썼다. 어느 날 선생님은 가로 세로 높이를 정해주고 각자 그 규격에 맞는 앉은뱅이책상을 만들어오라 하셨고 그 며칠 후, 조금 조금 다른 색깔과 모양의 책상들을 이고 들고 어머니, 아버지들이 학교에 오셨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 책상에 이름을 쓰고 나름의 표시를 하느라 부산한데 나의 책상은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무리에서 밀려난 어린 짐승처럼 슬퍼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는데 누가 소리쳤다
‘저기 니 할매 온다’  
 아아 생각난다. 허리가 꼿꼿하고 키가 훤칠한 나의 할매가 목공소에서 갖 짠 노란 책상을 이고 흰 광목치마를 펄럭이며 컴컴한 복도를 가로질러 오던 모습이! 그때 그것은 한줄기 빛이었다. 안동 자취방에 놓여있던 4인용 밥상도 나를 스쳐간 몇 개의 책상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다. 그 때 나는 13살이었다. 문경에서 안동으로 유학을 하게 된 나는 법상동이라는 마을에 서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산 살림살이 중 하나가 중 하나가 그 밥상이었다. 그 때 그것은 유일한 나의 책상이며 밥상이었다. 생전처음 부모 품을 벗어난 사춘기의 소녀는 그 앞에서 더듬거리며 낯선 이국의 말을 익혔고 테스라는 한 순결한 여인을 만났다. 이광수의 무정을 만났고 김동인의 감자를 만났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만났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만났다. 밥상이 되기전 그저 보자기만 널빤지였을 뿐일 그 밥상은 내게로 와 時空을 초월한 4차원의 어느 공간이 되었다. 그 위에서 나는 무수히 많은 죽은 사람들을 만났고 무섭고도 눈물겹고 신비로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 갈라놓을 수 없는 언어의 위대한 힘에 눈뜨기 시작했다. 
 서울로 이사한 우리가족이 안암동 목사관에 세 들었을 때의 기억이다. 한 방에 일곱 식구가 이리저리 비집고 잠을 자야 하는 때라 책상 같은 사치스러운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때 고3이었던 나는 매일 교회 뒤란에 있는 언덕에 교인들과 목사님이 손수 파 놓은 토굴기도실에서 도둑공부를 했다. 30촉 전구가 덜렁거리는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밑에 놓인 서너 개의 긴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엎드렸다 하며 어부사시사를 외고 미적분을 풀었다. 어떤 날 그 위에서 깜박 잠이 들면 새벽기도 나온 목사님이 흔들어 깨우며 ‘기도 그만하고 들어가 자거라’ 하고 농담을 하시기도 했다. 그 후 목사님은 내게 결혼한 아드님이 쓰시던 방을 공부방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 그 방, 목사님의 아들이 쓰던, 길이 반들반들 난 책상에서 나의 고 3 후반기가 지나갔다.     
 生은 어느 광대무변한 책상 위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은 무한이라는 책상 앞에서 누군가 꿈으로 빚어낸 홀로그램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시를 쓴 적 있다

아버지는 늘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백열등 불빛 아래 원고지 빈 칸이 끝이 없었다. 
그는 일생 거기에다 자신을 쓰고 지웠다 
그는 그 자신을 팔아 쌀을 사고 자식들의 신발을 샀다
그의 손으로 팔아치운 자신들이 얼마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이따금 그는 꿈에 자신들의 동창회에 다녀왔노라고 , 불길한 
꿈이라고 이마를 찌푸리곤 했다.
어느날 나는 팔려간 수천명의 아버지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빈 원고지 칸에다진짜 아버지를 써 넣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아버지의 등에는 희고 투명한 날개가 돋아 있었다.
                                 <작가> 이경림   
 
*안개 그리고 모래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키는 갑자기 몸살기가 있어 못갈 것 같다고. 우리 둘이 가도 괜찮겠느냐고. 나는 상관없다고 했고 그녀는 10시 쯤에 우리 집 앞으로 오겠다고 번지를 정확하게 찍어달라고 했다. 나는 조그만 외출용 가방에 상비약과 지갑 등 사소한 것들을 챙겨 넣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의 빨간 승용차는 정확하게 10시에 도착했고 우리는 유니온 스테이션으로 가는 메트로를 타려고 노스 할리우드 역으로 갔다. 그녀가 공영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는 동안 나는 노스할리우드 역 앞 광장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검고 희고 누런 온갖 인종들이 노랑 빨강 검정 색깔의 머리칼을 제멋대로 늘어뜨리고 종종종 지나갔다. 열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햇빛은 따가웠다.   
 ‘오케이, 레츠 고우’
그녀가 역사 안을 가리키며 앞장서 가더니 표를 사는 곳에서 내게 물었다 
 - 당신 68세 맞죠? ’ 
 -맞아요 왜요?’ 
하고 묻자
-할머니는 할인이 되거든요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건 우리나라도 같아요 아니 우린 무료예요”
하자 
‘오우, 정말? 우린 50프로예요’ 
했다. 그리고 지하철 노선도 앞에서 손가락으로 레드라인을 가리키며 
“노스할리우드에서 유니온스테이션은 레드라인의 처음과 끝이예요. 30분 정도 걸리면 되죠”
하고 말했다, 우리는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사실 그 때 그녀는 la의 지하철을 타고 있었고 나는 서울의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센디에고로 가는 기차 암트렉은 자줏빛 이층 기차였다. 평일이라 그런지 텅 빈 객차 안에 창 쪽으로 띄엄띄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의 맞은편 좌석에 앉으며 이렇게 앉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기차가 출발했다. 
 한 마을을 천천히 밀어내며 기차가 간다. 동화 같은 집들, 거꾸로 세워놓은 빗자루 같은 야자나무들, 휘어지고 갈라지고 다시 만나며 결코 끝을 보여주지 않는 길들, 그 사이를 오고가는 사람, 개, 날짐승들이 천천히 밀려가고 천천히 밀려온다. 끝이 없는 해변을 옆구리에 끼고 기차는 달린다. 한 무리의 파도가 물개 떼처럼 굼실거리며 밀려와 흰 포말로 부서지고 , 한 무리의 구름이 물끄러미 지나가는 것을 차창으로 보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문득 그녀가 
-참 아름답죠? 
하며 차창 밖을 가리켰다
건너편 좌석에는 한 청년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입구 쪽에는 한 쌍의 부부가 조용조용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레일은 센디에고에서 시에틀 까지 뻗어 있어요. 아마 더 멀리 갈 수도?
그는 분명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위 쪽이라면? 하고 생각 하는데 문득 케나다가 생각나고 알라스카가 생각나고 케나다의 그악스럽도록 울창한 삼림 속을 천천히 달리는 기차가 생각나고 알라스카의 빙하가 생각나고 뽀얀 설원 위를 쥐죽은 듯 달리는 기차가 생각나는데 그녀가 또 말했다
-어릴 때 나는 동양의 여러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꿈이었죠. 동양은 나에게 왠지 신비롭고    환상적인 곳으로 생각되었죠. 중국, 일본, 인도, 스리랑카,......
그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었다.
-코리아는 사실 잘 몰랐어요. 지금도 일본이나 중국 같은 곳일 거라고 짐작할 다름이죠.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 그렇기도 하구요. 그러나 어느 나라든 그 나라만의 어떤 것이   있죠. 캐나다와 아메리카가 다르듯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데 그 어느 나라도 가보지 못한 채 예순이 넘었군요
 그녀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두 시간이 조금 넘어 기차는 오션 사이드 역에 도착했다. 해변은 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였다. 겨울인데다 평일이어서 해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해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야자나무 너머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들이 일제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노인이 바다 쪽으로 난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갈매기 몇 마리가 파토 타기를 하고 있었다. 야호! 한 젊은이가 파도 위에서 보드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바다 가운데로 길게 놓여진 나무다리를 따라 걸었다. 바다 속으로 낚시 줄을 드리우고 앉은 사람 중 하나가 황급히 릴을 감아올리고 있었다. 그 끝에서 팔뚝만한 고등어가 퍼득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마리엔이 즐거운 듯 소리쳤다
- Mackerel! 저기 보세요!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낚시 하고 싶어요?     
하고 물었다.
-아니요. 그냥 저 끝 까지 가보죠
- 그래요 저 끝에 레스토랑이 있어요. 차도 마실 수 있죠.
오후 두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연어 셀러드와 야체 수프 그리고 치킨 헴버그를 먹으며 우리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문득 그녀가 묻지도 않은 말을 불쑥 뱉었다.
-난 아들 하나만 있어요. 알라스카에 살아요.
- 알라스카? 거기서 뭘 하나요?
내가 놀란 듯 묻자 그녀는 웃으며 
-거기도 여기나 똑 같아요. 그 아인 석유회사에 있죠.
 하고 대답하며
- 당신은 자식이 몇?
-아 나는 셋 이예요. 모두 결혼 했죠.
-남편은?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 두 남자와 살았죠. 그 애 아빠와는 일 년 정도 살았어요. 그가 떠난 뒤에 나는 그 아이를
가진 걸 알았고 그 남자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난 사실 남자보다 아이가 갖고 싶었거든요.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 
 그 아이가 여섯 살 때 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죠. 할리우드에 있는 영화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죠. 우린 많이 사랑했지만 아이는 없었어요. 그와 6년을 같이 살았죠.
그는 한 무명의 여배우와 사랑에 빠져 떠나갔어요. 난 사실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여자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내 속에 있는 남자에 대한 혐오감이 그들을 밀어 냈는지도 몰라요. 
그래요 혐오감! 그는 Aversion의 v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밀려오는 바람에 주위가 시끄러워졌고 우리는 서둘러 점심을 끝내고 해변으로 나왔다. 
 날이 흐려지려는지 바다 쪽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날이 흐려지는 것 같아요 돌아가야 할까요?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그는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여긴 저러다가 금방 해가 나요 별 문제 없어요.
하고 괜찮다는 듯 두 손을 활짝 펴 보였다. 
- 저 쪽 끝으로 걸을까요? 
우리는 그가 가리킨 쪽을 향해 걸으며 천천히 이야기 했다
-.왜 남자에 대한 혐오감이? 
- 내가 더듬거리며 묻자 그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사실은 어려서 성폭행을 당했어요. 상대는 의붓아버지......케네디언 이었는데
 아무튼 그 후 남자가 싫었어요.  

바다가 점점 캄캄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파도가 밀어 닥칠 듯 이상한 기운이 해변을 휩싸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한 젊은 남녀가 두 팔로 자신들의 키만큼 크게 모래 구덩이를 파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저 끝을 향해 걸었다. 얼마 쯤 가다가 밑도 끝도 없이 그녀가 물었다
-행복하세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사는 거죠. 사실은 조금 전 당신이 말할 때 깜짝 놀랐어요.    어릴 때 상처가 너무 같아서요.
그녀는 놀랐다는 듯 되물었다.
-상대는? 
-당신과 비슷해요. 친척 아저씨.
나는 소실 할머니가 데리고 온 아들이라는 말이 너무 복잡해 말할 염도 못내고 얼버무려 버렸다. 사실 그 모두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의 입에서 불쑥 아홉 살 어린 날의 그 끔찍한 상처가 튀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 그 일은 나의 미래를 송두리 채 앗아 갔죠.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는 끝없이 말했죠
  정조를 잃어버린 더러운 여자들은 살 가치가 없어. 그러니 정조를 생명처럼 지켜야 해
  더러운 여자가 된 나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었고 알 수 없는 콤플렉스에 끌려 다니다     아무하고나 결혼을 했죠. 아무하고나......  
나는 내가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중얼거렸고 그는 나의 말을 알아듣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기 앉을까요? 
아까 모래를 파던 젊은이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가 내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래 위에 손수건을 깔고 앉아 검은 안개가 휘도는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휘청이며 파도 위를 휘돌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게 연막을 치고 있는데 문득 돌아보니 아까 그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판 구덩이에 서로 엉켜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웃으며 
- 저게 사랑이죠 자신들이 파 놓은 모래 구덩이에서 엉켜 사랑하고 미워하고 서로의 목을    조르다가 제가 판 구덩이에 묻혀 죽는 것?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깔깔깔 웃었다. 나도 웃었다.
-저기 봐요 검은 안개가 걷히고 있잖아요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거짓말처럼 눈부신 햇빛이 안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눈부신 바다, 흰 갈메기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파도......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아아 이 눈부신 햇빛
그녀는 자신의 숄더백을 배고 벌렁 누웠다. 우리는 그저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햇빛의 씨앗 같은 것이 허공에 흩부려져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모래들은 가만히 있었다. 조개껍질, 깨진 병조각, 말라비틀어진 해초들도 가만히 있었다. 모래처럼. 
바람이 지나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는 그것이 일 년 전의 바람인지 천 년 전의 바람인지 알지 못했다.   

    
*이경림 :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 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 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시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비평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영역시집 <A New Season Approaching, Devour it>. 2011: 제 6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