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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연재산문/이경림/5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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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산문3
이경림
도서관
아마도 사람들이 도서관을 좋아하는 이유는 도서관이란 장소가 주는 설명할 수 없는 침묵과 일렬횡대로 꽂힌 수많은 책들이 안고 있는 알 수 없는 긴장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가와 서가 사이로 난 긴 낭하들......책장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반대편 서가의 사람들. 책으로 만들어진 그 길은 실제 그리 크지 않은 공간 속의 일정한 틀 속을 돌게 되어 있지만 이상스레 아득하고 모호한 어느 미로 속을 서성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시간의 저 쪽으로 사라진 사람들과 현존하는 사람들의 사유가 어깨를 비비며 꽂혀 있는 곳. 그 각각의 사유들이 만들어낸 그림자들이 삭은 종이 냄새를 풍기며 어른거리는 곳.
또 한 아침이 블라인드를 비집고 들어온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몇 권의 책과 노트북을 들고 도서관으로 간다. 오전 10시, 이 시간,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은회색 머리칼을 가진 노인들이 여기 저기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은 그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유리 너머 공원의 아름드리 수목들과 어울려 한 웅숭깊은 시간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를 찾는 자에게 우주는 바벨의 도서관과 같다. 서가의 어느 곳엔가 진리는 존재한다. 도서관은 무한하고 혼돈스럽지만, 아름답고 두렵고 신비한 질서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미궁은 너무나 완벽하여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을 절망시킨다. 그러나 우주가 놀라운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여 구도자를 위안시켜 주기도 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와 진리에 대한 풍요로운 명상록이다,’
생각해 보니 나이 드는 일과 도서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보르헤스 식으로 생각하면 사는 일은 처음도 끝도 없는 책 한 권을 쓰는 일이며 그 속의 한 페이지인 하루를 그들은 혹은 나는 여기, 이 도서관, 더 크게는 우주라는 거대한 도서관에서 온 몸으로 읽고 쓰는 중이라고 할까? 그렇다. 노년......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 머릿속에서 분방한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아침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 때,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읽고 싶은 책들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 뿐, ’ 이라는 사강의 고백이 절절이 다가오는 때. 지금 내게 읽고 싶은 책을 못 읽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원인 모를 불면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기분 나쁜 피로 그리고 그로 인한 집중력의 부족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시간, 그저 멍하니 있다 보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문득 두려워 지곤 한다. 얼마일지 모르지만 그 시간을 이 고약한 피로와 몽롱함 속에서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는 부랑인처럼 떠돌다 사라져야 하다니!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시간은 급류처럼 지나간다.
하루라는 이름으로 지나간 이곳의 갈피들이 벌써 열장을 넘어 간다. 그러나 열흘이라는 시간이 버무려 놓은 이 낯선 도시 속의 나는 여전히 서툴고 어색하고 실수투성이다. 오늘 도서관에서만 해도 그렇다. 화장실을 아무리 찾아도 없어 카운터에 물었더니 엄청 큰 열쇠꾸러미를 주며 저쪽이라고 알려 준다. 그 쪽의 문에 열쇠를 넣으려는데 열쇠 구멍이 너무 작다. 쩔쩔매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이쪽이 아니고 저 쪽이라고 말한다. 돌아보니 어제 엔틱 샵에서 만난 그녀다.
-화장실을 찾나요? 저쪽 이예요.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또 하나의 문이 있고 restroom이라는 팻말 까지 붙어 있다. 분명 조금 아까 보았을 땐 벽이었는데 언제 문이 된 것일까? 당혹스럽다.
나는 얼른
-아, 고맙습니다
하고 일분 전 까지 벽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분명 문인 그것을 밀고 들어간다.
어째서 이런 황당한 상황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일까? 분명 조금 전까지 이 광활한 도서관에서 저 쪽은 벽이었고 문이 있는 곳은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그 때, 화장실로 가는 문은 반드시 그 문이어야 했다. 그런데 아니라 한다.
사서가 가리킨 곳이 내가 생각한 곳이 아니라 다른 쪽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쪽의 문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 도서관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수많은 문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고 또 내가 모르는 무수한 ‘저쪽’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서가 케리어 카에 가득 담은 책을 끌고 맞은 편 서가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언뜻 그의 구부린 등이 보이다가...... 창백한 이마가 보이다가...... 아주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새로 들어온 책들을 목록별로 정리하는 듯하다. 저렇게, 매일 어디선가 책들이 실려 오고 서가는 한없이 늘어나고 낭하가 되고 벽이 되어 시작도 끝도 없는 미로를 만들리라.
한 미로로 들어간 그가 좀체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어느 하염없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수세기에 잠겨있는 그 낭하의 꼬리쯤에서.
창이 마주 보이는 책상에 앉아 집에서 가져간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을 읽는다. 십여 년 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책이다. 거실 책장에 꽂혀 잊혀진 채, 나와 한 호흡으로 지나온 십년의 냄새가 갈피마다 스며 나온다. 그는 현실 속에 숨어 있는 비현실적인 순간들을 전광석화처럼 잡아내는 작가이다. 달의 궁전은 그 무렵 또 다른 그의 소설 ‘뉴욕 삼부작’을 읽고 그의 집요한 상상력과 탄탄한 문장에 감탄하며 샀던 책이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내게 다가온 감동 또한 그 때의 것과는 다르다. 그 무엇도 단정 내릴만 한 것은 없다. 그저 지금이라는 시간인 내가 있을 뿐.
고독
도서관을 품고 있는 노스 할리우드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아 잠시 쉬는데 조금 떨어진 나무 밑 벤치에 앉은 노인이 낯익다. 빨간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노인은 분명 며칠 전 세탁실에서 만난 아래층 아서 할아버지다. 흰 나무 둥치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노인은 어젯밤 컴컴한 세탁실에서 만난 그와는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고독’ 이라는 단어가 천천히 스쳐간다. 그는 고독한가? 그러고 보니 그를 둘러싼 숲도 오솔길도 나무둥치를 타고 재빠르게 오르내리는 다람쥐도 구부린 그의 등에 붙은 殘光도 모두 고독한 것 같다. 고독이 바람이 되어 나뭇잎을 흔들고 간다. 이 알 수 없는 星間에서 고독은 필수인지도 모른다.
마리엔
세시 쯤 도서관 뒤 공원 뒤로 난 길을 따라난 터헝하 에비뉴로 접어든다. 인적이 드문 길.이따금 보드를 탄 아이들이 지나간다. 아이들의 시간은 언제나 저렇게 조금 위험한 속도 속에 있다. 아슬아슬한 찰라들을 비껴가며 아이들은 빛살처럼 지나간다. 그들이 사라진 길의 끝에서 검은 가방을 들고 키가 훤칠한 백인 청년이 걸어온다. 그들을 지나쳐 도넛가게 모퉁이를 돌아 지난번에 들렸던 엔틱 가게 앞을 지나는데 ‘하이’ 하고 뒤에서 누가 부른다.
돌아보니 아침나절 도서관에서 마주친 엔틱 가게 주인이다.
-시간 있으면 커피 한잔 마시고 갈 수 있어요?
아무 경계심이 없는 얼굴로 그녀가 묻는다.
-그래도 괜찮아요?
어리둥절하며 내가 묻는다. 자글자글한 눈가에 주름을 늘리며 그녀는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우리는 며칠 전과 똑 같은 자리에 걸려 있고 놓여 있는 오래된 것들을 지나 이오니아식으로 조각된 작고 둥근 청동의 티 테이불 앞에 앉는다.
-이건 작년에 아프리카 여행에서 사 온 거예요 이디오피아산이죠
그녀가 역시 청동처럼 보이는 차 주전자에서 뜨거운 커피를 따르며 말했다.
-매일 도서관에 오세요?
-네 뭐 딱히 할일도 없고....여행자 거든요
-어느 나라?
-코리아
영어가 짧은 나와 그녀의 대화는 짧은 단답형이다.
이번엔 내가 묻는다.
-가게를 하는데 어떻게 도서관에?
-아, 가게는 오후 1시 쯤 열죠. 그래서 오전 시간 두어 시간 도서관에 들려요
-그렇군요
- ........
그녀가 다시 말한다.
-당신은 선생님 같아 보여요
-네 이따금 강의도 하죠
-퇴직을 하셨군요?
-아닙니다 선생님은 아니었죠. 나는 글을 씁니다.
-정말요?
그녀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소설? 혹은 시? 혹은 에세이 같은?
-시를 주로 쓰죠
-그럼 당신은 시인?
-그렇습니다
-책도 냈나요?
-네 일곱 권 정도....
-와우 기념할만한 일입니다
그녀는 호동그랗게 놀란 눈을 하고 celebration 을 연발한다. 의외의 반응에 나는 나도 모르게 노트북 가방 안에 한권 들어 있던 영역된 나의 시집을 꺼내 준다.
-그녀는 신기한 듯 책을 들여다보다가
-이 책이 당신 것?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사인을 해 달라고 볼펜을 꺼내 온다
리.켱.림?
그녀는 글자를 하나하나 발음해 보며
-이름이 어려워요
하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그리고 저자의 프로필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내게
-47년에 태어 난 거 맞아요?
하며 놀라는 표정으로 묻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나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too young!
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듯
- 내 이름은 마리엔이예요.
한다.
-예쁜 이름이군요.
내가 말한다
-난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의붓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인데.......
중얼거리듯 그녀가 말한다. 그 때 도어의 방울 소리가 들리고 흑발의 백인 할머니가 들어서고 마리엔이 반색을 하며 의자를 권한다.
-내 친구 제키예요
그녀가 눈가에 자글자글 주름을 만들며 웃는데 다시 마리엔이 나를 가리키며
-이 쪽은 미세스 켱...림...리?
맞느냐고 묻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서투른 발음으로 소개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키가 마리엔 쪽을 보며
-네 친구?
하고 묻는다. 나는
-지나가던 구경꾼 이예요
하고 더듬거리고 마리엔은
-그녀는 코리아의 시인이고 여행중이래.
하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 지난 주에 가게에 손님으로 왔는데 오늘 도서관에서 또 만났지 뭐야?
하고 또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 나를 향해
-우린 어릴 적 친구예요. 젊어서부터 할리우드 부근 이웃에 살았죠.
제키는 젊어서 가수 였어요.
하고는 벽 한 쪽에 액자 속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노래 부르고 있는 매력적인
젊은 여가수를 가리킨다.
제키와 사진을 번갈아 보며 내가
-같은 사람 맞아요?
하며 놀라자 재키는 자신의 사진을 보며
-아름다운 여인이죠?
하고 장난스레 웃는다. 그리고는
-젊음은 아름답죠. 그렇지만 그것이 언제 우리에게 왔었나요? 나는 지금 뚱뚱하고 늙고 외 롭죠. 그것이 전부죠.
그녀는 입술을 약간 비틀며 매마른 웃음을 웃는다
-이 샾이 우리의 놀이터 예요. 당신도 언제든 놀라와도 좋아요. 가게는 한 시에서 다섯 시 까지 하루에 네 시간만 열죠. 이제 닫을 시간이 되었네요.
마리엔은 클로징이라 쓰인 쪽으로 팻말을 돌려놓으며 도어 위에 있는 잠금 키를 돌려 문을 잠근다. 그리고 내게 커피를 리필해 주며 천천히 마시고 가라고 말한다.
나는 문득 사진 속의 저 아름다운 젊은 여가수와 넓적한 등을 반 쯤 보이고 앉은 은발의 뚱뚱한 노파 사이를 지나간 알수없는 시간이 궁금하다.
유리 밖, 상점의 간판들에 하나 둘 불이 켜진다, 도아록 하나를 돌렸을 뿐인데 가게 안은 마치 멀리서 보는 어떤 낯선 별의 안쪽처럼 신비롭고 아늑하다.
이 느닷없는 만남은 뭘까? 무엇이 무한 속에 정교하게 얽혀있는 있는 말할 수 없이 미세한 끈 중 하나를 한 순간 파르르 떨리게 하고 마리엔과 제키라는 이름을 가진 비슷한 나이의 세 이방인들을 흔들어 무한 속의 한 장소로 발길을 제촉하게 하고 이 어둑한 가게 안에서 함께 차를 마시게 한 것인가? 그녀들은 연신 깔깔 거리며 소녀들처럼 수다를 떨고 나는 너무 빠른 그녀들의 말을 머릿속으로 번역하느라 정신이 없다.
문득 마리엔이 제키를 가리키며
-얼마 전까지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하고 웃는다. 제키도 어깨를 으쓱하며 동의 한다.
-우린 이따금 여행도 같이 가죠 먼 데는 아니지만
-아, 얼마 전에도 브라이스 케년에 같이 갔다 왔죠. 매우 아름다운 곳이죠.
당신도 가 봤나요?
-아니요 그랜드 케년은 가 봤지만
-그랜드 케년 보다 화려해요 놀라운 곳이죠 한 번 가 보세요.
그들은 또 브라이스 캐년에서의 추억담을 이야기 하며 깔깔거린다.
- 미국여행 중에 어디가 가장 좋았나요?
제키가 내게 묻는다
- 유명한 관광지 보다 메트로를 타고 가까운 곳을 이 곳 저 곳 보는 게 좋았어요. 동네를 산책하는 일......이웃 집들의 정원을 구경하는 일....... 도서관을 오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 동네의 공원..... 교회...... 어디든. 여기는 이국이니까요. 내가 가는 곳은 다 볼거리죠.특히 오늘 같은 이런 느닷없는 만남, 이런 시간, 놀랍지 않나요?
내가 정색을 하고 묻자 그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 때 마리엔이 내가 준 영문 시집을 꺼내 제키에게 보여주며 그녀가 쓴 책이라고 소개한다. 그녀는 great!를 연발하며 신기한 듯 들여다 본다.
두어 시간 그녀들과 마치 어릴 적 친구처럼 도란거리다 시계를 보니 a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간다. 내가 너무 빠른 그녀들의 말투에 브레이크를 걸며
-좀 더 천천히 말해 줄 수 있어?
하고 주문한 것을 흉내내며 제키가 ‘모어 슬로리?’ 하고 우스꽝스런 제스쳐를 하는 바람에 우리는 함께 웃었다.
-무어파크 스트릿 까지 걸어서 가려면 밤에는 위험해요 내가 ‘트레이드 죠’에 가는 길에 데 려다 줄게요.
한다. ‘트레이드 죠’ 는 집 근처 사거리에 있는 올게닉 푸드 전문점이다.
그의 샾에서 집까지는 차로 10분 정도의 거리다. 제키는 종종 놀러오라며 마음 좋은 동네 할머니 같은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마리엔의 차는 빨간 소형의 승용차다. 이곳에서는 동양과는 달리 노인들이 원색을 선호하는 것 같다. 빨간 차, 빨간 티셔츠, 빨간 원피스......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흰 머리칼과 어울려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밤
팀은 오늘도 늦나보다. 벽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a의 표정은 유난히 창백하다. 아까부터 어딘가로 문자를 보내던 a가 문득 일어서 점퍼를 걸치고 현관 입구에 걸린 자동차 열쇠를 들고 나선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있는 일이다. 내가 부랴부랴 따라 나서며
-나도 같이 갈게
하자 a는 질색을 하며
-그냥 계세요. 혼자 가도 돼요.
하며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간다. 제발 따라오지 말라는 그녀의 말을 뿌리치고 나는 뛰듯 걸어 그의 곁에 앉는다. 텅 빈 자정의 거리. 이따금 사나운 짐승처럼 헤드라이트 불빛을 출출 흘리며 차들이 전속력으로 달린다. 터헝하 스트릿을 10분 쯤 달려 a는 이사하기 전에 살던 동네 한 골목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는 헨드폰을 꺼내 또 문자를 친다. 칠흑 같은 차 안, 헨드 폰 불빛에 비친 a의 얼굴이 파르스름 하다.
‘엄마야, 지금 루이스 집 대문 앞이야’
화면에 뜬 글자들이 개미처럼 일렬로 고물거리는 것이 보인다
a는 등받이에 기대 죽은 듯 있다. 취객 한 사람, 개 짖는 소리 하나 없는 골목.
-팀이 그렇게 되고, 지난 삼년.....밤마다 이렇게 살았어?
-.........
바닥 모를 슬픔 같은 것이 목젖 근처까지 출렁거린다.
우리는 이삼십 분 눈을 감고 기도하듯 앉아 있다.
다시 a가 문자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리고 나는 눈을 뜨고 가만히 그 네모 속 불빛을 본다
-팀 벌써 1시네,..... 언제까지 있을 거야?
-........
그렇게 우리는 새벽 두시 반까지 그 이상한 데이트를 한다.
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어쩌면 지금 우리는 궤도를 약간 벗어난 곳에 숨어있던 한 블랙홀 속으로 끌려 든 건지도......모른다. 세 시간이 지나도록 팀은 그 육중한 검은 문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팀은 끝내 나오지 않고. 돌아오는 길, 여전히 말이 없는 a를 돌아보며 내가 묻는다.
-왜 팀에게 벌을 주거나 야단치지 않는 거야? 이거 방임 아냐?
a는 그저 조금 웃는다. 집으로 접어드는 모퉁이를 돌때 a가 문득 묻는다
-어떻게 하는 게, 방임인데? 엄만 나를 방임했나?
a의 표정이 진지하다.
-글쎄...... 나도 모르지만 이렇게 가만 두는 건 교육이 아닌 것 같아.
-엄마가 생각하는 그 교육으로 무엇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만 만약 교육이 없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됐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해. 그날 팀은 국가가 인정하는 교육권 안에 있었어. 그러나 그 아이의 운명은 고등학교 일학년 어느 날의 체육시간에 영원히 빗나갔어.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렇게 밖에 그 아이의 길이 마련되지 않은 이유를 대라면 말하기 좋은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원인을 찾아내겠지. 나의 이혼도 그 중의 하나가 될 거구..... 그러나 난 보다 본질적인 원인, 뭐랄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 돼.
가령, 왜 그 시간 25명의 반 아이 중 하필 팀이 반대표가 되었고 다른 반과의 사커 경기에서 졌고. 그 백인 아이는 그렇게 집요하게 따라 붙어 약을 올렸고, 마침내 팀이 참지 못해 녀석의 턱을 갈겼고 녀석은 턱이 부서졌고 경찰이 왔고 그리고는 준비된 운명...... 도도한 백인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팀은 학교를 쫒겨났고..... 엄마, 이거 무슨 정교한 시나리오 같지 않아? 녀석은 어렸어. 그 이상한 끈들의 장난을 알기에는.....그저 느닷없이 닥친 불운이 억울하기만 한 거지. 그래서 진짜 문제아가 되어 보기로 생각한 거지. 그래서 옮겨간 학교 교장실 앞 대형 거울에 뾰족한 돌로 크게 가위표를 그어 본 거지. 그 다음은 교실의 벽, 그 다음은......
a는 컴컴한 가라지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끌 때까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니까.......글쎄....... 그저 기다려 주는 일 밖에 무얼 어떻게 해 줄 수 있겠어? 녀석은 잠시 한 고약한 미로를 헤매고 있는 중이라고...... 언젠 가는 스스로 길을 찾아 나올 거라고...... 믿어야지. 그게..... 스물? 아니 서른이 된다 해도 어쩌겠어? 아아 이 미국이라는 나라, 자유의 도가니인 나라. 자유가 쇠사슬인 나라,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나가지 못하는 나라. 위험천만인 나라, 무시무시한 나라, 참 우스꽝스런.......
그녀는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삐이걱, 삐이걱 나무 계단이 엄살을 떤다.
꿈
검은 송판 울타리가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길. 비루먹은 미루나무 한 그루 없는 길을 일곱 살 쯤 된 내가 까끌까끌한 송판에 검지 손톱이 부딪치며내는 미세한 마찰음에 귀를 모으고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쯤인지, 문틈 같은 곳에 손가락이 끼인 듯한 느낌. 가만히 들여다보니 송판 울타리로 위장된 문이 보였다. 문은 크고 검고 딱딱했다. 나는 가까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폐가. 여기 저기 시대를 짐작할 수 없는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풀 한포기 털벌레 한 마리 없었다. 나는 어떤 바닥 같은 오래된 것 위에 앉아 햇빛이 가늘고 긴 꼬챙이를 가지고 그것들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문득 눈 아래 뭔가 반짝거렸다. 그것은 누군가 쓰다버린 거울이었다. 그것은 먼지 사이에 뻥 뚫린 길이었다. 그것은 얼음처럼 빛났다. 나는 그것을 집어 올렸다. 내 손바닥에 깊은 구멍이 뚫렸다. 나는 그 길로 들어갔다. 하늘은 너무 높고 태양은 핏빛이었다.
*이경림 :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 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등.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 버렸다.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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