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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신작시/최현우/착란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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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최현우
착란
골목길 멀리
부른 배를 감싸 쥔 여자가 걸어올 때
보폭을 줄이고 몸을 좁혔다
두 개의 영혼이 오롯이 한 몸인 상태는 위태롭다
하나이거나 하나도 못되는 나는
나를 작게 접어 치울 수 있다
비켜서서 지나가라 기다리고 있는데
여자는 울면서
오는데
도무지 오지 않는다
기억났다
뛰어간다
앞모습으로 멀어지는 저 사람은
내가 먼저 돌아서 가버린 사람, 내가
가만히 서있어도 뒤로 걷게 만든 사람
길을 타고 핏물이 흘러온다
나 없이 잉태하고 죽은 것은
너 혼자 버리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른 잠을 자다가 잠시
같은 샛길에 들어서
고백을 닮은 독물을 흘려보내는 걸까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 여자의 앞으로
허공이 두꺼워지고 시간이 굴절되었다
부른 배가 아니라 작은 항아리를 안고 있었다
뚜껑이 바람에 날아가고
흩날리는 뼛가루
없어서 있는 사람
하나의 몸으로 두 개의 영혼을 움켜쥐게 한 사람
내가 당신의 저승이었다
비누가 달려갔다
누군가 나를 오래도록 비벼놓고 달아났어
장미향, 분홍색 자취만 남아있고 사라진 거야 항상 도피를 궁리한 비누,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 타일 무늬를 몸에 찍고 돌아오는 일이 고작이었어 문질러 다시 둥글게 가둬놓으면 비누통에 몸을 끼워 넣고 움직이려 하지 않는 비누, 얇아지고 길어지며 예리한 날이 서고 싶던 비누
두려움일까
자신의 체취 외의 누구의 냄새도 갖지 못한다는 건
상처 난 손바닥을 만났을 때 처음 누군가의 살 속을 기억했어 손잡이 없는 문을 열어본 비누, 칼은 열쇠의 다른 형태라고 믿었어
비벼대는 것들을 용서하고 또 용서하면서 모서리가 완성되었고 그날 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세웠지 대문을 뚫고 달려갔어 잠든 이의 꿈으로, 뜯지 않은 편지봉투 속으로, 수없이 많고 작은 발을 구르며 하나의 내부를 향해 장미향, 분홍색 자취
어느 날부터
더듬기만 해도 베어버리는
향기 없는 내 손을 남겨두고
*최현우 : 1989년 서울 출생.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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