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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특집/시와 일상/김유석/들판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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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53회 작성일 16-08-2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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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와 일상

김유석


들판 유감

 

 

소나기를 만난다. 한껏 달아오른 칠월 나절, 고삐 풀린 망아지 발굽을 달고 난들에 몰려드는 작달비.

모자 밑까지 턱턱 숨이 차는 공중을 뚫고 쏟아지는 빗줄기의 촉감을 달리 어떻게 느낄 것인가. 시원함이 등골을 흘러내리는 잠시, 온통 푸름인 바탕을 튕기는 물방울 소리를 듣는다.

벼포기들과 논두렁에 나래비 선 들콩들 혹은, 휘청거리는 풀거미줄에선가 우러나오는 저음이 자욱하다. 일손을 놓고 망연히 젖는다. 비에 젖고 소리에 젖고, 발바닥으로부터 작은 떨림 같은 게 올 때쯤엔 내 몸도 한 포기 푸른 느낌표가 된다. 살아있다는 것의 자연함에 동화되는 한순간이다. 모자 속의 뜨거운 생각들을 잃고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웃는 허수아비가 될 때가 있다. 그러한 잠시,

빗방울 속에서 튀어나오는 청개구리들 철없는 울음을 놓는다. 가까이서 점점 멀리, 멀어졌다가 이명처럼 되돌아오는 작고 여린 것들의 목젖은 청량한 듯 절절하다. 애잔한 우화가 들어있는 유년의 기억을 뒤적이며 공연한 감정을 빗줄기에 섞으면 홀연 세상이 뭉클하고 외딸다. 하염없는 이 푸름 위에 놓이던 배고픔이 어렴풋하고 평생 흙만 밟으며 식솔들을 거느리던 아버지 뒷모습이 도드라지다 흐려지고, 한때 예 머물던 것들이 픽션처럼 스멀거린다.

무엇이든 반대로 행했다는 우화 속의 청개구리는 아니지만 내 몸 어디에선가 그것이 울걱거릴 때, 저만치 소박데기처럼 내외하는 개망초의 민낯 더는 주체하지 못하고 속없이 들길을 바장거리는 것이다.

가진 것이라곤 땅에 뿌리박거나 흙을 묻히고 살아가는 것들이 전부인 농투성이 생이다. 따로 챙길 것 없이 그렁저렁 삼십년을 꾸렸다. 뿌리고 거두는 한해살이 업을 되풀이해온 동안 몸에 밴 농사일 빼고 겨우 친밀해진 게 몇 있다면 자연이다. 자연이란 말은 조금 거창하게 들릴 수 있을 터, 들판을 터전으로 이물 없이 살아가는 풀꽃과 동물들의 생태를 조금씩 눈동냥했다 함이 맞겠다. 농사꾼시인이라 해서 새들이 우는 뜻을 짐작한다거나 강 건너 풍경에 한눈파는 고상한 한가로움은 치워라. 태풍과 가뭄 같은 절대적 재해에 씨발거리고 언제까지 배고픈 척 전근대적 기억을 써먹는 엄살도 좀 사절하자 뭐, 그러면서

사람 가까이, 사람이 무서운 줄 알면서도 그 주변에서 시름시름 살아가는 것들을 눈여기는 것이다. 사람에게 득을 주기도 하고 딴엔 성가시게 굴기도 하는 것들에 대한 얄팍한 연민이랄까, 사람이 미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를 엿보는 호기심이랄까 어쨌든. 겁 많은 들짐승들이며 하찮은 곤충들, 본명보다 나름 불리는 들녘 이름이나 사투리가 더 걸맞은 풀꽃들의 생태를 필사하는 일은 재밌다. 파란 보리밭에 갓난 너구리 핏덩이를 연록然綠으로 썼고 오월 아침 논두렁 거미줄에 꿴 이슬들은 물방울 주렴으로 그렸다. 고라니 거미 개구리 들쥐, 하루살이 실잠자리 매미, 도꼬마리 꽈리 서리태 돼지감자꽃 ……, 들판에 자생하는 것들을 내 것인 냥 참 많이도 베꼈다. 보고 느끼는 대로 적었으면 자연에 대한 헌사쯤으로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순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일수록 그들만의 정연한 세계가 있음을 명징하게 그려내지 못한 채 고작 그렇고 그런 사람 사는 일에나 그들의 생태를 비유하곤 하는 빈약한 내 상상력이라니. 그 중에서 여러모로 변주해 써먹는 소재가 아마 뱀일 것이다. 다른 이들의 느낌과 각별한 거리를 두진 못한다 하더라도 일상 속에서 어렵잖게 마주치는 존재라면 뭔가 조금 다른 것이 있지는 않겠는가, 자위하면서 무자치의 징그러움과 유혈목이의 독과 화사한 원피스 무늬를 걸친 꽃뱀을 입심 좋은 뱀장수보다 더 그럴싸하게 팔아먹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것 말고 고스란히 그냥 받아쓰고 싶은 감정들이 있다. 일테면 오뉴월 밤이슬에 젖어오는 보리 익는 냄새랄지 맨발에 끼는 보드라운 흙살의 촉감이랄지 또는, 지난겨울 식은 독거노인의 문지방에 걸린 한 줄 씨옥수수에서 오는 생생한 느낌들 말이다. ‘농사짓고 사니 좋겠다하룻밤 귀동냥으로 얻어 간 들귀에 누군가 놓고 간 말 그 어디, 좋겠다는 뜻은 필경 수 삼년 농사 끝에 겨우 느낄 수 있었던 그런 섬세한 감각들을 두고 한 말은 아닐지. 곧잘 넋두리처럼 중얼거릴 뿐 적지 못하는 까닭을 잘 모르겠다. 정말 소중한 것을 곁에 두고 딴전이나 부리는 나는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사람 맞다.

어제는 소나기를 맞았는데 오늘은 매미가 울기 시작한다. 두어 달 가쁘게 굽힌 들판에서 돌아오면 작년 그맘때의 풍경으로 놓여 있는 칠월이다. 문간을 밝히던 보리밥나무 붉은 열매들은 다 어디로 가고 마당의 그늘을 죄다 끌어 모은 느릅이 매미를 울린다. 매 해 판화처럼 단조로운 촌부의 삶. 비워 둔 오뉴월은 메르스표절이니 하는 몹쓸 말들로 귓바퀴에나 묻어있고, 사라진 게 아니라 거기 그대로 있으나 그곳을 곧잘 잊어버리곤 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평상 위 아내는 긴 낮잠이고 어머닌 텃밭에 쪼그려 들깨 모종을 솎는다. 가만 지켜보자니 잡초란 말, 베어내고 짓밟아도 다시 돋는 드센 것들만을 이름이 아니라 뵈다는 이유만으로 솎아내는 들깨모종을 일컫을 수도 있음을 나는 또 사람 사는 일에 비유하려 들려 하질 않는가.

에라, 소밥이나 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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