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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책 크리틱/김익균/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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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5,360회 작성일 15-07-13 12:51

본문

책 크리틱
김익균(문학평론가)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1
『계속 열리는 믿음』으로 독자에게 성큼 다가온 정영효 시인의 시는 시집이 나오기 전부터 「저녁의 황사」, 「기침」, 「티베트 티베트」 등의 시를 통해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시인이  「저녁의 황사」를 발표하며 화려하게 등단하기 전까지 시를 쓰고 있는 줄도 몰랐던 필자에게 그는 근대문학 서지 자료들을 구해서 나눠주는 선배 같은 동기였다. 정력적으로 교정을 누비며 왕성하게 논문을 발표하던 그를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만나지 못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학창 시절에 조연호 시인을 소개받은 것도 정영효 시인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어떤 학기인가에는 두 시인이 듣는 수업을 함께 듣다 보니 수업이 끝날 때마다 학교 앞의 편의점 평상에서 낮술을 먹어야 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두 시인 앞에서 늘 얼굴이 벌개져서 필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들은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먹을 수 있겠노라고 하며 연이틀 혹은 사흘 동안 내리 헤어지지 않고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는 것이다. 근대 초창기 동인지 시대의 전설 같은 나날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 했다고 할지……. 며칠 전 필자의 어수선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정영효 시인의 첫 시집  『계속 열리는 믿음』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전설 시대의 이야기들이 현실로 불쑥 솟아나온 것만 같은, 반갑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상에 빠져들었다. 
 『계속 열리는 믿음』의 핵심은 “생각하는 화자들은 일반적으로 지시되는 의미의 장을 그려 보이는 동시에 그 장에서 벗어나는 통로를 발견한다.”(김나영, 「나를 벗어나는 차원의 이야기」)는 데 있다. “예감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 대신 기침을 할 수도 있다”(「기침」)에서 ‘기침’이 나를 벗어나는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알레고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수긍하게 된다. 시적 화자는 “기침이 나오는 순간, 그 짧은 외도에” 성공하고 있다. 기침이라는 알레고리는 우리를 성인군자라도 억제할 수 없는 ‘외도’의 불가피성으로 몰아대지 않는가. “티베트 티베트라고 중얼거리면 기침이 나온다”(「티베트 티베트」)에서도 기침이라는 연상 장치는 위력을 발휘한다. 티베트란 무엇인가? “지나간 이는 있어도/ 어디에도 없는 방향이라고 답할까”? 시적 화자는  이내 “한 계절을 앓는 듯 혀끝이 답답해진다”. 티베트는 어디도 아닌, 여기가 아닌 저기를 향해 ‘계속 열리는 믿음’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가 한참 회자되던 무렵 술자리에서 시인이 ‘티베트에 가본 적은 없어요’라며 헛헛하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보았다면 이런 시를 쓰겠느냐고 대답하는 시인의 답답한 마음이 어제 일처럼 새삼 곡진하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시인’ 정영효가 그 시절 대학에서 그 지겹고 지겨운 일상을 어떻게 견뎠으려나? 「저녁의 황사」를 읽으며 영효와 술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본다. 

이 모래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 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저 있는 그들의 꿈에 제(祭)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서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2
송승언의 첫시집 『철과 오크』가 출간되었다. 평소에 발표된 시들을 간간히 읽어왔지만 시집을 전체로서 읽는 일은 하나 하나의 별을 헤는 기쁨과도 다른 기쁨, 성좌(星座)를 그려보는 즐거움을 주는 듯하다. 동시대의 시에서 느껴지는 이 고전적인 매혹에 취해 헤매이다가 언젠가 읽었던 좌담「암굴형 시인들」에서의  인상적인 말들을 떠올려 본다. 기억의 끝자락에는 잊어버렸던 몇 가지 밑줄이 오롯했다. 

“어떤 것들은 그것의 이름을 명명하는 순간, 그것이 아니게 되는 일이 많다. 전혀 다른 성질의 어떤 것이 되는 셈인데, 사물들이 그 이름에 갇히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사물에 대한 소유권이 있지 않다. 사물들은 매 순간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게 전통적인 서정시의 발화인데 물론 그것은 실패한다.(…)그러니까 나는 쓰는 일 자체, 내가 으깨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내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왠지 그때엔 나의 대리자가 세상에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누군가의 대리자일 뿐이지 않나?”
“단순한 비유라면 집을 짓는 일이다. 시 하나가 집 한 채가 된다. 그 집에 누가 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하는 일은 사는 일이 아니라 짓는 일이니까. 집을 지어놓으면 아마 누군가 거기에서 살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집을 지으러 가는 거고.”

의미심장한 육성. 첫 시집을 준비하는 젊은 시인이 이 정도의 목소리를 내보이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대상과 나’의 분리에 대한 자의식과 “나”란 “누군가의 대리자”라는 형이상학적 상상력, 시를 제작하는 일 자체를 통해서 “내가 으깨지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는 시론 등은 이번 시집에 대해서, 장기적으로는 송승언이 앞으로 만들어나갈 시세계에 대해서도 중요한 참조점이 되어 줄 것이다. 『철과 오크』의 서시 「녹음된 천사」를 감상해 보자.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 너는 창밖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지
암초 위에서 심해를 굽어살피는 너의 낯빛에 놀라자 꿈은 다시 선명해진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
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위의 시에서 꿈은 송승언이 “설계”한 시세계(로 오인된)다. 송승언의 시적 자의식은 현실의 대상을 포착하는 것을 지양하는데 대상과 관계없는 꿈의 세계로서의 시가 이러한 자의식에서 따라나온다. 
그런데 시는 왜 쓰는가? 송승언의 표현으로는 시를 “쓰는 일 자체, 내가 으깨지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시라는 세계가 완결된 이후에 ‘나’는 그 세계의 “들로 강으로 흩어”져 있게 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시의 첫 구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은 시인이 제작한 시가 완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순간은 송승언의 표현에 따르면 사물(세계)을 “가질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발화”에 기반한 시의 상태이다. 송승언의 시는 이 첫 구의 상태에서 출발하는바 완결된 ‘나’라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창밖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는 “너의 낯빛”에 의해 사물로서의 ‘나’는 “전혀 다른 성질의 어떤 것이 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이야말로 “매 순간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는 소유할 수 없는 “사물”이다. “너”의 시선 아래서 ‘나’는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처럼 다른 물질로 변화한다. ‘나’의 “몸은 벽 너머에서/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다.
사물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송승언의 시세계는 더 나아가 자기 자신조차 소유될 수 없는 사물의 모습이 되는 과정 속에 있다.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는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하던 폐쇄된 자아의 방이 타자의 “빛”(시선)에 의해 변화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송승언은 단순히 사물과 분리된 자아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서 변화무쌍한 사물의 변신술을 닮아가는 자아의 정신현상학을 보여준다. 송승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자아라는 닫힌 방이 타자에 의해 개방당함으로써 자기를 변신시키게 되는 ‘은총’에 비견되는 사건이 아닌가. 
『철과 오크』의 서시가 송승언의 ‘시론’을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는 이상 더 이상 표제작을 읽는 일을 미룰 필요가 없겠다.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고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거나 이기지 않고 같은 색
의 옷을 입고 숲을 통과하고 있고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수십 명의 나뭇꾼들은 수백 번의 도끼질을 할 수 
있고 수천 그루 나무를 수만 더미 장작으로 만들 수 
있고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
힐 수 있고

아이들이 영원을 지나가고 있고 별들이 치찰음을
내고 있고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고
불 앞에서 나무꾼들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으
며 농담을 하고 있고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그림자가 불의 주변을 배회하며 불그림자를 만
들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부라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고 있고
나무꾼들은 횃불을 나눠 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움직이고 있고
잎이 풍경을 가리며 무성해지고 있고

                  「철과 오크」(전문)

보들레르 이래로 무수히 변주되어 온 현대시의 핵심 이미지인 ‘상징의 숲’이 송승언의 시론에 따라 재탄생하고 있다. 사물들은 시인의 인식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거나 이기지 않고”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다. 송승언에게서 상징의 숲의 모든 사물들은 서로에게 상응하지만, 서로를 밀어내며 “영원”으로 나아간다. 영원은 새들의 “침묵”에 의해서 보장되지만 또한 이 침묵은 “열쇠들”과 상응하는 동시에 서로를 밀어낸다. 더 나아가 상징의 숲에 드리운 어둠은 타자의 “빛”에 의해 개방된다. 송승언의 상징의 숲은 보들레르에게서처럼 이상적 실제세계와 신비스러운 상응을 보이는 세계인 동시에 저 너머의 타자의 시선(“빛”)에 상응하는 어둠으로 끝없이 분열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쉼없이 “무성해지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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