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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신작시/박한라/머리카락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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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4,581회 작성일 15-07-13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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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한라

머리카락 


“머리카락이 어스름해지고 있단다
누가 나를 훔쳐가는 것 같구나”
“할머니도 머리숱이 없었어요”
“매일 살을 들키는 기분이란다”

그녀의 정수리에는 몇 가닥의 밤이 가물거렸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낮은음자리표같이 바닥에 붙어있는 머리카락들

가끔씩 머리카락이 타오르기도 했다
집안의 가구들과 반짝이는 창문들이 촛농처럼 녹아흘렀다
나는 후 하고 그녀를 꺼버렸다
머리카락이 잠시 투명해졌다
그녀의 머리가 숨을 쉬고 있었다
조용하다는 것은 호흡을 들키는 일이라는 듯이

그리고 다시 점화하는 머리카락이여
불꽃처럼 위태로운 밤의 무용이여
발끝이 약한 모근들이 피아니시모같이 여려지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투명해질 때가지

몰래 그녀의 투명을 들여다보면
그녀가 지워진 만큼 자란 그녀의 새벽이 보인다

투명을 투병이라 해도 좋을까
아직 검은 불꽃이 낮게 피어나는 가운데




또 다시 나비처럼


서희는 바람처럼 전철 속으로 들어와 구석에 머문다 긴 스커트가 맥없이 가라앉는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바라보는 동안 마려운 기미도 없이 뜨겁게 치미는 혈액, 쏟아지는 자궁의 벽을 참아내는 근육은 없다 끈적끈적한 액체를 감추는 노력은 마분지같이 건조한 그녀의 얼굴이 잠깐 움찔하는 것으로 편집된다 흥건히 월경에 젖은 팬티를 빨 때마다 그녀는 부드럽게 흔들리는 해조류를 생각했다 전철 속 창문은 연초록 잎들을 빠르게 갈아치운다 어느 사이 울창해진 나무들을 바라보며 보도를 횡단하던 봄밤 느닷없이 그녀를 들이받은 승용차처럼, 여보세요, 여보세요, 눈 감으시면 안됩니다 이것이 보이나요 사고과정은 기억나세요 응급차는 정신없이 울려대며 그날의 빗소리를 지워나갔다 단지 가장 여린 첫잎 하나를 놓쳤을 뿐인데 왈칵 쏟아진 봄에 부딪혔던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햇살을 받고 있다 정작 나무들은 매년 몸속을 비워낼 때 울창해지지 매달 비린 잎사귀를 쏟아내며 그녀는 푸르게 우거지고 표정을 잃는다 길게 늘어진 그녀의 치마는 또다시 나비처럼
                                                       

*박한라 : 2012년 <내일을여는작가>신인상,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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