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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특집/한국시의 진단과 전망/남승원/질문들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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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남승원
질문들의 곁에서
1.
몇 해 전 한 국제문학제에서 대만의 유명 여성 시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유약한 인상의 시인은 실제로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고국에서도 도시를 떠나 인터넷이나 전화도 되지 않는 깊은 산 속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행사 초청을 위해 몇 번 전자우편을 주고받았을 때 남편을 통할 수밖에 없어 의아해 했었는데 그제야 이유를 짐작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여러 출판사에서 시인선을 운영하는 등 시집 출간이 활성화된 한국의 문단에 대한 이야기에 시인은 아주 놀라워했습니다. 대만에서는 시인도 아주 적을뿐더러, 시집을 낸다면 자신을 포함해 거의 모두 자비로 출간을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대만에서 시문학은 대학 교수나 직간접적으로 문학에 관련이 있는 직업 종사자 등 창작에 시간과 비용을 들일 수 있는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대만의 시인은 우리의 시단을 부러워했지만, 사실 대만이나 우리나 ‘시인’이 특정 직업을 부르는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실제로도 우리는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전업시인’들의 민망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賣文’이라는 말이 비난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시인들은 때로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생계의 범주와 먼 곳에 두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럴 때 오히려 시인들은 스스로를 ‘시인’으로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이 때문인지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시인을 직업이나 인물 그 자체보다 정서적으로 고양된 어떤 상태로 인식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낭만주의 시대, 물질세계를 완전히 거부해야만 마음이 그에 맞는 세계(milieu)를 창조할 수 있다고 한 블레이크의 말이 시대와 바다를 건너와도 전혀 낯설지 않게 들리는 것 또한 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직업이나 벌이와 무관하게 어떤 정신 상태를 지칭하는 것에 보다 가깝다면 대체 그들은 왜 시를 쓰는 걸까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질세계’를 거부한 시인들이 어째서 그것을 다시 기꺼이 상품으로 내놓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여행을 하기 힘들 정도의 몸으로도 타국의 사람들 앞에서 시에 대해 말하기 위해 굳이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는 걸까요. ‘물질세계’를 거부하기 위해 다시 그것을 증거로 삼아야 하는 시인들의 모순적인 작업은 언뜻 어리석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올해 우리 시단을 진단하고 전망해보고자 하는, 원래 이 글에 부여된 임무를 앞에 두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들을 따라 질문을 반복하는 일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에 끝내 실패한 저로서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2.
바람의 깃털로 흩어지고자 했으나
꽃의 빛깔로 흘러가고자 했으나
새의 날개로 떠오르고자 했으나
오직 하나의 춤이 되었다
애당초 이 자리를 원했던 건 아니다
저 기찻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으므로
저 돌멩이를 받아 안을 수 없으므로
이 밤의 거미문신을 불태울 수 없으므로
화염병처럼 가스통처럼
홀로 불타는 춤이 되었다
멀찍이 비켜 걷던 발걸음 저쪽에
재개발 구역의 담벼락과
붉은 머리띠의 함성이 있었다
돼지고기 구워먹던 불판이 나뒹굴고
누구나 이 자리를 원하는게 아니다
멀찍한 발걸음과 함께
내 사랑스런 쫑쫑이와 함께
내가 숨겨놓은 철면피의 국민연금과 함께
고린도전서 13장을 봉독하고 싶었으나
타오르는 춤의 형벌을 껴안게 되었다
멀찍한 발걸음의 외곽이 무너지고
손바닥 두드리며 울어볼 절벽이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 오정국, 「타오르는 춤」 전문
달성 가능한 목표들을 부인하고 스스로 “형벌을 껴안”는 삶. 오정국의 시를 통해서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불가사의한 욕망이 점차 강하게 드러나는 방식을 통해서 답을 제시하기보다 자신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을 끝없이 반복하게 만드는 시인들의 방법입니다.
작품의 처음에서부터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 즉 물질적 가치를 뛰어넘은 고양된 정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는 시인의 고백을 만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바람의 깃털, 꽃의 빛깔, 새의 날개’가 되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을 원했음에도 “오직 하나의 춤”밖에 될 수 없었던 자신의 운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적 구조에 주목해보면, 시인이 처한 운명적 상황을 단호하게 하나의 행으로만 드러낸 연들을 자신이 원했던 가치 또는 자신이 뛰어들고 싶은 외부적 현실들 사이사이에 배치하고 있는 점도 눈에 들어옵니다. 이는 결국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던 시인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껴안”을 수밖에 없는 과정으로 인식하게 만드는데 효과적입니다.
시인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처음부터 밀려나 서게 된 자리에서의 ‘춤’은 그렇다면 시대와의 불화를 온몸으로 뚫고 나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화염병처럼 가스통처럼//홀로 불타는 춤”이 피할 수 없는 시인의 처지라고 이해한다면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이영광의 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 속에 미시적 장면으로 뿌리내리는데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문일 씨는 정신지체장애 2급 동네 아재다
일곱 살들과 잘 노는 쉰일곱,
나만 보면 담배 달라고 한 지
십오 년이다.
십 년쯤 전인가, 빚이며 재산 분할에 시달릴 때
식전부터 담배 줘, 하던 그에게
맡겨놨어요?
싸늘히 한마디 쏘아붙이고 나서부터는
미안해요, 담배 좀 줘요, 한다
여자를 알려줄 수도 돈을 알려줄 수도 있었는데
미안을 가르쳐 주고 말았다
하느님은 유구히 상한 정신 안에 깃들어 계신다 했으니
나는 강산이 변하도록 하느님에게 사과를 받고 산다
담뱃값이 두 배가 되도록
미안이라는 폭력을 당하고 산다
- 이영광, 「하느님의 미안」 부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만한 이 장면에는 사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채 따르고 있는 사회적 가치관들이 복잡하게 뒤얽히고 미묘하게 어긋나 있습니다. 먼저, “정신지체장애”라는 판단의 유일한 증거로 언급되는 것이 어린이들과 “잘 노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은 ‘장애’에 대한 기존 판단의 전복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문일 씨”의 행위와 그것에 응대하는 “나”의 모습에 대한 가치 판단 역시 현실과는 다르게 다소 복잡한 양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난의 대상이거나 종종 처벌에까지 이르는, 대가 없이 무엇을 원하는 행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몸소 시대와의 불화를 경험하고 또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시인들에 의해 사회적 부조리의 강제가 미치는 일상의 지점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시문학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기대해 왔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시의 목적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데에 큰 이견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행위에 대한 전복적 판단에 멈추지 않고 마침내 ‘미안함’을 둘러싼 압력들의 위계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시비를 가리고 결과에 승복함으로써 유지된다고 인식해온 경쟁과 제도의 ‘공정성’ 속으로 의문을 도입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영광의 작품을 통해 얻게 되는 교훈이나 감동은 일방적인 전달 방식을 넘어 우리를 둘러 싼 사회의 부조리한 지점들에 대한 내재적 각성 상태의 선행, 그리고 바로 이같은 질문의 지속가능성을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오정국의 시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문제적 현실에 저항하는 시인의 의지로 ‘춤’을 이해하자마자 이제 우리는 역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지점에 서게 됩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있다고 생각한 시인이 실상은 “멀찍한 발걸음”으로 “재개발 구역의 담벼락과/붉은 머리띠의 함성”을 피하고 싶었을 뿐,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원하지 않은 것이었다는 고백 때문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자신의 사소한 애착(‘쫑쫑이’)과 지극히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한 필요(‘국민연금’)만 충족된다면, 그것을 제외한 것에 대해서라면 한없이 넉넉한 사랑(‘고린도전서 13장’)을 베풀 수 있다는 소시민적인-하지만 가장 합리적인 욕망 안에 스스로를 가두기 원했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런데, 사적인 ‘욕망’이 과연 시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가능하다면 또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요?
시인은 싸우지 않으면서 전선을 무한으로 확장한다. 시인의 타깃을 바로 너이고 시인 자신의 손가락이다. 시인은 그저 쓸 뿐이고 그게 전부다. 시인이 쓴다는 것은 시에 절반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절반의 생명은 네게로 향한다. 들어라, 절망하면서 꿈꾸며 항소할 것이다. 시인들은 언제나 옳다. 역사는 그들의 편이다.* 시인에게 법칙이란 없다. 모든 행위가 허용돼 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자. 모든 정의와 토대가 저마다 우릴 부른다. 태양이 꽃과 정확하게 교접한 다음에, 조용히 죽기를 바란다면 사랑하지를 말라.*
(*순서대로 호세 E. 파체코, 니콜라이 부하린, 트리스탄 차라를 인유했다.)
- 신동옥, 「비트 8-꽃잎의 시」 부분
전체 6연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위에서 인용한 부분 외에도 페르난두 페소아, 칼 마르크스, 신동문, 헨리 D. 소로, 김수영, 위르겐 테오발디 등의 수많은 인물들의 언급을 인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을 읽고난 우리들은 시인의 표시가 없었다면, 익숙한 유명인들의 말을 인유한 구절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작품에 기록된 말들이 모두 시인과 시의 가능성에 대해서 최대치를 상정한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은 일제히 선언문적으로 발화되고 있는데 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또는 그렇지 않은 것들, 그리고 그것을 ‘인유’의 방식으로 지금 현재 옮겨 적고 있는 시인-신동옥의 진술 모두는 결국 ‘시’ 또는 ‘시인’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매개로 하고 있기에 동일한 크기로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보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작품을 통해 건네받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의미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시인’의 가능성들을 접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시적 언술들이 비판을 통해 스스로 이룩하고자 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시인이 애써 조립해 낸 진술들은 스스로 비판하고자 했던 대상의 부정적 가치와 정확하게 자리바꿈 하고 있습니다. 의미로 가득 찬 진술들은 결국 그것에 대한 모든 질문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바로 여기에서 명확해집니다. 의미가 무화 내지는 상쇄된다거나 하는 단순한 변증적 인식과는 달리 더욱 복잡한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시적 진술이 애초에 사적인 욕망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됩니다.
「타오르는 춤」의 마지막 부분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결국 소시민적 욕망의 표출은 고스란히 “타오르는 춤의 형벌”과 자리바꿈합니다. 나아가 ‘물질세계를 배격한 정서적 상태-부조리한 현실의 극복의지-개인적 욕망의 성취’로 이어지는 목표들의 불가능성에서 도출된 이 ‘형벌’은 자연스럽게 시시포스를 연상시키면서 ‘시인’의 상태를 끝없는 질문만이 존재하는 차원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질문은 마침내 “멀찍”하게 서있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계로서의 “외곽”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마지막에는 다시 하나의 질문이 준비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시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행복한 일이 될 수 있을까요.
창이 내 옆구리를 찌르고, 꼬리는 빠져 시큰하고
벌건 불속에서 갈비뼈를 드러낸 채
울고 있는 날들을 일상이라 부를까.
고통은 모두 참을 수 있지만, 뿔은 아니지.
뿔, 하고 혼잣말을 되뇌면 한동안 행복했는데.
잠깐이라도 내 머릿속을 텅 비어 놓을 수 있었는데.
너덜너덜해진 빈 육체가 되어 울고 있네.
뱀이 몸을 휘감아 숨을 수가 없네.
일상이 일상을 읽는 밤.
내 몸이 불어 터져 고통을 읽는 밤.
뿔을 잃고 읊조리는 밤.
-이재훈, 「뿔」 부분
일상의 시간들을 “오직 죽기 위해 춤추는 날들”로 인식하고 있는 이재훈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모두를 “고통”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정국의 ‘춤’이 그랬던 것처럼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끝없는 ‘형벌’ 속에 스스로 가두는 것과 동일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형벌을 묵묵히 감내하는 ‘시인’은, 시시포스에게 형벌을 내린 제우스조차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처럼 궁극적으로는 모든 질문들을 끌어들입니다. 이 때, 이재훈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뿔”의 존재를 눈여겨 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뿔’은 시인에게 고통을 감당하고 잠시나마 “행복”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대상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드러난 갈비뼈’처럼 비록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확실한 육체성으로 인식되는 것도, “꼬리”처럼 지금은 만져볼 수 없지만 퇴화의 흔적으로나마 존재하는 것도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작품의 마지막 진술에 이르면 ‘뿔’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질문을 지속시키는 힘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질문을 통해 다다른 마지막 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형벌과의 역전을 통해 또 한 번 시적 과정 전부를 새로운 질문 속으로 던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시인들은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끊임없이 ‘뿔’로 밀어 올리며 시를, 질문을 쓰고 또 쓰고 있습니다.
3.
앞에서 저는 시를 쓰는 욕망을 포함하여 모든 욕망들이 퇴적된 층이면서도 어떤 단일한 욕망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가능성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자들로서 시인을 이해해보았습니다. 그들은 시대와의 불화를 고스란히 자신의 고통으로 섭취하면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문의 자리를 예비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같은 행위를 일종의 ‘시적 행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바디우를 따라 시인의 모습에서 ‘사도’를 읽어낼 수 있을 겁니다.
신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상처 입기 쉽고 언제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나약한 육체가 먼저입니다. 죽음으로 증명되는 이 신적인 역설은 바디우의 지적대로라면 진리를 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항수로서의 법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 어떤 관념의 부분도 진리 안에 포함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럴 때, 신의 죽음은 그것을 믿는 특정인에게 오는 기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도래할 수 있는 ‘보편적 개별성’의 사건으로 드디어 전환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바디우가 바울을 ‘사도’로 불러낸 것에 동의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말 그대로 사건적인 진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언하고 구조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자, 즉 사도를 통해서 도래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시작품에서 사도로서 시인의 역할이 보여주는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먹물인가 했더니 맹물이다
소흥 왕희지 사당 앞
노인이 길바닥에서 논어 한 구절을 옮겨놓고 있다
페트 물병에 꼽은 붓으로
한 자 한 자 그어 내리는 획이
왕희지체 틀림없다
앞선 글자들이 지워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그저 그어 내리는 순간들에만
집중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쓰는 글이 있다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쓰는 글도 있구나
드러나는 순간부터 조금씩 지워져 가는,
소멸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글씨체
스치는 붓으로 바닥을 닦는다
쓰고 지워지길 골백번
붓을 밀대걸레 삼아
땡볕에 달아오른 바닥의 열기를 식히며
날아오르는 왕희지체
- 손택수, 「물로 쓰는 왕희지체」
서양에도 물론 캘리그라피(calligraphy)라는 분야가 예술적인 의미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동양, 특히 한자문화권에서 서예(書藝)는 서양의 그것과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글자를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조형적 미의 관점으로 상승시키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글씨를 쓰는 것이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하는 기준이 된다거나, 또는 그 자체로 내적 수양의 방법이 되는 등 보다 정신적인 차원의 문제로 여깁니다. ‘서도(書道)’라는 단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처럼, 글쓰기는 곧 절제의 방식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균형이라는 고양된 정신 상태 자체이자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쓰는 ‘행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쓰는 ‘내용’이다. 글씨를 쓰는 것 자체가 수양의 방법이라면 쓰는 내용은 당연히 그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치를 담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예는 내용과 형식의 자의적 결합 형태인 글자의 한계를 뛰어넘어 정신적 가치와 형식, 나아가 그것을 쓰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필연적인 형태로 한 단계 고양시킨 것으로 보아야 마땅합니다.
손택수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바로 이와 같은 예술로서의 글쓰기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입니다. 한 눈에 봐도 수십 년을 반복했을 것으로 짐작이 가능한 한 ‘노인’이 ‘맹물’을 먹물 삼아 글씨를 쓰고 있는 길거리의 모습은 중국을 여행하다보면 어디에서라도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는 광경입니다. 이때 시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먼저 쓰고 있는 내용이 ‘논어’라는 것, 그리고 글씨가 서체의 기틀을 확립했다고 추앙받는 서성(書聖) 왕희지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완성되고 나면 종종 그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쳐왔던 과정의 의미들은 무시되고, 똑같은 수준의 반복만이 강조될 때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정전(cannon)이 확립되는 과정으로 여길 수도 있을 텐데, 문제는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정전의 확립이 진리와 무관하게 하나의 표준으로 작동하는 논리 속으로 매몰될 위험과 상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은 가치들의 차이를 화폐 형식 안에 일원화함으로써 무차별적으로 매개가 가능한 지대의 확산과 재편성을 유일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손택수가 다시 시인으로서 개입하고 있는 곳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시적 진술을 통해 선명하게 보이는 대로 ‘시인’은 바라보고 있던 풍경을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쓰는” 행위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쓰는 글”로 읽어 내고 있습니다. 즉, 정전을 만들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가능성에 순수하게 충실한 사도로서 스스로 ‘시인이라는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는 장면의 목격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인의 글쓰기’를 완성에 도달하려는 움직임보다는 그저 끝없이 “바닥을 닦”는 행위로서 보다 주목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통해 현실에서 표준이라는 이름 아래 가치들이 상품 목록처럼 체계화되어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조금씩 지워져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결국 시를 읽어가던 우리들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시인이 “틀림없다”고 힘주어 말했던 왕희지체가 “날아오르는” 장면에서 진리가 고양된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글자에 결부되고 축적되어 온 의미들이 모두 부서져나가는 이른바 ‘실재의 지점’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나는 요의를 느낀다
요의를 사실로 만들기 위해 오줌은 새어나오고
오줌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사타구니는 벌어진다
슬리퍼를 신기 위해 발가락이 자라난 것은 아니라고 해도
결국 당신은 눈물을 위해 눈동자를 깜빡이며
박수를 위해 손바닥을 마주치게 될 것이다
-황성희, 「발가락 마술」
의미를 기억하고 하나의 정전으로 보존하는 것과 거리를 둔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것은 ‘바울의 텍스트’를 만나는 일과 유사합니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소파, 빨래건조대’ 등 자신에게 익숙한 사물들이 배치된 익숙한 공간(‘거실’)에 앉아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처지에 골몰한 화자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녹아든 일상적 절차 내지는 사물을 비롯하여 기관(organ)에 이르기까지 사회와 결부되어 있던 모든 의미와 위계에 전도(顚倒)를 선언합니다. 이것은 바디우가 상세히 밝히고 있는 사도의 역할을 상기시킵니다. 황성희의 시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것처럼, 사도는 기존의 정황적 사태와는 무관하고 또한 그것들과 연계되어 있는 그 어떤 조직(organization)으로부터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사건’을 선언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황성희의 시를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새롭게 진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 이병률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밀 하나를 이야기해야겠다
누군가 올 거라는 가정하에서
가끔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간다는 비밀 하나를
어디서 누가 올 것인지
그것이 몇 시인지
남의 단추를 내 셔츠에
채울 수 없는 것처럼 모른다
녹으려는 시간을 붙잡자며
그때마다 억세게 터미널엘 나갔다
한 말의 소금을
한 잔의 물로 녹이자는 사람처럼
출발하고 도착하는 시간들을 기다렸다
떠난다는 말도 도착한다는 말도
결국은 헛된 말일 것이므로
터미널에 가서 봄처럼 지냈다
나직하게 비밀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가끔 내가 사라지는 것은
그곳에 가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오해가 걷힐 것 같아
최선을 다해 당신에게 말하건대
나는 가끔씩 사라져서
터미널에 나가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
-이병률, 「이구아수 폭포 가는 방법」 전문.
일상의 진술이라면 이 시는 그 목표, 즉 말없이 사라지는 자신의 행적에 대한 오해의 해결을 달성하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 몇 시에 오는지도 모르는 채 “누군가 올 거라는 가정하에” 터미널을 간다는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인’의 진술에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시인은 분명히 ‘비밀’을 ‘이야기한다’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제목을 같이 고려해서 판단해보면 이것은 ①내밀한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비밀)를 드러내는 동시에 ②그것의 일반적인 확산(이야기)과 더불어 ③구체적인 목표를 새롭게 재구성(이구아수 폭포 가는 방법)해서 드러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시 전체를 세 가지 전략 아래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바디우가 진리를 사유하는 데에 제시한 세 가지 개념에 대한 진술과 닮아 있습니다. 그의 말을 사도 바울(현성환 옮김, 새물결, 2008. 34쪽)에서 그대로 옮겨 ‘시인’의 진술과 나란히 두어보겠습니다.
진리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개념이 필요하다. 선언하는 순간에 주체를 명명하는 개념(피스티스. 통상 ‘믿음’으로 번역하지만 ‘확신’으로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과 이 확신을 투쟁적으로 말 건네는 순간에 주체를 명명하는 개념(아가페. 통상 ‘자애’라고 번역하지만 ‘사랑’으로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리 과정은 완성된 성격을 가진다는 가정에 의해 주체에게 부여되는 전위(轉位)의 힘에 따라 주체를 명명하는 개념(엘피스. 통상 ‘희망’이라고 번역하지만 ‘확실성’으로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일상적 배경으로서의 터미널에서라면 우리는 그곳을 명확한 목적 아래에서만 이해 가능한 공간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와 의미, 나아가 터미널에 이르기까지 접촉하고 이용하는 모든 것들을 논리적(현실적)으로 이해 가능한 하나의 체계 안에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 터미널은 우리의 이해를 벗어난 곳에서도 여전히 그 기능-출발과 도착, 떠남과 만남-을 언제라도 반복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올거라는 가정하에서” “시간들을 기다”리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터미널’의 가능성을 명명함으로써 ‘진리’를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드디어 우리는 ‘터미널’을 일상적 배경이 아니라 ‘보편적 개별성’의 의미가 도해(圖解)된 사건적 공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죽는다면, 저는 도시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더없이 더러운 것들을 왼쪽으로, 왼쪽으로 휘감으며 밀폐된 방에 차오를 것입니다. 누군가 그 문을 열게 된다면…….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어머니가
시체를 찾기 위해
여러 대의 버스를 갈아타고
아들의 방을 찾아 헤매고 계시는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어디나 비슷한 관 뚜껑 같은 얼굴의 집들을 어머니는
부은 다리를 절며 돌아보고, 돌아보고 하실 것입니다.
장례식장 가는 길은 눈에 설고,
차가운 것들이 잔뜩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서 잠시 빛나는데,
그렇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장이지, 「문상 가는 먼 길」 부분.
하지만, 우리에게 사도로서의 시인이 필요한 이유가 ‘아버지의 담론’을 소거시킨 자리에서 ‘진리’를 사유하고 사건을 선언하는 소거의 능력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장이지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이고 냉정한 자신의 현실로 껴안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죽음”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문상’을 가는 길에서 자신의 죽음을,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서 보편적인 죽음을 이끌어내지만 종국에는 차마 ‘어머니의 죽음’에 이르지 못하는 바로 그 나약한 능력 말입니다. 바로 이같은 ‘시인’의 ‘나약함’만이 절대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도 자신의 안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전제조건이자 유일한 방편이며, 이것을 상기시키는 것만이 우리 시의 유일한 전망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4.
시에 관해 이런저런 말들을 하다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만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비롯한 문학과 예술 장르 모두를 염두에 두었을 때도 이같은 사실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시 장르에 조금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특히 문학작품이 현실과 만나는 지점에 주목한다면, 시 장르의 현실적 연관성에 대해 우리가 보다 복합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작품 속 등장인물이나 공간적 배경 등을 작가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자전소설이라는 명목으로 작품을 썼을 때조차 말이지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서 여러 작품을 남긴 프리모 레비의 소설이 주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감동 역시 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의 ‘증언’은 개인이 겪은 끔찍한 일들에 대한 완벽한 사실전달이지만, 동시에 ‘유대인’ 내지는 ‘일부 독일인’에 머물러 있는 편협한 경험의 세계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이야기’의 형태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즉, 소설가의 그 어떤 특수한 경험도 문학적 허구성의 단계 안으로 편입되어야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럴 때, 문학적 허구성은 우리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다시 구체적인 현실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시의 경우 이와는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시인의 경험은 소설에 비해 현실과의 연관성에서 보다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시인이라는 존재나 또는 개별 시작품을 대할 때 정서적으로 고양된 상태를 먼저 떠올리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깨달음에 도달한 존재를 시인의 전범으로 삼는 것이 낯설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한 초월적 깨달음과 혼돈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시가 보여주는 ‘각성’의 세계관은 현실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어떤 깨달음을 우리에게 가슴 시리도록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만, 현실의 ‘형상화’ 작업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급박한 상황을 맞은 현실에서 문학으로 돌파구를 찾고자 할 때 시의 형태가 먼저 선택되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그 어떤 초월적 기표도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습니다. 아니, 시적 세계 안에서 고고히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은 그 때문에 오히려 현실에서 그대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 채 그 ‘깃발’ 밑에 사람들을 모으고, 끝내는 피를 흘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게 만듭니다. 즉, 상징은 현실적 원관념의 세계와 더 많은 접면을 가질수록 더욱 큰 ‘시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집니다.
여기서, 그 누구보다 시의 본질에 대해 진지한 탐색을 했던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같이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시인의 말이 자신의 것인 동시에 타인의 것이므로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 작품 역시 역사적 말의 구성체이지만, 동시에 사회의 실존에 앞선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인 말은 결국 사회적 생산물이자 사회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에서 상호 보완적이고 분리불가능하며 모순적인 두 차원에서 모두 역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글의 처음에 고백한 것처럼 시는 달성될 수 없는 목표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쓰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와 현실(역사)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듯 보이면서도 같이 존재하는 시의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있습니다.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시선의 무게추를 옮겨보면 여기서 다소 흥미로운 지점이 또 하나 생겨납니다. 시 작품이 현실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의 이해가 비교적 손쉽게 이루어진다면, 거꾸로 형상화의 힘이 소거된 현실의 투박함 속에서 ‘시적 힘’을 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다소 난항을 겪게 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시를 읽는 우리들은 단순한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힘든 현실과 견주어 위안을 얻게 되는 일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시와 현실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의 미로에 빠져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시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바로 이 미로에서 길을 잃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때문에 작품을 읽는 우리들은 평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의 단순한 주제의식과는 달리,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의 지점들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시문학은 자신의 개별적인 체험들을 독자들 스스로 시적인 경험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벤야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경험(Erfahrung)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의 시문학이 새로운 시적 역할을 확장해나가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시인들이 어떤 욕망이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구조물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시를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능성’ 그 자체를 다양하게 실험해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제적 이익과는 무관한 작업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원동력으로 이해해 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언뜻 바디우가 말한 ‘사도’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었습니다. 모든 의미와 위계에 그들이 도전장을 내미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앞에 닥쳐올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진리를 쫒는 안전한 길보다는 ‘사건’의 선언에 동참함으로써 ‘보편적 개별성’에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사실 ‘보편적 개별성’의 개념을 썩 잘 이해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다만 ‘사도’로서 현실과 관계 맺는 양상을 살펴보았을 때에 결국에는 ‘율법’과 ‘현실’이, 또한 ‘시적인 것’과 ‘일상’이 종횡으로 뒤섞인 상태 바로 그것이 ‘보편적 개별성’의 선행조건이자 최종결과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혼란 상태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예수’(역시 사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가 당시에는 혼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율법의 입장에서 일상은 완전한 통제가 가능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육체적 고통이나 정서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킬지라도 말이지요. 그런 방식으로 점점 현실과 동떨어져서 율법은 자족적인 체계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일상은 율법에 몸을 내어주기를 예비하는 공간으로 전락합니다. 이제 거꾸로 일상의 인간들은 율법에 다다르기 위해 육체적 고통이나 정서적인 거부감을 기꺼이 감내하게 되는 믿을 수 없는 역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시인-사도는 이것의 경계를 스스로 무화시키고 수많은 이해의 관점을 도입합니다. 그리고 그 관점들이 일으키는 돌발적인 공명을 준비하고, 또 그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무엇이 ‘시적인 것’인지, 무엇이 ‘일상’인지 묻는 우리들을 조롱합니다.
우리의 시인들이 도달한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파스의 말을 한 번 더 빌려오자면, 그들은 경험을 추상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순간들을 환원이 불가능한 특수성에 가득 찬 동시에 다른 어떤 순간에도 같은 크기와 의미로 반복되고 재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순간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 역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는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상을 우리들과 같이 하면서 잠시, 아주 잠시 시인이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시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 어떤 질문들을 반복할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을 따라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남승원 : 문학평론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계간 <포지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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