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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소시집/강시현/대서 즈음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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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33회 작성일 22-12-3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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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소시집/강시현/대서 즈음 외 4편 


강시현


대서 즈음



마음에 소중히 품었던 것들은 한여름 이슬 같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슬픔에게 빚을 진 것이라 여기고 슬픔의 벽돌로 집을 지었고 

뭇별이 큰 물길을 내고 바람이 잠든 지붕 위로 한세월을 흘렀다

아름다운 날에 오감에 갇힌 나를 훌쩍 떠나리라 마음먹었던 것도 그 때쯤이었다


풀이 곱게 자란 곳에는 모주꾼 같은 여름이 비틀거렸다

입술이 없는 것들은 구름의 즙을 받아먹지 못해 시들었고,

슬픔의 깊이를 뚫고 웃자란 수염은 까실했다

상주의 눈은 더러운 페인트를 쏟아놓은 듯 벌겋게 불어서 탁했다

질퍽대던 여름은 자신의 몸에서 뽑아낸 실로 단칸집을 짓고 사는 누에처럼 

죽음의 예식에 하얗게 갇혔다

문상객들은 잘린 국화송이를 차례로 영정 아래 올려놓거나 매캐한 향을 피우고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조숙한 별들이 어둠의 천장에 가로 누워 이별을 재촉했다

줄 늘어진 해금과 구멍 난 피리가 느린 박자로 상여를 끌고 가는 새벽

삼복더위의 하얀 글씨로 쓴 명정에 덮여 여름은 복숭아보다 발갛게 익어갔다

날 이제 그만 좀 내버려 둬요,라고 벚나무 잎사귀를 찢으며 매미 울음소리가 뛰쳐나왔다

차창으로 닥쳐오는 뜨거움들의 고요

낙동강변 대가야의 우람한 봉분을 지나 고령 성산으로 매미떼가 관을 데려갔다

바위에 새긴 약속일지라도 배앓이처럼 잦아들 부재不在의 변명이 순장될 것이다

난임의 왕버들은 늙어서도 잎을 낳고 풍장을 위하여 잎을 버렸다

일생이란 끊임없이 무덤을 만들어야 하는 운명의 엔진이었다

바람이 지르는 비명소리가 국수가락처럼 산맥과 강줄기를 여러 갈래로 썰어 늘어놓았다

등불을 끈 구름들이 산맥으로 몰려가고 

백 년 동안 감정이 말랐던 강물방울들이 일제히 일어나 어둠을 쏟아냈다

검은 넥타이에 풀물이 들고

끈적이는 나무그늘을 흔들어 깨우던 대서 즈음이었다





새벽 세 시의 발자국들이



쓸쓸함에 익숙해질 무렵 오븐의 빵처럼 익어가는 새벽 세 시

부슬비 내리는 새벽 세 시의 발자국들이 어둠을 걸어와 내 앞을 지나가는 동안

하늘은 강철 스프링처럼 팽팽하게 긴장합니다

여린 모란잎이 자라는 기척을 들으며 다음 행선지를 준비하면서도

폐기된 발자국들을 지워내느라

새벽은 제법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무너지고 쓰러지지 않도록

하루하루를 말벌집처럼 정육각형으로 깎아 쌓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하루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하면

과거의 빨판들이 몰려와

일출의 수도꼭지를 잠궈버릴 것입니다

가재도구들도 저마다 일정을 점검하느라

딱딱 소리를 내고 삐걱거립니다

죽고 사는 것 아무 일도 아니라며

여러 계절을 경험한 늙은 신발이 밤공기를 퍼담습니다

닳은 양말은 발톱의 눈을 가리고

하염없이 시간의 관절을 꺾어 불안히 직립보행을 서두릅니다 

한때 눈부셨던 구두는 서툰 작별이 있었던 곳에 놓여져

갈라진 땅을 다시 걸어보고자 허공의 입자들을 낮게 품어봅니다

고요의 무릎이 밤비에 젖으며

부르튼 새벽의 입술에 낯선 지도를 걸어놓습니다

부지런한 발길들이 내 가슴 속 별자리를 열고 

쪼그라든 새벽의 심장을 쪼아대며

젖은 새벽 세 시를 걸어 나갑니다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두고 내기를 한 이후로

저것은 뭘 먹었기에 사철 지치지도 않는다

저것이 아니었다면 간만의 휴일을

갱년기의 입술과 다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균형 잡히고 평온한 것들이

저것 때문에 비정상으로 변해버리기 일쑤

저것이 아니었다면

내 마음이 들킬만한 노래를 애써 부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저것은 철창 속의 사막여우처럼 상아질 치아의 울 안에 숨어

내가 던진 미늘과 부비트랩을 피해가며

밉살스럽게 까불고 약을 올린다

뭔가를 불온하게 도모하기 위해

상아질 성벽 안을 그림자만 남기고 왔다갔다 한다

깨물면 아프고

뽑아버리자니 참을 수도 없겠고


밤이 깊으면

간간이 상아질 성문이 열리는 틈을 타

청산가리를 놓아 산꿩을 잡던 생각을 되살려

어찌어찌 해볼까 궁리 중이다


저것을 잘못 건드리면

유행성 독감보다 더 빨리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이말 저말 게걸스럽게 먹고 아무 데나 게워내니

천년 고찰 묵언수행 선방에라도 가둬야 되겠다

올 겨울엔 메아리도 꽝꽝 얼어버린 심심산중으로 귀양을 보내든

언론사 광고국 게시판에 압정으로 깊게 찔러 원 없이 걸어놓을 참이다





통속적 여름



비의 커튼이 처마를 걷어 올리는 만삭의 흙내음

불임의 내 거대한 자궁은

초록 속에 있어도 여름 빛깔 하나를 모르고


박꽃에 달빛 쏟아져 

자작나무에 취한 길을 몰고 오는 하얀 밤

충고로 얼룩진 관절은 삐걱거리며 

신작로 끝까지 공복空腹의 지도 위를 걸어보는데


살아서도 죽어서도 푸른 가지 하나 낳을 줄 모르는

통속通俗은, 나를 깨우는 암실의 찢어진 햇살자국

어디쯤에서야 우리는 서러운 풀물이 들 것인가

무슨 까닭으로든

살은 뼈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진단과 처방 없이도

입술은 익숙한 낙태처럼 조용히 붉어진다





손의 윤리학



움켜쥐려 애쓰다

종내에는 펴고 가는 손


박수치던 손가락이

금방 굽어서

손가락질하는데


이번 행성에서의 분주했던 흔들림을

모두 진공의 뿌리로 돌려주며

마른 잎처럼 떨구고 가는,

위탁받은 손이여

숱한 별빛 바다를 걸어

어디서 해묵은 삶을 흔드나


어리석게도,

찰나의 함정에 빠져

영원의, 꽃을 꺾어버렸네





시작메모


너절한 생명을 살리는 것은 언제나 미지의 부서진 거리.

원치 않는 싸움에서 다리를 다쳐, 담벼락에 기대 지쳐 바라보는 그런 거리.


  꽃잎이 성의도 없이 피었다 지는 사이 바다는 이우는 달빛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을 것이다.

  거리의 밤은 언제나 경이로웠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때는 

그토록 닿고자 했던 별이 마침내 에너지를 다하고 뾰족한 다섯 개 별모서리의 칼날로 하늘을 사선으로 그으며 한때 별의 족속이었음을 증명하는 짧은 순간이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지상의 숨결들은 하늘의 집을 짓고 꿈을 꾸었으나, 어느 밤에도 내꿈의 문을 노크하지는 않았다.

  내 손과 혀를 닮아 숫기 없는 검은 밤.

아픈 눈동자에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와 풍경을 씻어주었다.


  엄나무 순이며, 오가피 순 등속을 꺾고 쑥을 캐면서 나는 또 한철을 더 살게 되었고, 또 몇 편의 시를 더 쓸 수 있게 되었다. 





*강시현 2015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태양의 외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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