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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이규원/바람을 읽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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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신작시/이규원/바람을 읽다 외 1편
이규원
바람을 읽다 외 1편
남자와 여자 사이에 들어온 바람이 아프다
실바람 남실바람 산들바람까지는 좋았다
건들바람과 된바람까지도 그런 대로 괜찮았다
누르면 누를수록 이스트 같이 부푼 바람은
큰바람이 되고서야 정점을 찍었다
어둠은 달빛보다 더 많은 것을 듣고 보았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람의 알몸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때
태양은 뜨고 노래는 멈췄다
바램은 늘 바람 같은 것이라고 했다
예고도 없이 들쑤시고
늑골까지 내려와서 용솟음치게 했다가
끝내는
텅 빈 폐허만 남겨 놓고 거칠게 빠져나갔다
바람이 다녀간 자리, 상상만 무성했다
발톱도 없는데 짐승이 출몰했고
꼬리도 없는데 여우가 난입했다
이빨을 드러낸 채 음산하게 울던 바람 앞에서
진짜 바람이 속삭였다
뱀 허물같이 누워만 있는 그들을
이젠 누가 일으켜 세운다니……
비밀의 시작
젖고 싶을 때마다 귀를 곧추세웠다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는 빗방울 같았고
빗소리는 흘러내려 심연까지 내려왔다
그러다가 불현듯 내리는 것이 멈춰버렸다
멈춘 그 자리에 싹이 돋아났다
싹은 습성대로 자신의 몸을 감췄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자국 위로 풀이 돋아났고
계절은 넝쿨을 만들어 무연고를 완성했다
승냥이 무리가 몰려와 물어뜯은 것은
이젠 가시덤불일 뿐이었다
덤불처럼 엉켜있는 뼈의 소리들
침묵으로 일관하며 귀를 닫는다
입을 다물면 장미였고 입을 벌리면 하얀 가시였다
뽑아내지 못한 가시는 밤과 낮마저 바꿔버렸고
밤보다 더 어두운 야성이 되어
거부할 수 없는 감옥을 물어뜯었다
기억의 본질도 결국에는 가시였을까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을 답습하면서
자꾸만 줄어들지 않는 소문을 게워내면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뻗어가려던 본능을 옭아맨다
그러니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식으로 말할 뿐이었다
*이규원 2015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2019년 열린시학상 수상. 시집 『옥수수 밭 붉은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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