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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특집/시와 일상/김윤정/2015년 ‘지금・여기’의 일상성과 시적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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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와 일상
김윤정
2015년 ‘지금・여기’의 일상성과 시적 전망
0. ‘일상성’의 관점
우리가 시의 ‘일상성’을 말할 때 그것은 곧 오늘날 이 땅에서 펼쳐지고 있는 시의 사상적 사태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상성’은 단순한 ‘일상’과 달리 정치경제적 맥락에서의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시가 일상적 경험에 대한 미적 체험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포괄적 의미를 지닌다면 ‘일상성’은 근대 도시라는 문명적 배경 속에서의 인간 문제와 관련된다. 일반 서정시가 탈역사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보편성과 초월성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그 중 ‘일상성’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에 대한 구체적인 관점을 문제 삼는다. 때문에 그것은 경제 및 정치적 모순, 그리고 그로 인한 동시대 인간들의 소외와 분열에 대해 다루게 된다.
우리 시사에서 ‘일상성’을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모더니즘 시로부터 비롯된다. 이 시기 모더니즘은 최초로 전개된 근대 도시에서의 일상적 체험을 바탕으로 식민지인의 우울과 소외를 다룬 바 있다. 김광균의 비애의 정서, 정지용의 도시적 체험에 의한 불안의식, 이상의 문명 비판적 시들은 우리 시사에 거의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일상성’의 시들이다. 이들 모더니스트들은 보편적 서정의 정서와 달리 도시적 일상들에 대한 구체적 체험들과 그로부터 비롯된 부정적 의식을 감각적인 언어로 형상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일상성’의 키워드는 일제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된 근대문명에 대한 성찰과 도시적 환경으로 인한 감수성의 측면을 전제하면서 주체들의 갈등과 비전을 조망하도록 해준다. 이 점에서 ‘일상성’의 의미는 역사철학적 사유와 관련된다. ‘일상성’이 항상 당대적으로 말해져야 하고 바로 지금의 사태와 관련지어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일상성’의 의미는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지금・여기’의 양태와 이로부터 꿈꿀 수 있는 비전은 무엇인가?
1. ‘세월호’와 권력의 정치학
2015년 사상적 사태로서의 ‘일상성’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단연 ‘세월호’ 사건이다. 세월호 사건은 일견 단순한 사고로 보이지만 그에 대응했던 정부의 태도는 우리나라 정치와 권력 전반에 관한 성찰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일상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하겠다. ‘세월호’ 사건을 둘러싼 각종 의혹과 정부의 비정상적 자세는 폭력으로서의 정치와 오늘날 주체의 역할을 새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 년이 흘렀습니다.
사람이 가라앉으면 물거품이 떠오릅니다. 부딪쳐야만 발생하는 것 앞에서 아무도 순순 히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물거품이 스러졌습니다.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순간, 가 라 앉아야 떠오른다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약이라는 약은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한숨을 아무리 쉬어도 숨이 막혔습니다. 바 닷속처럼 깊은숨을 쉬어도 숨이 가빴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은 두 손이 물거품이 되자 우 리는 모두 숨죽여 얼었습니다. 마음만 늘 법석였습니다.
일 년이 흘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있었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구조하겠습니다. 지 켜지지 못한 말과 지켜지지 않은 말이 있었습니다. 아직 아홉 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 고 여기,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가도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 법석입니다. 매일매일 안간힘을 쓰고 말하는 그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가 차 갑습니다. 사방이 차갑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내밀던 손을 잡지 못했습니다. 마음만 겨우 법석입니다.
일 년이 흘렀습니다.
일 년이 또 흐를 겁니다.
오은, 「법석이다」(『리토피아』, 2015년 여름호) 부분
미국의 언론은 ‘세월호’ 사건이 6.25 전쟁 다음으로 한국이 경험한 가장 참혹한 사건이라 논평한 바 있다. 물론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5.18의 참혹함도 잊을 수 없다. 광주 사태로 우리의 80년대가 들끓었고 온 국민이 고통받아야 했던 것도 기억할 수 있다. 광주 항쟁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결 성숙해진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도 그와 다르지 않은 아픈 사건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길 떠난 아이들이 도움의 ‘손’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실은 그들의 부모는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우리 모두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사건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있은 직후 어떤 이는 ‘일상이 요즘처럼 죄스러웠던 적이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온 국민이 슬픔에 빠졌고 3.1운동의 좌절 때나 있었을 집단 우울증이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이러한 의식과는 달리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집권 정부는 스스로 자신들이 ‘콘트롤 타워’가 아님을 주장했으며 사건 당시의 대통령의 행방에 대해서도 답을 회피했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지만 정부는 이를 역시 묵살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정부의 행태들 이후에도 여전히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또 다른 일상으로 이어진 일 년의 시간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그때의 사건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언급 자체를 꺼려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 주변에는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가도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처에 정직한 이들이 그들일 것이다. 진실의 당위성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이들의 일상은 아직도 죄스럽고 마음이 매일 편치 않다. 위 시의 화자는 이를 ‘법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한숨을 아무리 쉬어도 숨이 막’히고 ‘바닷속처럼 깊은숨을 쉬어도 숨이 가쁘’다고 토로한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이러한 일상을 심어 놓아버렸다.
이처럼 가슴 먹먹한 일상들을 보내면서 우리는 권력의 성격에 대해 되짚어 보게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정상적이고도 비가시적 방식으로 인간들에 대한 통제와 소외를 일으키는 폭력의 절대주체라는 점을 기왕에 알고 있었을지라도, 현재의 정부가 일관되게 조작과 은폐로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충격적이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민주주의의 기본적 공리마저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서 오늘의 권력의 근거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해 묻게 되었던 것이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및 부정 선거의 문제는 아직 건드려지지 않는 뇌관으로 남아 있거니와, 부정에 기반한 오늘의 집권 정부의 토대는 이미 허약할 대로 허약해져 있다.
아마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를 은폐시킬 또 다른 사건을 만들어내는 집권 정부로서는 ‘세월호’ 사건도 정상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나, 그러나 매일같이 이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들이 있다. 일상 중에서도 항상 ‘목울대가 뜨겁고’ ‘마음이 법석인’ 이들, 마음이 항상 죄스럽고 빚을 진 것처럼 편치 않은 이들이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것은 사태가 고요히 끝나고 안정을 되찾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모순과 아픔을 기억하는 자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이들이 존재하는 한 ‘세월호’의 문제는 역사의 무대로 재등장할 것이지 결코 뒤안길로 묻혀버리지 않을 것이다.
2. 실업과 절망의 일상성
오늘날 청년 실업률은 10%로 역대 최고치에 달한다고 한다. 대학생들이 졸업을 해도 취직을 할 곳이 없다. 그나마 있는 일자리의 질도 나빠서 계약직 등 비정규직의 비중이 이 중 30%에 육박한다고 전해진다. 3D 업종이나 비정규직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늘어나는 형편인데, 이들이 자력으로 결혼을 해서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2007년 같은 제목의 책이 발간된 후 오늘날 20대를 규정하는 용어가 된 ‘88만원 세대’는 우리 사회의 일자리 구조 및 소득 분배 양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만큼 정규직이 없고 알바나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이다. 입시 지옥을 거치고도 대학 졸업 후 비전이 뚜렷하지 않는 우리의 젊은이들은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에게 미래는 기다리는 것이 무언지 뚜렷지 않은 ‘고도Godot’처럼 모호하고 불투명하기 그지없다.
무소속
더 나은 시급과 연봉으로 건너가고자 했지만
결국 떠돌이였을 뿐.
우리는 소속이 없다는 뜻에서만
여전히 자유인이며
불안은 우리의 항상심이 되었다.
유연하게 갈아타기하고 싶었지만
우리는 믿음이 없는 신앙인처럼
우리는 여기에서 없고 그 어디에도 없으며
구원도 없고 심지어 절망도 없다.
러시 앤 캐시
우리는 대부시스템으로 살았다.
끌어 쓸 돈이 얼마간 있다는 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며
미래란 거기 잠시 있었다. UFO처럼
대부분 믿지 않지만 마치 잠깐 놀라기 위해서만 있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현승, 「고도를 기다리며」(『현대시』, 2015년 8월호) 부분
위 시의 시적 화자가 말하는 ‘무소속’은 곧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정체성의 한 국면이다. 그것은 곧 정규직 취업의 어려움과 관련된다. 알바와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는 이들에게 꿈과 희망은 관념 속의 추상어일 뿐이다. 자신의 적성이나 비전에 따라 소신껏 직장을 구하던 시절은 이들과 상관없는 과거적 추억이 되었다. 그저 조금 ‘더 나은 시급과 연봉으로 건너가고자 할’ 뿐, 이들에게 연대감이나 소속감과 같은 공동체적 의식은 없다. 그러나 ‘건너가기’도 여의치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계약의 종료는 ‘결국 떠돌이’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자유’란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아이러니한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상황은 IMF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정책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90년대 후반 IMF 극복 과정에서 기업인들 중심으로 재편된 경제 제도들은 기업인들에겐 혜택으로 작용한 반면 노동자들에겐 희생의 강요로 다가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정규직의 대량 양산 역시 이때 시행된 노동시장의 유연화 시책에 의해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안이 항상심이 된’ 화자의 내면 의식은 이와 같은 정치경제적 상황과 관련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야 계약 종료 즉시 다른 ‘계약’을 소망하겠으나 ‘유연하게 갈아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여기에도 없고 그 어디에도 없는’ 소외된 자아가 된다. 취업이 불안정한 젊은이들에게 결혼은 화중지병(畵中之餠)이다. ‘구원도 없고 심지어 절망도 없다’는 자조 섞인 말은 따라서 젊은 세대의 비명처럼 들린다.
이처럼 일자리 구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 세대들을 가리켜 ‘3포세대’, ‘4포세대’, ‘5포세대’ 등의 말들이 유행어처럼 떠돌기 시작하는 것도 ‘지금, 여기’의 주요 현상이다. 그것은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마련 등을 줄줄이 포기해야 하는 젊은 세대들의 세태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이는 오늘날의 청년 실업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의 경우 미래의 생활 자금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 가운데 60%가 빚이 있으며 이들의 평균 부채는 1320여만 원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이들은 대학 시절 등록금 부담을 위해 이미 빚을 지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위 시의 화자가 ‘우리는 대부시스템으로 살았다’고 진술하는 것은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이와 같은 사정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 앤 캐시’와 같은 대출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TV에서 버젓이 광고를 해대는 것은 오늘날 경제구조가 젊은 세대들에게 얼마나 악성으로 다가가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들에게 ‘미래’란 ‘끌어 쓸 돈이 얼마간 있을 때’의 ‘잠시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시의 화자는 토로하고 있다.
3. 도시인의 고독한 일상
근대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의 전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가장 특이한 사회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본이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단지 경제체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과 문화 현상까지도 탈바꿈시켰음을 의미한다. 고독하고 개인적인 인간성,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이기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문화 세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전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공동체 문화의 붕괴와 관련된다. 공동체 문화의 소멸이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인간의 삶을 팍팍하고 쓸쓸하게 만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건조하고 단절적인 인간의 삶의 모습은 도시인이 겪어야 하는 소외의 대표적 양태라 할 수 있다.
울음이 헤픈 한 마리의 매미로
소주 몇 잔 목덜미로 넘긴
지친 육신이 깃발처럼 흔들린다
날 선 오체투지의 밤사이로
아무렇게나 포함되어 버스에 오른
시든 웃음이 출구에서 뿔뿔이 흩어진다
어둠으로 채워진 세상을 짚고 일어선
가로등이 제 몸을 달구어 길을 밝히고
독한 매연의 꽁무니를 뒤쫓던 달빛이
등을 맞댄 의자 위에서 갈라진다
차들의 비명이 나뒹구는 횡단보도에서
헐벗은 어깨들이 취기가 도는 얼굴로
안전띠에 묶인 나를 입력된 칩에서 지우고 있다
이리저리 구겨진 봉투 속 붕어빵 몇 마리와
소리없이 안겨오는 아이들의 눈빛을 싣고
비탈길을 내 달리는 마지막 버스는
마치 버려진 여자의 음부처럼
독이 서린 향기를 뿜어 올리며 흑흑 거린다
허정은, 「집으로」(『시사사』, 2015년 7,8월호) 부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출근 전쟁을 치르고, 하루 종일 조직의 팽팽한 압박감에 눌린 채 업무에 시달리는, 그리고 해가 떨어진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퇴근하여 하루를 마무리하는 너무도 전형적인 일상은 도시인의 그것이다. 새벽 6시에 기상하여 저녁 8시에 퇴근하기까지 도시의 직장인의 일상은 실로 고단하고 힘에 부친다. 하루의 피로도 다 가시지 않은 채로 다시 하루를 시작해야 하고 밀려드는 업무들과 만남들에 부대끼다 보면 육신은 지칠 대로 지치고 에너지는 고갈된다. 그나마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도시 직장인들이 많이 있지만 받은 대로 투명하게 드러나, 있는 세금 없는 세금 다 바쳐야 하는 도시 직장인들은 이 시대의 노예나 다름없어 보인다.
위 시는 이러한 삶의 도시인의 초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지친 하루 ‘소주 몇 잔’으로 달래며 ‘깃발처럼 흔들리’는 도시 직장인들은 하루하루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덜컹거리는 ‘버스’, 힘없이 껌벅거리는 ‘가로등’, 자욱한 ‘매연’, 낡은 ‘의자’ 등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도시의 힘없는 일상들처럼 지쳐 보이는 도시적 사물들이다. 이들과 뒤섞이며 매일을 보내는 도시인들이라면 어느 구석에서라도 한 줄기 생생한 에너지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인간은 언제까지 버티며 살 수 있을까? 삶의 활력이 되는 에너지는 어디에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인가? 쳇바퀴처럼 무한히 돌아가는 일상의 반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간을 분, 초 단위로 균등하게 쪼개고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근대의 패러다임 속에서 도시인들이 호흡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도시적 환경이 인간에게 매우 반인간적인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여기에서는 인간이 타인 및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흐름의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텅 빈 고독한 자아가 있을 뿐 충만한 자아의 정체성이 감지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낙원이 될 ‘집’조차 ‘구겨진 봉투 속 붕어빵 몇 마리’처럼 작고 힘없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시에서의 쉼 없이 이어지는 일상은 인간을 끝도 없이 고갈시키며 이곳에서 인간은 주변과 단절된 채 건조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 위의 시는 도시인의 생태를 통해 도시적 환경의 부조리함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소외된 모습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4. 인간적인 일상의 성찰
오늘날 이 땅에서의 ‘일상성’은 근대 도시라는 문명적 배경 및 권력과 자본에 의해 몇 겹의 모순이 중첩된 복합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근대적 시공성을 기반으로 하여 현 정부의 통치 형태를 아우르는 중층적 성격을 띤다. 근대적 시공성이 인간성의 고갈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근대의 삶 속에서도 충만과 완성을 향한 일상을 창조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나아가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거대담론과 이성의 해체 경향에 따라 비판적 주체의 소멸을 목도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 및 초권위적 통치 체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새로이 결집하는 주체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엔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한 살림살이
하나밖에 없는 장롱도 채우지 못해
아이들은 그곳에서 숨바꼭질도 하곤 했다
곳간과 쌀독은 항상 헐렁했지만
허기 묻은 웃음은 해맑기만 했다
음식물쓰레기라는 이름도 몰랐고
사람이 남겨줘야 가축들도 먹을 수 있었으니
남김이 아니라 나눔이었지
넉넉하진 않았어도 방안 가득 웃음이 출렁였고
꼬르륵거리는 배를 쥐고도
하염없는 옛이야기에 날 새는 줄 몰랐다
지금은 곳곳에 먹을 것이 널리고
자고 나면 내다 버리는 것 천지라도
웃음은 늘 가뭄이고 인심은 점점 굳어만 간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흔한 세상이지만
가족 간의 사랑과 이웃 간의 정은 점점 말라가니
풍요 속에 빈곤이 바로 오늘이 아닌가 싶다
박종숙, 「풍요 속 빈곤」(『예술가』, 2015년 여름호) 부분
가난했지만 사랑과 정이 넘쳤던 것으로 기억되는 ‘예전’은 물질이 인간성의 고양에 오히려 역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곳간과 쌀독이 헐렁하고’ ‘허기진’ 날들이 많았어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러한 삶 속에 있었던 정겨움과 넉넉함 때문이었다. 물론 그 때의 ‘넉넉함’이란 물질이 넘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러했던 데 있다. 당시의 ‘마음’은 소박한 삶에서 피어나는 천진스런 ‘아이들의 웃음’과 ‘가족간의 사랑’, ‘이웃간의 정’, 그리고 ‘가축까지도 염려하는 따뜻함’ 등으로 넘쳐흘렀던 것이리라. 물질의 부족함은 배는 곯게 했을지라도 마음을 곯게 하지는 않아, 물질의 빈자리는 사람과 사람, 이웃과 이웃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마음으로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웃과 가축까지도 아끼며 사랑할 수 있었던 ‘넉넉함’은 ‘예전’의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이 오늘날엔 왜 사라진 것일까? 그것은 ‘곳곳에 먹을 것이 널리는’ 시대에 왜 소멸해버린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스스로 자체증식하면서 확장해온 ‘자본’이란 것이 인간성과는 하등 상관없는 반인간적이고 냉혹한 괴물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자본’에게서는 도무지 인간다운 따뜻함이라거나 연민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자본’은 말 그대로 비인간적으로 자기 확대만을 꿈꾸는 비정한 물질이다. 이러한 ‘자본’에 의해 세워진 세계는 차디찬 얼음왕국과 다르지 않을 것인데, 이 세계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자본’을 꿈꾸게 되는 아니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이는 역으로 인간은 ‘자본’과 멀어질 때 보다 인간다운 면모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돈이란 단순히 생활의 편리함만을 위해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왕국에서 보다 더 큰 힘과 권리를 누리기 위해 추구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의 힘과 권리는 순수히 자기 삶의 안락만을 위한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자신의 권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라는 혐의가 강하다. 그것은 곧 세상 속에서 권력을 구가하기 위한 것이요, 타자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함인 것이다. 물질의 소유는 언제나 타인에 대한 자기과시의 수단이 되어 왔고 타인에 대한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자본’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바른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첩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은 물질의 풍요가 왜 정신의 빈곤을 가져오고, 물질의 빈곤이 왜 정신의 풍요를 가져오는지와 같은 역설을 해명하게 해준다.
‘자본’의 이와 같은 성격은 자본주의가 얼마나 반인간적인 체제인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소유와 분배의 불균형, 가중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악성 코드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따뜻한 정을 흐르게 하는 대신 냉혹한 이기심만을 흐르게 할 뿐이다. 위 시의 ‘예전’과 오늘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물질’의 증가와 함께 차가운 괴물 같은 마음이 동시에 증식했기 때문일 터이다.
오늘날은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가 내부의 모순마저도 유연하게 삼켜버릴 정도로 견고한 시스템을 구축한 시대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전세계적으로 단일하고도 거대한 통제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체제도 부재한 시점에 그것은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으로서 인간 위에 군림한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인간은 더욱 자본을 소유하려 들고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더욱 철저히 낙오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이미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희망을 말하고 비인간적 세계에 대응하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찬바람 혹독할수록 시장은 시끌벅적하다
상주 풍물시장 간이정류소 버스 한 대 기우뚱 서자
알록달록 꽃 몸빼 노파 뒤뚱뒤뚱 보퉁이에 얹혀 내린다
파카 속에 목을 집어넣고 있던 장꾼들
우루루 몰려가 보퉁이 끌고 당기고 장이 익는데
단단히 여미고 쟁인 보퉁이 통째로 풀어져
호두며 대추 땅콩 곶감들 푸지고 자지러지고 통통통 튄다
(중략)
진눈깨비도 바람 추임새 따라
얼쑤얼쑤 춤추는 한낮
무르팍걸음으로 기어가는 노파의 굽은 등이 쿨럭쿨럭 또 풍물을 친다
황구하, 「풍물시장」(『리토피아』, 2015년 여름호) 부분
더욱 힘세고 완고하여 구조 자체가 폭력이 되어가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을 더욱 종속적으로 만든다. 인간의 분열과 소외는 더욱 경향적으로 되어 갈 것이며 인간은 더욱더 왜소해져 갈 것이다. 자본은 거대한 차가움과 어두움으로 인간을 비정하게 또 지치게 만들 것이다. 이 속에서 인간의 에너지는 더욱 고갈될 것이다.
이러한 경제체제 못지않게 오늘날 이 땅에서 폭력의 절대주체가 되는 것은 감시와 통제가 극에 달한 부정한 정권이다. 오늘날의 정부 행태는 한 손으로는 폭력을 행사하고 다른 한 손으로 그것을 감추는 작업들을 연속적으로 해대는 형국이다. 정당성이 취약한 권력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타자들을 희생시킬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기댈 것은 결집된 주체들의 힘일 뿐이다. 오래되어 철 지난 담론처럼 들리는 ‘주체의 결집된 힘’은 그러나 과거와 같이 파괴적인 정치력으로 현상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70년대도 80년대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타깝게 인식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이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해서 권력의 정치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중이 정치를 외면하는 것이 정치를 사라지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민중이 정치를 외면할 때 정치는 소외된다. 반인간적인 정치는 더욱더 자본과 권력에 의해 확장되는 괴물 같은 정치가 되어 갈 것이다.
위 시에 등장하는 ‘시장’은 각지에서 모인 ‘장꾼’들이 ‘단단이 여미고 쟁인 보퉁이’를 풀고 귀하게 마련해온 ‘호두며 대추 땅콩 곶감들 푸지’게 파는 곳이다. 여기엔 흥겨운 ‘흥정’도 있고 소란스런 ‘풍물소리’도 있다. 민중들이 모이는 이곳은 활기로 넘쳐나 ‘시끌벅적하다’. 이곳의 ‘노파’ 역시 몸은 노인일망정 풍물을 치는 기운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시의 화자는 노파에 대해 ‘무르팍걸음으로 기어가는 노파의 굽은 등이 쿨럭쿨럭 또 풍물을 친다’고 묘사한다. 또한 노파의 풍물소리에 ‘진눈깨비도 바람 추임새 따라 얼쑤얼쑤 춤’을 춘다고도 말한다. 이는 생명력이 가득 찬 인간의 기운에 자연도 응답하고 화합한다는 점을 떠올린다. 인간의 힘은 그것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과 또 자연의 그것과 한데 어우러져 더 큰 에너지로 융합하는 것이다. 위 시의 ‘풍물시장’에서 느껴지는 활기찬 에너지는 오랜만에 확인하는 민중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몇 겹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중첩된 오늘 우리의 일상은 지치고 암담하다. 구조화된 폭력은 켜켜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듯하다. 일상적 체험을 토대로 쓰여진 시편들은 그 구체성에 의해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하고 우리 사회에 겹겹이 싸인 억압의 층위들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의 ‘일상성’을 돌이켜보면서 우리는 절망과 암울함 속에서도 비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다른 데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내면에서 구해져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순수성과 생명력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괴물들이 만든 얼음 왕국에서 이것들은 아주 미약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마음은 인간성을 결집시키고 나아가 자연, 우주와의 결합을 이루어낼 것이다. 이는 결코 나약하지 않은 힘인 것이다.
**약력: 문학평론가. 2007년 <시현실> 등단. 저서에 『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 『문 학비평과 시대정신』, 『불확정성의 시학』등. 강릉원주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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