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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특집/한국시의 진단과 전망/이정현/낯설게 기록된 부조리극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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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806회 작성일 15-07-13 09:50

본문

특집
이정현

낯설게 기록된 부조리극의 언어
-최근 한국시의 어떤 흐름과 전망

 1.

 모호한 언어는 낯선 이미지를 낳는다. 사태의 절박함과는 달리 언어는 지나치게 무심하거나 건조하다. 이질적인 의미들이 불규칙하게 결합된 언어들은 마치 부조리극의 대사와 닮았다.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를 박탈당한 채 조용한 소란을 야기한다. 의미는 한계 지어진 침묵과도 같다. 근래 한국시의 경향에 대한 인상을 범박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시인들의 언어는 불안한 세계와 내통한다. 그들의 언어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의미의 통일성과 개연성을 상실한 언어들은 부조리한 세계와 충돌하면서 기묘한 불협화음을 생성한다. 시인들의 언어는 의미와 맥락의 연계성을 방기하면서 역설적으로 타자와의 소통을 타진하는 역설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오직 가능한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한계를 인식한 자는 ‘너’의 행위와 ‘나’는 무관하다고 차갑게 말한다. 문장은 분절되거나 중첩되고 단어의 배치는 예측을 벗어난다. 송승언의 첫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에 수록된 언어들이 그러하다. 그 중 한 편의 시를 골랐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애초에 배운 게 없으니
어떤 사물에도 레테르를 불이지 않기로 오늘 식단 
에 대해 침묵하기로 음식이 어떠했더라도 그건 좋
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므로

  옴짝달싹하지 않고 싶다 더는 네가 불러도 가지
않고 싶다 차갑더라도 여기 머물고 뜨겁더라도 여
기 머물기로 한다 너에게 호명되지 않는 위치에서
너를 호명하지 않기로 한다 애초에 남이니까 남 아
닌 것으로 위장하지 말기로

  내 속에 무슨 금속성이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내
배에 귀를 대면 알 것이다 내 속은 단단한 진공으로
되어 있다 가장 날카로운 금속이 될 가능성은 그 진
공 속에서 울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예감에
가까운 것이지, 나의 감정은 아니다

  네가 너인 까닭은 식탁에서 나와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의자에 같이 앉는다
면 우리는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다른 것을 주문하기로 한다 목소리
와 표정에 감응하는 법 없기로 내가 어떤 것으로 불
리는 법 없기도 없다고 한다면 없는 것으로

  다만 있다고 한다면 추락하기로, 벼랑에서 떨어
져 부서진 상태이기로, 더 부서질 수 없을 파편들로

  너와 내가 아닌 모든 자리로 말이 되어 번개가 되
어 일용할 만나가 되어
                                   - 송승언, 「돌의 감정」 전문


 화자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그것은 “예감에 가까운 것”이며 “나의 감정이 아니”라고 적는다. 또한 언어가 “추락”하여 “더 부서질 수 없을 파편”들로 부서지기를 염원한다. 이 차가운 언설에는 감정의 동요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어두운 심연 속에서 손을 휘젓는 막연한 몸짓과 같은 시인의 화법은 반복된다. “깊이 없는 어둠”에서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면서 각자의 자리에 머물다가 흩어지는 것. 언어는 관계의 견고함에 기여하지 못한다. 남는 것은 공허한 읊조림이다. 

  언젠가 우리는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모르는 채. 각자의 손에 각
자의 팝콘과 콜라를 들고. 이제 어두운 실내로 들어
갈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의자를 찾
아서 두리번거리지. 각자의 연인에게 보호받으며.
동공을 크게 열고, 숨을 잠깐 멈추고. 우리는 함게
영화를 볼 것이다. 우리가 함께 본 적이 있는. 어둠
속에서 사건들은 빛나고, 얼굴의 그늘을 밝히고, 우
리가 잊힌 시간을 생각하면서. 팝콘 한 웅큼 쥐려
다 서로의 팝콘 통을 잘못 뒤적거리고. 손이 엇갈
릴 수도 있겠지. 영화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는
채. 깊이 없는 어둠으로부터. 너와 나는 혼자 나올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그때 너와 나
는 텅 빈 극자의 내부를 보게 된다. 한 손에 빈 콜라
병을 들고서

                   -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전문

  송승언의 시는 관계의 지속을 확신하지 못하는 자의 언어로 가득하다. 시인의 독백은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타인이라곤 온통 강도뿐이고/ 어디서 만나든지 서슬 퍼런 도끼날/ 모든 계약이 악수로 파기되지/ 우리는 담배를 좋아하니까/ 숲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랑/ 사형집행일에 대해 떠들었어.”(「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러한 독백은 역설적으로 기묘한 위안을 생성하니까. 혹독하고 고통스러운 피곤에 시달린 자의 언어는 과잉으로 머물다가 이내 소진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송승언의 시는 의미를 최소화시키고 감정을 절제하면서 과잉과 소진의 늪을 피해간다. 심리적인 수음에 빠지지 않는 시인의 무심한 언어에는 일종의 체념이 내재되어 있다. 미래가 현재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이나 부조리한 현실에 균열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소거된 채 적힌 언어인 까닭이다. 

2.

 불확실한 세계 안에서 발설되는 낯선 목소리들은 다채롭다. 기혁의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민음사, 2014)를 펼친다. 기혁의 시는 “또 다른 생애를 맞이하는 세계의 이면”(「밀림」)을 자각한 자의 언어로 다가온다. 이 언어는 짙은 냉소와 우울한 유머로 가득하다. “혁명을 신봉하지 않는 풍경” 속에서 “늘 기적의 뒤편에 서 있는 사람”(「출애굽」)처럼 시의 화자들은 늘 사태를 직시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둔다. “억지로 내뱉은 인사말이/ 실수로 내뱉은 대사보다 자연스러울 때/ 당신의 무대를 상상하면/ 나는 늘 분장실에 기거한다”(「외곽」)고 말한다. 기혁의 화자들은 서로의 외곽에서 쓸쓸하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식어가는 감정을 감지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감소하는 영향력의 한계를 인식한다. 그리고 “위도와 경도가 달라도 동일한 의도를 지닐 수 있고/ 동일한 의도로 서로 다른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토로하면서 언어로 구축된 세계의 균열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서로 다른 관심을 가진 손가락으로부터
 우리는 팽팽해지기 시작한다
 골목 구석구석 자리 잡은
 점박이 개들의 목줄처럼
 우리는 반대편 화살표에 대해 진지하다.
 과거가 남긴 후유증을 혁명이라 부르면
 손금의 방향으로 생사가 엇갈리기도 한다. 운명은
 오차를 줄이기 위해 진화하고
 신호 체계가 없는 고도의 식물성을 꿈꾼다.
 평화롭게 앉아 죽은 벌레들이
 동충하초가 되듯이
 상하의 구분만으로 새로운 시간이 열린다.
 왼손을 잡은 손이 왼손일 때와
 오른손을 잡은 손이 오른손일 때
 우리는 각자의 반대편에 선 얼굴들을
 친구라고 부르다 남은 손을 쥐어 줄
 누군가를 고민한다. 
 정확한 한 지점은 서로 다른 지점들을 내포하고
 정남향의 집에서도 정북향의 기후가 섞인다.
 오른손잡이의 왼발과 왼손잡이의 오른발,
 한쪽 발이 올라가는 문제는
 양발이 올라가는 것보다 긍정적이다.
 경도와 위도가 달라도 동일한 의도를 지닐 수 있고
 동일한 의도로 서로 다른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굳게 쥔 주먹의 바깥쪽이
 굳게 닫힌 가면의 안쪽만큼 평화로웠다.

                                        - 「링반데룽(Ringwanderung)」 전문

 우리는 신뢰, 사랑, 우정, 연대, 약속과 같은 단어들이 얼마나 허술한 체계로 구축되었는가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갑자기 붕괴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수록 삶이란 익숙한 반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개연성에 매달리곤 한다. 그러나 언어의 예기치 못한 불분명성과 마주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기혁이 응시하는 것은 우리가 신봉했던 “구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인간들은 체계 안에서 공동체와 연대, 타협과 신뢰를 외치지만 그것은 “서로가 다른 의지로 스쳐 가는 바람처럼”(「시니피앙」) 허술한 언약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기혁의 언어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보이는 것보다
 들려온 빛깔들이 점점 많아지면,
 자신에게서 가장 먼 것들의 이름부터
 차례로
 속을 내비칠 수 있었을 텐데.
 맹인의 검은 동자가
 미래를 예언하던 시절에도
 우리의 구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선 매번
 어두운 주변이 필요하고,
 손전등을 비추다 맞닥뜨린 진실은
 노상상도를 닮아 가는 법.

 모든 것을 빼앗긴 끝에
 목숨만을 부지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희미해진다.

                          - 「인상파」 부분.
 
 시집에 수록된 언어들은 일종의 연작처럼 배치되어 있다. 기혁의 시에 담긴 어색한 화음들은 시종일관 세계의 부조리를 직시한다. 감정에 매몰되지 않은 이지적인 언어들은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기혁의 냉소적인 언어들은 우리가 신뢰하는 구원의 초라함을 고발한다. 그의 시는 구원이란 익숙한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세계와 거리를 형성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파국이 예정된 부조리극과 흡사한 세계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은 개인들 개별적인 환대가 아닐까. 세계와의 거리 조율과 개별적인 환대. 이것이야말로 기혁의 차갑고 이질적인 언어들이 가닿으려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연작처럼 읽히는 기혁의 시집에서 마지막으로 배치된 시를 주시하게 된다.  

 나와는 손잡지 않으려던 눈들 사이,
 월요일의 유리창 너머
 눈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
 화장기 없는 너를 어루만질 때

 눈사람과 눈싸움을 하면
 피를 흘릴 수 있을까?
 지문(地文)이 없이도
 포옹을 할 수 있을까?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를 떠올린다
 색색의 관객들이 두 팔을 벌린다.

                           - 「비너스」 전문

 3.

  생이 무의미하고 지리멸렬한 우연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생의 허술함을 인정하면서 인간은 조금씩 무언가 체념하게 된다. 체념을 내면화하면서 시들은, 의미를 해체하고 언어를 낯설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세계에서 존립한다. 그리고 어떤 언어들은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기어이 슬픔의 내부로 진입한다. 이제니의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문학과지성사, 2014)를 펼친다. 이제니의 시는 불분명한 의미들이 기이하게 결합되면서 세계의 다양한 이면을 포착한다. 이제니의 산문시에는 접속사의 도움을 받지 않은 문장들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문장들이 꼬리를 물고 위태롭게 지속되는 과정에서 기이한 의미들이 새롭게 감지되고 생성된다. 수록된 시 「달과 돌」의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시인의 언어적 자의식의 한 단서를 포착하게 된다.

   너는 쓴다. 손가락에 물을 묻혀 쓴다. 몇 줄의 문
장을. 몇 줄의 진실을. 몇 줄의 거짓을. 거짓 속의 진
실을. 진실 속의 환각을. 환각 속의 망강을. 망각 속
의 과거를. 과거 속의 현재를. 현재 속의 미래를. 미
래 속의 우연을. 우연 속의 필연을. 필연 속의 환멸
을. 환멸 속의 울음을. 울음 속의 음울을. 음울 속의
구름을. 구름 속의 얼굴을. 얼굴 속의 어둠을. 어둠
속의 문장을. 다시 몇 줄의 문장을. 다시 몇 줄의 희
미한 문장을. 

  돌아보는 사이 다시 가라앉는 돌

  돌과 돌은 멀다. 달과 달은 멀다. 물과 물은 멀다.
말과 말은 멀다. 말과 물은 멀다. 물과 돌은 멀다. 돌
과 달은 멀다. 달과 말은 멀다. 달과 달이라는 말은
멀다. 돌과 돌이라는 말은 멀다. 물과 물이라는 말은
멀다. 말과 말이라는 말은 멀다. 

                                       - 「달과 돌」 부분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변용되는 이제니의 언어들은 고착된 의미들을 붕괴시킨다.  반복되면서 쇠진된 언어는 불안과 슬픔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다층적인 고뇌와 연결되지만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되지 않는다. 무질서하게 읽히는 문장들은 어긋나지만 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면서 시는 의미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인식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의미가 진화하는 상태에 머문다. 의미의 고착을 거부하면서 시인의 언어는 점차 파동(波動)을 지닌 음(音)을 닮아간다. 겹치고 틀어지고 스쳐가면서 “뒤섞이며 자리를 바꾸는 문장”(「나선의 감각-목소리의 여행」)들은 고정된 의미 부여가 불가능하다. 시인은 의미를 고착을 거부하고 의미의 진화과정을 지향하고 있음을 시로 기록한다. 「나선의 감각」으로 명명된 연작시들은 의미의 분화를 지향하는 시인의 자의식이 담긴 일종의 출사표이자 자신의 시를 설명하는 우회적인 시론으로도 읽힌다. 

  (……)  너는 사물과 세계가 고요히 움직이며 제
존재의 비밀을 덧입는 시간들을 상상한다. 너는 누
군가에게 목소리를 건넨다. 목소리 위에 어떤 의미
를 얹는다. 너만의 고유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한
다. 나무가 흔들리듯이. 구름이 흐르듯이. 바람이
불어오듯이. 그러나 네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어딘가에 먼저 가닿는 것은 네가 전하는 의미보다
는 네가 내뱉은 음들 고유의 성조와 고저와 장단이
다. 바로 너의 내면이다. 호흡이다. 울림이다. 감정이
다. 호소이다. 너는 네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모든 소
리들을 기록한다. 누군가의 입을 빌려 말하듯 너는
그 무수한 목소리들을 받아 적는다. 이것이 바로 내
시다. (……)
                 너는 네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어
떤 목소리를 듣는다. 너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
다. 네 이름을 부르던 오래전 누군가의 얼굴을. 그의
입에서 길게 길게 끌리며 사라지던 너의 이름을. 한
결같은 톤으로 발음하던 그의 음성을. 그 음성 속에
새겨져 있는 그의 내면을. 그 얼굴은 그 자신의 목소
리와 함께 오랜 시간을 건너왔다. 이제 너는 그의 얼
굴보다 그의 목소리가 좀더 많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입김과도 같은. 한숨과도 같은. 탄식과도
같은. 오랜 시간이 흘러 너를 울게 하는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일 것이라고 너는 생각한
다.

                                - 「나선의 감각-음」 부분. 

 왜 시인은 스스로의 시론을 적고, 언어의 의미를 분절시키는가. 왜 명징한 의미를 거부하면서 언어를 음의 상태로 응시하는가. 고정된 활자와는 달리 음은 고유의 파동을 지니면서 각기 다른 강도로 청자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청자의 반응 역시 고유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시인이 자신의 시론을 직접 피력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의 언어들은 규정된 의미의 ‘너머’와 ‘사이’를 넘나들며 특유의 리듬을 형성한다. 그러면서 체계가 형성한 언어의 의미를 유보하면서 분석과 규정을 유보한다. 삶의 진실은 늘 희미하게 포착된다는 사실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나선의 감각」 연작 중 한 편을 읽어보자. 이것은 ‘시가 되는 과정’, 혹은 ‘시적인 상태’에 대한 기록이다. 

   기억은 중첩된 채로 펼쳐지고. 수면 위로 검은 잉
 크 한 방울이 떨어진다. 꿈속의 꿈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꿈밖으로 사라지는 꿈들 속에서. 물 위에서 일
 렁이는 검은 그림자. 같은 음역대를 가진 소리는 서
 로가 서로의 몸이 되어 공간을 가로지르고 사물을
 이동시킨다. 사물의 표면을 가진 너는 음파의 감각
 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갑작스런 숲의 출현. 음
 지와 양지의 공작을 어느 날의 꿈처럼 우연히 발견
 하지. 반복되는 꿈속에서. 그 꿈속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다려왔던. 그 공작을. 기다리고 기다리
 고 기다렸지. 그 길고 긴 꼬리가 활짝 펼쳐지기를.
 그 날개 그늘에 얼굴을 파묻을 수 있도록. 그 모든
 시간들로부터 도망쳐 남김없이 숨을 수 있도록. 숨김
 없이 남을 수 있도록. 그러나 유년의 뜰을 서성이던
 공작은 바닷가 마을을 떠나는 날까지도 꼬리를 펼치
 지 않았지. 공작을 가둔 허술한 철조망 너머로 몇 개
 의 돌을 던져 넣는 걸로 어떤 유년은 끝이 난다. 

                         - 「나선의 감각-공작의 빛」 부분

 기억들은 “반복되는 꿈속”에서 각자의 속도로 명멸한다. 지금-여기에서 주체는 문장을 조직하면서 텍스트를 직조한다. 주체의 텍스트에는 “떠다니면서 흩어지는 것”과 “흩어지면서 내려 앉는 것”들이 뒤섞인다. 흩어지고 떠다니는 기억과 언어들을 기록하던 주체는 “믿을 수 없게도 모두 함께 시를 쓰고 있었다”(「몸소 아름다운 층위로」)고 말한다. 기억과 언어들을 배회하면서 주체가 궁극적으로 깨달은 진실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온전히 단독적인 기억이나 발화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주체가 자각했기 때문이다. 체계가 규정한 언어를 답습하고 그것을 의심없이 남용하면서 우리는 늘 타자를 배제하고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체계에 포획된 의미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무뎌지게 되는 감정은 바로 ‘슬픔’이다. 인간은 ‘슬픔’을 언어로 표현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동시에 언어를 이용하여 슬픔을 희석시키는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 슬픔을 곱씹을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능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끔 공포와 불안의 상태와 슬픔을 혼동한다. 공포와 불안이 만연했을 때 인간은 손쉬운 해석을 시도하거나 사태와 거리를 두려한다. 시인이 언어의 ‘파동’을 형성하면서 기어이 가닿으려는 감정이 ‘슬픔’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슬픔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깊어지는 존재이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나선의 감각’을 경유하여 시인이 스스로 피력한 시론의 유일한 내용이기도 하다. 

  아니요. 당신은 지금 슬픔의 안쪽에 있어요.
  슬픔의 안에. 슬픔의 안의 안에.
  마치 거품처럼.

  우리는 미끄러졌고 이전보다 조금 유연해졌다.

  (……)

  무수한 괄호들 속의 무수한 목소리들
  말과 침묵 사이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

  이름 없는 이름들을 다시 부르면서
  다시 돌아온 검은 시절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으로 사
 라져버렸다.

                  - 「분실된 기록」 부분


4.

 여기서 언급한 각기 개성이 뚜렷한 시들을, 나는 슬픔을 응시하는 세 가지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몇몇 시인의 언어로 한국시의 특정한 흐름을 진단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규정의 폭력에 연루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여기의 우리가 언어의 ‘너머’와 ‘사이’를 살필 여력조차 없이 필연적인 파국에 직면한 상황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감정을 절제하면서 차가운 언어로 읊조리는 송승언과 기혁의 언어와 활자로 규정되는 의미를 유보하는 이제니의 언어는, 어떤 징후처럼 읽힌다. 이 세계는 부조리하다. 부조리한 세계를 부조리하다고 명명하는 것조차 클리세로 느껴질 정도로 이 세계는 이미 부조리하고 폭력적이다. 세 사람의 시는 모두 ‘슬픔’의 감정과 연동된다. 시인들의 언어는, 슬픔이라는 감정조차 체계가 구성한 틀 안에서 소모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현실과 충돌한다. 그리고 고착되지 않은 언어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감성의 파동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보고, 매일매일 얼굴을 씻으면서도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음을 잊고 살아가지 않는가. 체계의 규정과 상식을 부정하는 세 사람의 언어가 다른 방식으로 알려준 진실은 이렇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부터 떠나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이제니, 「검은 것 속의 검은 것」)다. 이 진실에 대한 응시는 타인의 비극을 손쉽게 소비하고 망각할 것을 권장하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시적인 저항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근 한국시에서 감지되는,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다. 슬픔은, 하나의 목소리를 여러 갈래로 흩어놓고, 규정에 익숙해진 자들을 혼동시킨다. 슬픔을, 규정되기 어려운 감정의 파동을 기록한 시인의 언어를 옮겨 적는다. 파국이 이미 목전에 당도했을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 밀려날 때 저 밑바닥으로
부터 번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어둠
으로 몰려갈 때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
인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말한다. 뒷모습은 뒷모습
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으로 살아남아 
오래전 그 해변을 걷고 있다. (……)       

   (……)         사라지는 이 순간만이 오직 아름
답다고.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 사라질 때 저 너머
에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 밤은 밤으로 다시 건
너가고 있는데. 하루는 하루로 다시 기울고 있는데. 
 
                  - 이제니,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 부분.


*이정현: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키워드로 본 2000년대 한국문학>(공저) 중앙대 국문과 박사.  현재 한국외대, 고려대, 가천대, 선문대, 협성대, 대진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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