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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특집/시와 일상/김왕노/태양의 난민, 혹 흐르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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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467회 작성일 16-08-23 12:31

본문

특집

시와 일상

김왕노



태양의 난민 혹 흐르는 시 

 

난 태양의 난민이다. 태양 더 먼 곳을 꿈꾸면서 태양을 등지기 위해 떠나왔다. 나의 시란 나의 노래란 나의 삶이란 태양에서 멀어지려는 나의 노력이다. 엄연히 따지면 내가 태양을 배반하고 또 다른 태양이기를 고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빛이 휜다고도 하는데 결코 휘지 않는 빛을 쏟아낼 새로운 태양의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태양계를 만들어 그 축이 되고자 하는 음모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때 난 운동에 중독되었다. 지금도 중독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7 6 일 저녁 6 시부터 7시 반까지는 배드민턴을 쳤다. 축구장으로 이동해 8 시부터 10 시 까지는 야간조명 아래서 격렬하게 축구를 했다. 이처럼 일주일에 5일은 배드민턴을 치고 겹치는 하루는 공을 찬다. 견딜 수 없는 열정을 스포츠로 발산한다는 좋은 뜻으로 사람들은 말하지만 너무 많이 사용한 관절이 언젠가 나를 배반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관절이 나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절을 배반하고 있는 중이다. 따지면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으로 그 가려움을 없애기 위하여 스포츠에 몰입하는지 모른다. 그럼 소는 언제 먹이고 시는 언제 쓰느냐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로 격정이 다 발산된 몸에서는 시가 샘솟는다.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쓰면 어느 새 두 세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시가 시간을 잡아먹는 불가사리나 조마구 아귀라는 생각을 가진 지는 오래 되었다. 새벽에 시를 쓰다가 보면 어느 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시를 쓰면 먼 것들이 왜 그리 그리워지는 지 견딜 수 없다. 바다가 그립고 산 뒤의 마을이 그립고 산모퉁이에서 한 번 지나친 구절초가 그립다. 황지를 헤엄치던 커더란 비늘의 물고기가 그립고 사람이 사랑이 그리워진다. 그럴수록 더 시 깊이 빠져들고 시에는 그리움의 지문이 수없이 남는 것이다. 시란 그리움의 산물이자 그리움의 촉수 덩어리 그리움의 반죽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눈앞에 있는 것보다 눈 밖의 것을 더 원한 흔적이 시다. 눈 밖에 난 것을 사랑한 흔적이다. 그르므로 난 태양의 눈 밖에 나고자 항해 중이다. 난민으로 표류중이다. 내 무거운 꿈으로 과적된 삶으로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가다 때로는 폭풍에 휘말리며 태양 먼 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태양 먼 곳으로 나와 같이 떠나가는 사람이 반갑기도 하고 거대한 것을 부정하려는 작은 몸짓들이 정답다. 하나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이 많을수록 태양은 더 큰 중력으로 끌어들이려고 붙잡아두려고 발광한다는 모순의 관계로 태양계와 나의 관계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공존의 방법으로 서로를 시기 질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골의 기질이 강한 내가 어쩌면 억지를 부리는 것인지 모른다. 음지식물 같이 눈 먼 동굴 새우같이 태양 먼발치에서 내 존재를 등불처럼 환하게 켜보려는 몸짓인지 모른다. 나에게 그럼 태양 먼 곳이 어디냐면 골방을 일 것이다. 담요로 방문을 가리고 불온서적을 읽던 골방일 것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불온해지던 골방일 것이다. 아니면 내 동정을 버린 청춘의 거리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서로를 버리던 무욕의 달빛이 창호지에 묵을 치던 밤일 것이다. 물봉선화 환히 핀 개울 일 것이다. 신발을 빠뜨린 강일 것이다. 내 마음을 빠뜨린 채 오래 서성이던 풋사랑일 것이다. 그곳을 향해가는 족적이 시가 되고 그곳을 그리워하는 몸짓이 시의 몸짓이 되고 타는 갈증으로 가고자 하는 발걸음이 시의 발걸음이 된다. 태양의 난민이나 시의 난민이 되지 않기 위해 시를 나의 태양으로 세우기 위해 나의 글 작업은 계속되는 것이다. 이것은 젊을 때 내 꿈과 무관했으나 지금은 나의 고삐를 잡고 가는 완강한 힘이고 꿈이 된 것이다.


지금 내가 태양의 난민으로 표류하고 있는 곳은 수원이다. 수원에 표류한 지도 벌써 오래 되었다. 수원의 태양과 수원의 거리와 수원의 낮과 밤 수원의 새벽과 낯을 턴지 오래 되었다. 새벽마다 팔달산을 오르던 고동 등에서 생활, 연무동으로 옮겨서도 광교산과의 오랜 인연. 이제는 원천동으로 옮겨 원천 천을 따라가며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10 키로 마라톤을 한다. 달릴 때 풀벌레 울음 자욱한 계절도 있다. 그러면 풀벌레 자욱한 울음 속을 달리면서 울음학습을 한다. 울어야 할 때는 목숨이 다 닳도록 마음껏 울어야 한다는 울음의 자세를 배웠다. 해오라기가 삼킬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팔뚝만한 잉어의 등을 콕 쫓자 놀라서 바위위로 튀어 올라 퍼덕이는 것을 보며 달렸다. 칠월과 함께 달렸다. 칠월의 풀꽃과 달렸다. 흐르는 물과 함께 달렸다. 불구의 마음으로 달렸다. 태양 먼 곳으로 나의 태양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달린다는 것은 시로 접근이었다. 질풍노도의 마음을 순화시켜 시로 끌고 가는 작업이었다. 내가 달릴 때서야 비로소 시가 보이기도 했다. 맑은 물속의 세상이 보였다. 달린 다는 것은 스치는 것이 아니라 접근이고 만남이었다. 운동한다는 것은 시로 가기위한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뛰는 심장 맑은 머리로 시를 만나기 위해 나를 정화하고 수신하는 걸음걸이였다. 칠월 속을 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칠월이 얼마나 많은 배려로 우리를 대하는지. 칠월이 얼마나 많이 꺼진 영혼의 시동을 걸어주는지. 난 달리면서 내가 태양의 난민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내가 또 다른 태양으로 태어나려는 모반의 피를 가졌다는 것도 알았다.

    


 


태양의 난민


계림에 닭 울음 푸른 날 신화 같은 날이 우리에게 있지 않았는가. 그때 천년 이끼를 밟아오는 세월의 이마는 반듯하고 목소리는 물소리마냥 부드럽지 않았느냐. 안기고 싶은 가슴에선 향기로운 물 냄새가 나고 심장을 도려내어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느냐. 먼데 두고 떠나온 태양의 끓어오르는 소리 들려도 이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태양의 문장을 뜯어내거나 더럽히지 않았느냐. 불씨같이 태양의 기억만 가슴에 조금 남겨 놓은 채 태양이라 불리던 자가 조금씩 미워지지 않았느냐.


태양을 떠나오니 비로소 태양이 먹여 살린 자작나무 숲과 언덕을 넘어가는 해바라기 밭, 태양의 첩자처럼 긴 꼬리를 끌면서 따라오고 눈동자에 박힌 태양을 오려댄다고 눈을 다쳐 지르는 비명, 태양의 하수인으로 하늘에 자리 잡는 별자리와 그믐달, 태양 더 먼 곳을 꿈꾸는 것이 어리석다고 타이르지만 한 번 쯤 태양을 벗어나지 않으면 이미 음지식물의 영혼을 가진 우리는 태양을 배겨나지 못한다. 과적인 배로 우리의 항해가 위태하지만 우린 태양 먼 곳으로 가야 살아남을 음지인간인 것이다. 태양이 멀어질수록 생장점이 활발해지는 모반의 피를 이미 가졌다.

언제 태양이 먼 나라의 해안에 도착할까. 가슴에 이글거리던 태양의 기억을 꺼버려 더 캄캄해진 난민의 바다 위, 스스로 태양이 되어야 한다는 각오가 야맹의 눈을 버려 야행성 동물 같이 밤의 미로마저 읽어낸다. 뱃전을 두드리듯 가슴을 두들기며 오는 세월의 파도가 높을수록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높아가 끝없이 젓는 노, 우리는 난민이지만 아직 살아있다. 태양의 난민으로 우리가 눈 먼 새처럼 떠돌지만 결국 우리의 눈이 밝아지는 시점을 찾아 별점을 친 지 오래 되었다. 돌아선 등에서 태양이 이글거리지만 태양에 등 돌린 지 오래 되었다.

 

태양 먼 곳으로 먼저 떠난 난민의 소식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다. 난민은 물에 익사하거나 공중부양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잘못 보내준 소식이 아니라 무사하다는 희소식임을 안다. 아직도 항해 중인 먼저 떠난 난민, 태양 먼 곳으로 탈출해 가는 푸른 항로 위에서 끝없이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흔들지만 그것은 태양을 향한 것이 아니라 두고 온 거리와 이웃과 땅강아지와 달개비 꽃을 향한 것, 추억에 대한 예의고 기분인 것이다. 살 속 깊이 파고든 태양의 묵시록을 지우기 위한 안간힘이다. 태양의 난민만 깨어있는 밤, 거대한 어둠의 이랑을 넘고 넘으며 가는 우리란 그리움이 털로 돋아난 시간의 짐승, 털이 다 빠질 때까지 끝없이 앞으로 나가가는 태양을 떠나온 감정인 것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태양계를 떠나온 행성들, 태양의 난민인 것이다.

-( 태양의 난민 전문)- 

 

난 앞으로도 태양의 난민일 것이다. 태양의 난민으로 떠돌 것이다. 태양의 원주민이어도 이제는 태양을 떠나 언어의 머리껍질을 인디언처럼 벗겨 시를 만들면서 떠돌 것이다. 발기한 영혼을 끝없이 끄덕거리면서 엄지식물의 강한 뿌리를 가지고 떠돌 것이다. 정박의 닻 내릴 곳은 결국 그 어디도 아닌 태양처럼 불타는 삶을 살고 있는 내 안일 것이다. 내 안에 칠월이 온 푸른 항구일 것이다. 시를 쓰고 책을 내고 때로는 시를 양탄자처럼 타고 태양계를 지나 안드로메다까지 여행 할 것이다. 어제 저녁에는 박의상 선생님 출판 기념회에 갔다가 돌아 와 자고 이 새벽에 일어나 시를 쓰고 있다. 시를 쓸 때만이 마음이 맑아지는 지병을 앓은 지 오래 되었다. 시에 중독된 지도 오래 되었다. 지치면 배드민턴 채를 가지고 배드민턴을 치러 갈 것이다. 운동으로 나를 비워야 다시 시가 내 안에 말게 차오르는 것이다. 태양의 난민인 나는 시라는 노를 저으면서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아니면 태양 뒤편으로 흐르는 도시를 타고 나도 흘러가면서 홍수에 휩쓸려가나 잎이 새파랗게 돋아나 햇살에 눈부신 버드나무가지처럼 시란 잎을 피운 채 흘러갈 것이다.

  



  

흐르는 도시

 

흐르는 북이고 흐르는 도시가 아니냐. 흐르는 도시 가득 뿌리 뽑힌 사람들이 함께 이리저리 흘러가며 붐비는 것이 아니냐. 통곡의 벽 앞에 선 듯 경건해지다가 정박의 닻 내릴 곳 없다는 현실 앞에 당혹으로 표류하며 혼자 울던 뒷골목이 아니냐.

앞서 흘러가는 사람의 등을 바라보면서 위안으로 삼다가 사람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흘러간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느냐. 흐르는 도시에서 사랑이란 누구도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이라 그 어떤 말도 가슴에 말뚝처럼 박아주지 못하고 단지 잘 가라는 말로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 않았느냐.


오늘도 떠도는 것이어서 고층 빌딩마저 구름 같은 것이 아니었느냐. 함께 흐르면 흐르지 않는 것이라지만 우리의 결집력이란 모래 알 같은 것이 아니냐. 사강의 흘러가는 모래 강처럼 우리는 흘러가며 서로 부대끼어 서로의 존재를 갉아대지 않았느냐. 우리 흐르는 도시에서 흐르는 눈동자로 멀어지는 별을 바라보지 않았느냐.


하나 흐르는 것은 뿌리가 없다지만 흐른다하여 뿌리가 없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흐르면서 꽃 피우는 부레옥잠도 있고 흐르면서 푸른 부평초도 있지 않느냐. 흐를수록 허공이나 물에 내린 뿌리는 땅을 움켜쥔 뿌리보다 더 강하지 않느냐. 우리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흘러가지 않느냐. 흐르는 낮달 흐르는 바람을 노래하며 동행의 길 나서지 않았느냐.


사방은 흐르는 소리, 흐르는 것들이 부대끼는 소리, 흐르는 것들이 그리워하는 인기척, 흐르는 것들이 남기는 문장, 흐르는 질경이가 피운 꽃, 흐르는 벽에 붙여진 흐르는 담화문, 흐르는 현수막, 흐르는 신호등, 흐르는 하수구, 흐르는 네온사인, 흐르는 경계석, 흐르는 고궁, 흐르는 사거리, 흐르는 비, 흐르는 카페, 흐르는 술잔, 흐르는 청춘, 흐르는 그리움이 아니냐. 흐르므로 더 친근한 부서진 가슴들이 아니냐. 흐른다하여 날개를 원하지 않는 시간, 공중부양을 할 수 없는 대로, 하여튼 흘러가지 않느냐.

 

흘러가지 않는 것이 어디 시민이고 흘러가지 않는 것이 어디 세월이냐고 따지지 않으면서 소용돌이 속에 갇혔다가 벗어났다가 맴돌이치면서 어지럼증으로 속이나 게워내면서 앞서가면 등 뒤로 손이라도 흔들어주면서 흘러가지 않느냐.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노래하면서 흘러도 닿을 듯 하며는 손이라도 잡아 흔들어주면서 흐르다가 부딪혀 좌초라도 하면 울력으로 밀고 당기면 또 다시 흘러가지 않으랴.

 

흐르고 흐르다가 보면 우리 신화의 나라에 이르지 않으랴. 물 냄새 향기로운 곳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비로소 우리 청송 주산지 왕 버들처럼 역사의 긴 뿌리 내리기 위해 생장점이 밤새 뜨겁게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지 않으랴. 우리 흐르는 것이 허탕이라 하지만 기어코 거대한 우주선이 행성에 이른 듯 이르러 견고한 시간의 사다리 내려놓지 않으랴.

 

흐른다하여 길이 없는 것이 아니고 흐르는 도시라 하여 방황의 도시라 함부로 말하지 못하리라. 흘러가는 것이 곧 길이 되니 어디 길 없이 흐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랴. 꼬리에 꼬리를 쳐도 흐름을 벗어나기 힘이 들지만 흐름에 몸 맡기는 것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으니 때로는 꼬리를 치고 때로는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 흐르는 길 위에서의 지혜가 아니더냐. 우리가 흐르면 달도 흘러서 동행하지 않느냐. 함께 흘러가는 시간의 저 퍼덕이는 지느러미 소리, 함께 흘러가며 피는 노란 수세미 꽃, 흘러가며 숨 가쁜 이끼, 흘러가며 숨 가쁜 해바라기, 흘러가며 철거덕거리는 기차바퀴, 서로를 밀고 당기면서 가는 장강처럼 우리 그렇게 흘러가지 않느냐.

 

저기 먼저 흘러가는 고래 등 같은 도시의 등을 보아라. 얼마나 당당한 장엄인가. 도시의 등에 올라타고 노래하는 아이들의 티 없는 얼굴이 우리의 미래가 아니냐. 이제 흐르는 도시를 느끼겠느냐. 흐름으로 썩지 않는 물의 안쪽 같은 도시의 안쪽이 보이느냐. 흐름으로 가진 자정능력으로 청정지역을 이뤄 길고 길게 흘러가는 거대한 대열이 보이느냐. 과연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흐르지 않는 도시가 죽은 도시라고 이제야 단정할 수 있느냐. 흐르는 아버지였고 흐르는 어머니를 쫓아가며 부르던 입술로 이제는 흐르는 푸른 도시라 말 할 수 있느냐. 떠도는 도시가 아니라 흐르면서 푸르러지는 도시라 하면 되느냐. 홍수에 떠내려가는 버드나무가지가 새파란 잎이 돋아난 채 흘러가듯 나도 그렇게 흘러가지 않느냐.

 

-( 흐르는 도시 전문)-

  


 

**약력:1992년 매일 신춘문예, 시집-{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사진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 {그리운 파란 만장}

2003 년 제 8 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 년 제 7 회 박인환 문학상, 2008 년 제 3 회 지리산 문학상 등 수상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현재 문학잡지 시와 경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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