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77호/고전읽기/권순긍/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의 노래 육두품 지식인의 절망을 노래하다-「촉규화蜀葵花」
페이지 정보

본문
77호/고전읽기/권순긍/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의 노래 육두품 지식인의 절망을 노래하다-「촉규화蜀葵花」
권순긍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의 노래
육두품 지식인의 절망을 노래하다-「촉규화蜀葵花」
정말 시다운 한시를 고려할 때 우리 문학사에서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작가는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이른바 ‘동국문종東國文宗’으로 우리 한문학의 수준을 중국과 대등하게 만들었다는 문학사적 업적은 그의 한시를 볼 때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 그는 수많은 절창을 남겼지만 당대의 실상과 자신의 처지를 가장 뛰어나게 형상화한 한시는 「촉규화蜀葵花」만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
적막하고 거친 밭가에 寂寞荒田側
무성한 꽃이 부드러운 가질 누르네 繁花壓柔枝
장맛비 그치자 꽃향기 날리고 香經梅雨歇
보리바람에 꽃 그림자 길게 드리우네 影帶麥風攲
수레와 말 탄자들 그 누가 와서 보리 車馬誰見賞
벌 나비만 부질없이 기웃거리네 蜂蝶徒相窺
부끄럽구나! 이 천한 땅에 태어나 自慙生地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도 참고 견딤이. 堪恨人棄遺
이 시를 당나라 시절에 지은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귀국 후 자신의 신세를 가탁한 작품으로 봐야 옳다. “적막하고 거친 밭”은 바로 아무런 희망도 심을(!) 수 없는 망해 가는 신라의 모습이다. 여기에 시인의 모습은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무성하게 핀 접시꽃에 비유된다. 황량한 밭과 화려한 꽃. 이 기막힌 대비를 통해 시인은 이미 비극적 결말을 준비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귀국하여 자신의 기량을 펼치려 했지만 신라 집권층인 진골귀족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올렸지만 집권층의 배척을 받아 함양군 등 변방의 태수로 전전하면서 망해 가는 조국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 처절한 절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이 자신이 태어난 곳을 ‘천한 땅’으로 비하하게 한다. 재능을 뽐내며 화려하게 핀 꽃이 천한 땅에 태어나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되는 과정이 이 시의 핵심이고 최치원 자신의 처지와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론과 결론만 있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어떻게 해서 그렇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그 과정을 「촉규화」는 자세히 형상화하고 있다. 무성한 꽃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얘기하는 것이다. 장맛비 그치자 꽃향기를 날리고, 보리바람에 긴 그림자를 대지에 드리운다. 누렇게 팬 보리밭을 쓸며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흔들리는 꽃의 모습은 긴 그림자가 대신한다. 아마도 오후였으리라. 보리와 대비되어 대지에 드리운 긴 그림자는 이미 기울어져 가는 퇴락의 이미지로 환기되지만 또한 위대한 인물의 자취로도 각인된다. 이미 비극적인 몰락을 예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레와 말 탄 귀족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기껏 벌 나비만 윙윙거릴 뿐이다. 소외와 세상에 인정받지 못함! 최치원 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여기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절망할 뿐이다. 신라말 3최 중 최승우나 최언위처럼 고려나 후백제를 선택할 수도 없었다. 절망을 뚫고 일어설 힘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란함을 피해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갔지만 거기도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결국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가야산 산신이 됐다고 전설은 전한다. 그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심연이 자신이 태어나고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을 ‘천한 땅’이라 저주하게 만든 것이다. 시대의 한계 속에서 이토록 절망의 노래를 부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신흥사대부의 사명감과 농민들의 처지 -「농부를 대신해 읊다代農夫吟」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청년 시절엔 요, 금나라의 침략을 목격하면서 천마산에 은거해 자신의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부르며 민족의식을 복원시키기 위해 민족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썼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바로 그 사내다. 나이가 들어서는 무신정권의 문객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하지만 조국강산은 몽고군의 말발굽아래 유린되고 있는데 무신정권의 담당자들은 강화도에서 나 몰라라 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더욱이 자신이 원하던 것은 글을 통하여 나라를 빛내고 바람직한 도를 세우는 것이거늘[以文華國]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껏해야 문서나 작성하는 관리로서의 일이었다[能文能吏]. 아무튼 이규보는 글을 쓰는 데 있어서는 상당한 능력을 보유했던 것 같다.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이정언진한림쌍운주필李正言陳翰林雙韻走筆”이라 했는데, 그 이정언李正言이 바로 이규보다.
일단 무신정권의 문객으로 참여하여 현실을 개혁해 보자는 것이 이규보의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뒤를 이어 등장하는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들의 길을 열었다. 벼슬이 정승이라는 ‘상국相國’에까지 올랐지만 백성들을 향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승의 지위에서 쓴 농민시 「농부를 대신해 읊다[代農夫吟]」를 보자.
비를 맞으며 밭이랑에 엎드려 김을 매니 帶雨鋤禾伏畝中
검고 추악한 몰골 사람 얼굴 아니구료 形容醜黑豈人容
왕손공자여 나를 업신여기지 마라 王孫公子休輕侮
부귀호사도 모두 나로부터 나오나니 富貴豪奢出自儂
“농부를 대신해서 읊다”는 제목에서부터 시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드러낸다. 사실 숱한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이 ‘민중성’에 의탁하여 시를 지었던가! 임화의 「네거리의 순이」나 신동엽의 「종로 5가」에서부터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나 신경림의 「농무」에 이르기까지. 늘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에 부끄러워하면서 노동자나 농민들의 입을 빌려서 현실을 노래했다. 그런 시의 맨 꼭대기에 「농부를 대신해 읊다」가 있다.
처음 2행은 김매는 농부의 볼품없는 모습이다. 그래서 어찌 이게 사람의 얼굴이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처참할 것 같은 모습에서 오히려 큰 목소리가 나온다. 농부와 대척점에 있는 왕손공자들에게 호통을 친다. 너희들이 누리는 부귀호사는 모두 나로부터 나온다고. 자신이 역사의 주역이고 국가경제의 근본임을 자각한 데서 나오는 당당함이다. 물론 이 자각은 농부의 그것이 아니다. 이규보 혹은 신흥사대부들의 목소리다. 이들은 단순한 동정으로 농민들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농민들이야말로 국가부강의 기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민들이 대접 받아야 된다고 여겼다. 이들이 내는 세금으로 나라가 운영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작품을 보면 그 입장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새 곡식 아직도 퍼런채 밭에 있는데 新穀靑靑猶在畝
현관서리는 벌써 세금내라 독촉하네. 縣胥官吏已徵租
힘써 일하여 부국함이 우리들에게 달렸는데 力耕富國關吾輩
어찌 이다지도 괴롭히며 살을 벗겨가는고. 何故相侵刻及膚
이런 연장선상에서 「햅쌀의 노래[新穀行]」의 “내 부처처럼 농부를 공경한다[我敬農夫如敬佛]”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신흥사대부들이 농민시를 지었던 것은 단순히 동정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생산의 주체인 농민들을 보호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펼 수 있다는 역사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흥사대부였던 윤여형의 「도톨밤의 노래[橡栗歌]」는 그런 농민시의 절창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도톨밤을 줍는 배고픈 늙은이의 모습과 문답을 통한 농민들의 실상을 제시한 다음 권문세가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저들이 어찌 알기나 하랴 그 좋은 상 위의 음식들이/모두 다 촌 늙은이 눈 밑의 피인 것을[焉知彼美盤上餐/盡是村翁眼底血]”에 이르게 되면 문학적 형상화가 갖는 힘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단순히 왜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 가의 차원에서 벗어나 생산의 주체로서 죽도록 고생만 했지만 그 성과는 모두 귀족들이 차지하는 이 역사적 모순을 ‘눈 밑의 피’로 환치시키는 솜씨는 놀랍도록 아름답다.
역사의 횡포에 맞선 고독한 방외인方外人의 노래 -「고민을 쓰다[敍悶]」
김시습은 세조 쿠데타를 당하여 그 모든 걸 팽개치고 ‘방외인方外人’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생육신'이라 하지만 그의 삶은 방랑과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동지도 없고, 친지도 없이 오직 홀로 거대한 역사의 횡포와 맞서야 했다. 세조 쿠데타는 역사의 횡포고 명분의 붕괴였다. 그렇다고 여기에 맞설 만한 힘이나 대안은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스스로 몸을 세상 밖으로 던져 고통 속에서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 갈 뿐이다. 이런 고통 속에서 빼어난 서정이 가능해진다. 거대한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고독한 자아가 그 심연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절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리라.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그의 이런 심정을 가장 잘 드러낸 「고민을 쓰다[敍悶]」란 시를 보자.
마음과 세상일이 서로 어긋나니 心與事相反
시를 쓰지 않고서는 즐길 일이 없구나 除詩無以娛
술에 취한 즐거움도 순식간의 일이고 醉鄕如瞬息
잠자는 맛도 다만 잠깐 사이라 睡味只須臾
송곳 끝을 다투는 장사치엔 이가 갈리고 切齒爭錐賈
말이나 먹일 오랑캐는 한심하구나 寒心牧馬胡
인연 없어 밝은 사람에게 천거받을 수 없으니 無因獻明薦
눈물 닦으며, 아, 탄식이나 하리라 抆淚永嗚呼
그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괴로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셔도 잠깐 뿐이고 더한 고통이 엄습해 온다. 잠을 청하지만 영원히 잠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해관계를 따지는 장사치는 이가 갈리고, 말이나 먹이는 오랑캐는 자신의 길과 거리가 멀다. 하고 싶은 일은 벼슬길로 나가는 것일 텐데 세조 쿠데타로 무너진 세상은 그럴 수가 없다. 다만 헛된 소망일 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를 쓰는 일 밖에 없다.
그의 시는 바로 이런 고통 속에서 나온 처절한 노래다. 시가 존재의 근거가 되는, 그러기에 빼어나다. 절망의 바닥까지 가본 자만이 진정 서정을 획득하는 것일까? 그의 시는 세계와 단절된 고독한 자아의 서글픈 진혼곡이다. 그 사이에 가로 놓인 심연의 바닥에서 막 건져 올린, 그래서 ‘서정’이 진정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죽은 자식을 위한 진혼곡-「죽은 자식을 곡함[哭子]」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가장 비통한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이다. 그래서 자식은 가슴 속에 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허균許筠의 누이이자 허성許筬, 허봉許篈의 동생인 허초희(許楚姬, 1563~1589), 곧 허난설헌許蘭雪軒의 경우가 그렇다.
일찍이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귀여움을 받고 자랐으며 조선시대를 통틀어 으뜸가는 문장의 집안답게 어려서부터 어깨 너머로 글을 배워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매천 황현은 허봉, 허초희, 허균을 일러 “초당 집안의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라 할 정도로 이들 세 남매를 뛰어난 문장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난설헌의 재주도 결혼을 하면서 꺾이기 시작했다. 남편 김성립과 여러 면에서 도저히 어울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며 그나마 과거 공부를 한다고 자주 집을 비우기까지 했다. 더욱이 시어머니와 사이도 좋지 않았다. 봉건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재주 있는 여자이기에 겪어야 하는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허난설헌의 시가 신선세계를 동경하고 몽환적인 이유는 바로 그러한 고통에서 연유한다.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고통을 아마도 가장 처절하게 느꼈던 최초의 사람이리라.
그런데 실상 그가 겪은 고통은 자식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남편과 시집에서의 스트레스로 딸을 잃고 연달아 아들까지 죽게 되는 처참한 지경을 당한다. 이 기막힌 사연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시의 제목처럼 자식을 위해 곡哭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 去年喪愛女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마저 잃었네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프구나 광릉의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 나란히 마주 보고 섰구나 雙墳相對起
쓸쓸한 바람이 사시나무 가지에 불고 簫簫白楊風
도깨비불은 숲 속에서 반짝인다 鬼火明松楸
지전을 날리며 너의 영혼을 부르고 紙錢招汝魂
너희 무덤 위에 술잔을 붓노라 玄酒尊汝丘
너희 남매의 가여운 넋들이 應知弟兄魂
밤마다 밤마다 서로 따르며 노는 줄을 夜夜相追遊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縱有腹中孩
어찌 제대로 자랄 수 있으랴 安何冀長成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浪吟黃臺詞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삼키리라 血泣悲呑聲
사대부들의 소위 ‘품격 높은’시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절실함이 이 시에는 있다. 묘하게도 연달아 죽은 두 남매의 무덤이 어두운 숲 속에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경수산이다.(허난설헌도 그 곳에 두 남매와 나란히 묻혀 있다.) 어린 자식을 차가운 땅 속에 묻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고, 뻥 뚫린 가슴으로 쓸쓸한 바람이 불어온다. 도깨비불이 반짝이는 어두운 숲 속에 아이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여기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그 가여운 넋들이 밤마다 서로 따르며 논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의 맑은 영혼들이 서로 의지하고 깔깔대며 뛰노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서로 웃고 쫓아가며 뛰놀지만 실상은 이 세상의 인물이 아니다. 아이들이 죽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도의 환상. 이토록 처연한 장면이 또 어디 있겠는가.(뱃속의 아이마저 그들 뒤를 따를까 걱정했지만 그 아이도 결국 죽고 만다.)
이제 이들을 위해서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까? 슬픈 노래를 읊조리지만 피눈물 속에 묻혀 버린다. 통곡할 수조차 없는, 그래서 피눈물을 삼켜야 하는 그 처절한 진혼곡이 바로 「죽은 자식을 곡함」이다. 별다른 기교도 부리지 않은, 어찌보면 담담하기까지한 이 작품은 시가 아니라 어미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피눈물이다.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27살에 죽은 그의 누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오호라! 살아 있을 때는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더니, 죽어서도 제사를 받들어 줄 아들 하나도 없이 되었구나. 아름다운 구슬이 깨어졌으니 그 슬픔이 어찌 끝나리오.”
처참한 현실의 형상화 -「애절양哀絶陽」
조선후기 한시의 현실주의 경향을 얘기할 때 가장 정점에 위치할 수 있는 작품을 들라면 대부분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애절양」을 꼽는다. 그 만큼 이 작품은 당시의 처참한 현실을 기막히게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생식기를 잘랐다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이를 당대 민중들의 처절한 삶으로 일반화시키고 있어 놀랍다.
갈밭머리 젊은 아낙 울음도 서러워라 蘆田少婦哭聲長
관문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통곡하네 哭向縣門號穹蒼
전쟁나가 못 돌아온 남편 있을 법 하건만 夫征不復尙可有
사내가 양물 잘랐단 말 들어보지 못했네 自古未聞男絶陽
시아버지 삼년상 이미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舅喪已縞兒未藻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다오 三代名簽在軍保
달려가 억울함 호소하재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섰고
薄言往愬虎守閽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오 里正咆哮牛去早
남편 칼 갈아 방안에 들어가더니 피가 낭자한데 磨刀入房血滿席
스스로 한탄하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自歎生兒遭窘厄
누에치던 방에서 궁형하던 형벌도 억울한데 蠶室淫刑豈有辜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閩囝去勢良亦慽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生生之理天所予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乾道成男坤道女
말 돼지 거세함도 오히려 가엾다 이르는데 騸馬豶豕猶云悲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況乃生民思繼序
부잣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豪家終世奏管弦
이네들 한톨 쌀 한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粒米寸帛無所損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均吾赤子何厚薄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거듭 「시구편」을 읇노라. 客窓重誦鳲鳩篇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은 그 형상화에 있다고 한다. 즉 뼈만 앙상한 추상적 논리가 아니라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구체적 형상을 접함으로써 우리는 감동하게 된다. 흔히 조선후기 피폐한 현실의 원인으로 삼정의 문란을 들고 그 중 군포의 폐단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책에 적혀있는 사실이다. 이를 보고 밑줄 치며 외우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다. 추상화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은 사정이 다르다. 눈에 보이듯이 살아 있는 현실을 재현해 내는 것이다.『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이 작품의 창작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 “이 시는 가경 계해년(1803) 가을에 내가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그 때 갈밭(노전마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보에 편입되고, 이정이 소를 끌고 갔다. 그 백성이 칼을 뽑아 양경을 자르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러한 곤액을 받는구나’하였다. 그 아내가 양경을 가지고 관청에 나아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문지기가 막아 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짓는다.”
요즘 같으면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을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 소식을 듣고 다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격양된 감정으로 울분을 토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감정을 삭이면서 이 기막힌 사건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먼저 읍내 관문 앞에서 통곡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등장 시켰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사내가 자신의 양물을 잘랐다는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얘기하게 한 것이다. 물론 다산은 먼저 사내가 양물을 잘랐다는 사실을 전쟁터에 나가 죽은 일보다 더 처참하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여인이 기막힌 사연을 얘기하는 데도 “범 같은 문지기”며 “이정이 으르렁대며” 등의 표현을 써서 처참한 현실을 더욱 공포스럽게 그려냈다. 이 시의 정점은 양물을 자르고나서 “아이 낳은 죄로구나”고 하는 탄식이다. 이 이상 더 어떤 표현을 쓸 것인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축복 받을 행위가 삶을 벼랑으로 몰고 가는 끔찍한 곤액으로 탈바꿈되는 이 저주 받을 현실을 말이다. 그 처참한 민중들의 삶의 대척점에 “풍악으로 해를 지새고, 쌀 한 톨 베 한 필도 바치는 일 없”는 권세가들의 삶이 위치하고 있으니 더 기막힌 노릇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첨정하여 군포를 거두는 폐단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모두 죽을 것이다.”고 단언하면서 이 작품을 인용한 바 있다. 불합리한 제도의 개혁을 바랬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작품의 마지막에 이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객창에서 거듭 시구편을 읽”는 것으로 대응했다.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려던 영조의 개혁정치가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보수 반동 정치로 회귀하는 역사의 배신 앞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다산이 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일이었다.
강진만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서걱이는 댓잎 소리를 들으면서, 언제 끝날 지도 모를 긴 유배의 날들 속에 그가 쓸 수 있는 건 이런 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화두는 바로 당대의 현실과 ‘민民’이었고 「애절양」은 그 중심에 있는 작품이다.
해방과 해체의 정서-「스무나무 아래[二十樹下]」
봉건시대의 완고한 격식 속에 한시는 갇혀있었다. 운을 맞추고 글자를 배열하는 것에 정해진 형식을 따라야 했다. 내용이 어떻든 그 형식적 질서는 엄격히 지켜져 왔다. 그런데 그것을 파괴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삿갓 곧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다. 그의 시 「스무나무 아래」를 보자.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여 二十樹下三十客
망할 놈의 동네에서 쉰 밥을 먹는구나 四十村中五十食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人間豈有七十事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이나 먹으리. 不如歸家三十食
어찌 보면 시 같지도 않다. 푸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넋두리 같기도 하다. 시가 지녀야 할 압축이나 서정적 긴장도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완고한 형식을 깨트리고, 그것을 해체함으로써 느끼는 해방의 정서가 얼마나 통쾌한가를. 요즈음 이른바 ‘해체시’라 일컫는 작품에서 느끼는 것 이상이다. 무거운 업보를 지닌 채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평생을 떠돌아 다녀야 했던 그가 과연 어떤 시를 쓸 수 있었던가.
잘 알려져 있듯이 김병연은 향시에서 자신의 조부였던 김익순(선천부사로 있을 때 홍경래군에게 항복하여 후에 참형을 당함)의 죄를 성토한 시를 지어 장원에 오른다. 그 후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바로 자신의 조부임을 알게 된 김병연은 통곡하고 집을 떠난다. 조부를 매도한 손자로 하늘조차 보기 부끄러워 큰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 채, 짚신을 신고, 죽장을 짚고 기약없는 방랑길을 나선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과 집안이 몸담았던 사대부들의 규범을 거부하고 해체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자기 부정은 곧 당대 사대부의 규범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고 도덕은 물론이고 일체의 형식을 거부 혹은 해체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무슨 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체 뒤의 공백을 풍자와 조롱으로 메웠다.
시로 돌아가자. 二十, 三十, 四十, 五十, 七十 등 단순한 한자어를 가지고 우리 말을 표기하는 파격적 실험을 보여 준다. 그래서 단순한 한자어가 ‘스무 나무(느티나무과)’, ‘서러운’혹은 ‘설은’, ‘망할’, ‘쉰’, ‘이런’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일종의 말장난인 셈이다. 하지만 그 말장난 속에는 당대 문화 규범에 대한 조롱과 야유가 들어있는 것이다.
김삿갓이 살았던 19세기 전반기는 부패타락한 세도 정권의 전횡으로 현실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모든 벼슬은 극소수의 양반들에게만 돌아갔고 세도가에게 돈을 주고 벼슬을 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몰락하여 끼니조차 이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김삿갓은 바로 그런 몰락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상징인 셈이다.
김삿갓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중세사회를 지탱했던 양반들의 규범을 해체시키고 해방의 정서를 느끼는 것뿐이었다. 김삿갓 시에서의 형식 파괴는 그런 의미를 갖는다. 이 시에는 그런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봉건말기 유랑지식인의 ‘서러운’ 모습이 투영돼 있다.
*권순긍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저서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2011, 공저), 『한국문학과 로컬리티』등. 평론집 『역사와 문학적 진실』. 고전소설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채봉감별곡』 등.
- 이전글78호/권두칼럼/장종권/따뜻한 것이 세상을 자라게 한다 22.12.30
- 다음글77호/책·크리틱/정기석/이행passage: 다른 상태로 옮아감 ―허진석,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파란, 2019) 22.12.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