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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박혜연/어떤 이유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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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박혜연/어떤 이유 외 1편
박혜연
어떤 이유 외 1편
맥이 느려 수면내시경을 할 수 없다는 의사는
생으로 내 목구멍에 긴 호수를 집어넣었다
어떤 그리움도 남아있을 것 같지 않던 세상이
순간 침을 질질 흘리며 자꾸만 헛구역질을 해댔다
내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지병이 있다면
잠에서 깨는 순간 낯선 행성에 홀로 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절박하게 지구의 창을 두드리며
발랄했던 아침 창가의 새라든지
밑줄 그으며 읽던 책이라든지
아가하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
후두둑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 같은 것들을 불러 세웠는데
꽃같이 붉은 심장이 펌프질을 하던 순간부터
모든 그리움 속에 숨어있는 적멸을 예감했을까
붉디붉은 꽃 속에 숨어있는 칠흑의 순간에
한 호흡 한 호흡 내세워 세상을 걸었을까
눈물 콧물 쏟아내던 호스가 길게 몸을 관통해 나오고
나는 얼룩진 얼굴을 닦으며
그리운 영혼들을 새삼 심장 위에 올려
생의 순간에 말을 걸어오던 것들을 지긋이 눌러본다
다행히 그 영혼들이 아직 내 얇은 손바닥을 울리며 뛰고 있다
또다시 낯선 행성에서 잠을 깨겠지만
그때마다 사무치게 창을 두드리겠지만
꽃같은 내 심장이 두근두근 부르는 그리운 이름이 있어
이 생의 호흡을 다시 가다듬는 것이다
작심
게장 백반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작심 독서실’ 간판을 보면서 우리들 ‘작심삼일’이 생각나 한참을 웃었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저 이름을 거리에 건 이는 누구일까
마음을 단단히 먹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면 유효기간이 삼일일까를 생각하며 작심에 대해 우리는 작심한 듯 열변을 토했다
밥상 위 간장게장은 작심하고 우리 앞에 딱지를 벌리고 누웠다
거친 바다를 몸으로 막아내던 그 딱딱한 등딱지를 얇게 삭혀 내린 간장게장에서 작심한 듯 짭조름한 향이 났다
마음 단단히 먹고 덤벼야 하는 세상이라면 아무래도 나는 백전백패 단 한 번 의 승리도 없을 것이다 돌아서면 금방 물렁해지는 마음 안쪽, 나도 작심하고 나를 다 내려놓을 것이다
물렁해지지 않으면 편하지 않은 세상, 물컹물컹 건너다보니 한 세월이 다 건너간다
제 살과 껍질 내려놓은 간장게장 작심이 입맛을 돋우는 물컹한 저녁, 물러지지 않고는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과 마음,
그렇게 한 세상 저물어도 좋겠다
*박혜연 1993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2007년 《열린시학》 신인상. 시집 『붉은 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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