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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집중조명/백인덕/갈애와 풍장 사이 ; '고백'으로서의 시 - 김인자의 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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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4,143회 작성일 15-07-13 09:55

본문

집중조명
백인덕

갈애(渴愛)와 풍장(風葬) 사이; ‘고백’으로서의 시
-김인자의 시 세계


1.
불현 듯, 생명의 필멸성 앞에서 파스칼의 『팡세』 한 구절, “인간은 자연의 아주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없애기 위하여 온 우주가 동원될 필요는 없다. 약간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족하다. 그러나 우주가 인간을 없앨 때 인간은 우주보다 더 고귀한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아마도, 원고는 마감기한을 이미 넘겼고 이 저녁 창밖에선 요란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라면 이번에 읽게 된 시들이 지극히 낮은 음성으로 서정적 주체의 저간의 응결과 해소를 복잡한 시적 수법에 기탁하지 않고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게 인용했으니 파스칼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물론 인간 정신, 특히 이성적 소구를 높게 본 계몽주의자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자연이 만든 갈대 중 가장 ‘연약한’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을숙도나 순천만 혹은 신불산 억새 등은 다 인간보다는 ‘강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물론 이는 생명력의 차원에서 가능한 비교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삶이 어떤 정신적 고귀함만큼이나 충일한 생명력을 강조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비교가 영 쓸모없지는 않으리라.
김인자 시인의 이번 신작들은(시인은 필자의 『현대시학』 ‘시를 찾아서’ 선배님인데, 오랜만에 발표한 신작시에 오히려 누가 되지 않을까 약간 염려가 된다) ‘어떤 고백’의 음조를 배면에 깔고 있다. 고백이란 ‘후회’와는 그 심리적 정황이나 현재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앞선 후회란 없듯이 미래를 향한 고백도 사실은 성립하기 어렵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예견은 어쩌면 인간적 차원을 아주 멀리 벗어난 뒤에나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폭설 다녀가고
고요한 어둠 속
길 잃은 짐승처럼 
나는 몸을 웅크린다 
백야의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물결에 쓸려 동그랗게 된 
그리움의 자갈들이 
어울려 속삭이는 
강기슭에 닿는다 
자작나무숲 너머로 
바람의 역류가 
온 정신을 
한곳으로 몰아간다 
그곳에 까마중처럼 
끈덕진 냄새를 풍기는 
바람 같은 사람이 있다고
눈 위에 한 줄 고백을 쓴다 
-「고백」 전문

무엇을 향한, 누구의 고백이었을까?(필자는 이 작품을 정서의 유출로 읽는다면, ‘누구를 향한, 어떤 고백’이라고 물었어야 한다고 본다.) ‘길 잃은 짐승처럼/나는 몸을 웅크린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혹은 ‘폭설’, ‘백야’와 같은 어휘들이 환기하는 것처럼 화자는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고백’은 과거의 잊지 못할, 아니 잊히지 않는 한 순간에 대한 진술 이상의 아무 의미도 형성할 수 없다. 
사실 시인이 끊임없이 감정이입이라는 방법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결국 타자와의 공감이라는 미적 목적에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극적인 비교가 숨어 있다. “물결에 쓸려 동그랗게 된/그리움의 자갈”과 “끈덕진 냄새를 풍기는/바람 같은 사람”의 대비가 그것이다. 이를 축약해서 ‘자갈/사람’의 대비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폭설’, ‘백야’ 등에서 유추할 수 있는 먼 극지방에서 자갈이 생성되는 방식을. 그것은 산 정상에서 빙하에 의해 쓸려 내려와 수 만년 차가운 물살에 깎이고 깎여야 몽글몽글한 자갈이 된다. 반면에 사람은 “자작나무 숲 너머로/바람의 역류가/온 정신을/한 곳으로 몰”아 갔을 때 기억나는, 기억해 낼 수 있는 존재다. 필자는 천년을 사는 바람을 들은 바 없다. 한 곳으로 불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다른 바람일 뿐, 그것을 동일시하려는 바람은 오직 인간의 헛된 망상일 뿐이다. 시인은 “눈 위에 한 줄 고백을 쓴다”고 시를 마무리 짓고 있지만. 추측컨대 고백의 내용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아직 ‘자갈/바람’ 사이에서 언제나 여행자처럼 이 길, 저 길을 탐색하는 영혼이 시인을 휩싸고 있기 때문이다.
집과 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면, 게다가 그 선택지가 릴케식이거나 하이데거식으로 규정되어 있다면, 혹 당신의 선택이 궁금해진다. 물론 필자는 제 3의 방식이 어쩌고, 가로지르기니 융합이니 하면서 대답을 회피할 것이다. 집 떠남과 여행이 오롯이 같은 의미일 수 없듯이, 존재를 찾는 길과 시적 의미 생성의 길은 좀처럼 쉽게 겹쳐질 수 없다. 이렇게 저렇게, 많은 말들을 무화(無化)하며 김인자 시인은 전범(典範)이 될 수 있는 작품 한 편을 시적 기운이 희박한 이 도시에 띄운다.

라다크를 순례할 때다. 거친 땅 어디에도 생명이 움트리라곤 상상 못했는데,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작은 꽃으로 기록될 좁쌀만한 흰 꽃 한 송이를 마주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천년은 비가 내리지 않은 듯한 마른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꽃을「 보는데 그 작은 몸에 가시까지 달았다. 가시 때문에 선 듯 다가서지 못하는 것인지 쌀알만한 나비 한 마리가 주변을 맴돈다. 지나가는 길이 아닌 건 분명하다. 꽃은 몸을 흔들어 존재감을 알렸다. 갈애(渴愛)였다. 나는 물병을 꺼내 꽃에게 뿌려주었다. 생애 첫 소나기였는지 꽃의 심장이 파르르 뛰는 게 느껴졌다. 만지기는커녕 보는 것만으로도 짠해지는, 몇 만 번의 계절을 건너 비로소 만난 꽃과 나비의 진아(眞我), 네가 나였으면 내가 너였으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다 날이 저문다. 꽃은 자신을 꽃이라 하지 않았고 나비 또한 자신을 나비라 하지 않았지만 향기의 파장(波長)에 끌려 그 까마득한 고도에서의 하룻밤 재회라, 수만 페이지 경전으로도 다 못 쓸 그들의 사랑을 나는 '애련'이라 부르며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애련(愛戀)」 전문

작품의 여러 정황상 지식이나 기억, 상상이 아닌 실 체험에서 이 시가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라다크를 순례할 때다’라는 첫 구절은 이미 무언가 새롭고 차원 높은 깨달음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한다. 이 잿빛 도시의 시민들이란 늘 상 허리 굽힌 개미처럼 보일지라도 그들 손에는 정보의 트래픽이 차고 넘치는 스마트 폰이 들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인이 이 기대를 충족하면서 어긋나게 한 것은 ‘좁쌀 만 한’ 꽃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게다가 ‘쌀알 만 한 나비’라니, 시인들이 원래 과장법(과소법)에 능숙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시각 이미지로 확인하고 싶은 충동까지 인다. 어쨌든 시인은 “천년은 비가 내리지 않은 듯한 마른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그 꽃을 보아야 한다. 이 자세는 곧바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연상시키고 그 ‘좁쌀 만 한 흰 꽃’이 불두화의 종자가 아닐까 상상하게 한다. 아니 이 연상과 상상은 경이를 대하는 필자의 왜곡된 자세의 산물일 뿐, 이 작품의 이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김인자 시인은 아주 의미심장한 진술로 시의 방향을 전환한다. 주변을 맴도는 나비와 몸을 흔들어 존재를 알리는 꽃 사이에서 시인은 ‘갈애’를 본다. 갈애의 불교적 의미나 사전적 의미를 차지하고라도 죽고 못 살아 가시가 있는 좁쌀 만 한 꽃과 그 주위를 맴도는 쌀알 만 한 나비의 길항, 그 둘의 거리는 얼마나 극미했을 것인가? 그러나 서로가 다르게 정위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양극과 음극처럼 만나면 서로를 밀어낼 수밖에 없는 미소한 현상을 통해 시인은 어쩌면 우주를 인생을 이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꽃과 나비의 진아(眞我)를 목격한 나는, 시적 화자는 “수만 페이지 경전으로도 다 못 쓸 그들의 사랑을 나는 ‘애련’이라 부르며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시인은 그것이 ‘경전’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인간적 행위로 인해 성립, 확인된 구조와는 다른 무엇을 생각한다. ‘길애였다’는 발견의 시적 발화일 터지만, 시인은 이 모두를 둘러싸는 심정적, 아니 감성적 범주로서 ‘애련’을 말하고 있다. 천년이 지속된 목마름이란, 뒤집어 말하면 천년을 기다린 갈증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어쩌면 “꽃은 꽃이라 하지 않았고 나비 또한 자신을 나비라 하지 않았으니”라고 길항을 무화한다, 어쩌면 여기에는 한 가지 사실이 비시적으로 종횡한다, 가보지 않았으면 말하지 말 것.
시인의 문체론, 아니 시작의 일반론이 가슴에 와 닿는다. “ 지난겨울 제주에서의 내가 만난 바람을 번역할 수 있다면, 너무 많이 읽어서 찐빵처럼 부풀었거나 귀퉁이가 닳은 백석의 시집을 닮았을 거다. 내겐 진실 아닌 것에 사탕을 바를 재주가 없으니, 그러니 지난겨울 제주의 그 바람은 겨울 끝 내 안의 아스라한 절벽에 핀 복수초의 기호와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형식이 파괴된 문장이라도 언어는 기호가 구조화된 것, 바른 언어구조는 철저하게 규칙과 체계를 이루고 있고, 그 규칙과 체계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니 문체가 곧 사람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삶의 결처럼 저마다 다양한 개성적인 표현과 창조적인 글쓰기가 가능하고 사랑받는 것도 그런 연유일 거다. 자신만의 문체 그 독창성은 말할 것도 없고,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내가 언어를 따로 연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그것이 시라고 다르겠는가.”그것이 시인이 믿고 싶은 세계와 시적 진실(담보할 수 있다면)의 일단일 것이다;
아름다음, 혹은 미적 가치라는 자기 지준을 잃었을 때. 우린 뜻하지 않은 이방인이 된다. 아무 전언도 없이, 유추할 수 있는 단추 하나도 없이 시인은‘ 시인의 길러 꺾고 휘어지다. 여기 한 시가 있다.

딸은 부푸러기, 딸은 새싹, 딸은 솜사탕, 딸은 어여쁜 장난감, 딸은 풍선, 딸은 소풍바구니, 딸은 신기루, 딸은 사과꽃, 딸은 꽃밭, 딸은 종달새, 딸은 깃발, 딸은 어디로 사라질지 모를 바람, 딸은 가르랑대는 새끼 고양이, 딸은 망고열매, 딸은 호호 불어줘야 할 아픈 손가락, 딸은 걱정나무, 딸은 슬픈 새, 

어느새 성년이 되고 독립투사가 된 두 딸은 6월의 푸른 초장, 타고 올라도 좋을 사다리, 밤길을 함께 걸어갈 동지, 청춘의 추종자.

내게도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고, 선생님이 되고,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고, 절망과 눈물이 되고, 그 눈물로 종종 나를 먹여 살리기도 하는 딸이 있다.

'검은 걱정구름을 폴폴 넘는 새'가 두 마리나 있다.
-「딸이 있다」 부분

시인은 말한다. 애써 형성했던 모든 길과 집에 대한 사유를 무화하면서. 감정에 대한 일의적, 즉, 즉긱적 표현에 대한 호의를 술기지 않으면서, 시인은 “검은 구름을 풀풀 넘는 새가 두 마리니나 있다”고 자위가 아닌 자랑을 숨기지 안흔다. 그렇다면, 김인자 시인은 시인이라는 것보다 다른 그 무멋으로 자기 정위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시인이기 보다는 여행객 한 낙서를 시로 다시 기입하는 이 행위는 고되다. 아니 이 어리석은 고민은 시인이 스스로 여행자로라고 자기 정위하지 않았을 때, 시인의 목소리가 과연 그것과 닮았는가를 묻고 있다. 필자는 시인이 여행한 시간과 공간을 알지 못하지만, 시적 형상화에서 어떻게 시인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그도 한때는 매혹이었을, 
꽃 진 자리마다 가득한 향기
밤새 쓴 문장의 파지들이 시나브로 널려있는 책상

떠나기 전 화분에 묻고 왔을 작은 약속 하나 
가지를 떠나 한발 한발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도 몸은 땅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와 연락이 끊긴 지 며칠째
피안과 차안을 넘나드는 저 마른 꽃의 잔향 

꽃들이 잠들어 있는 서재  
창으로 스민 햇살이 얇은 바람수의를 입혀주며  
꽃의 주검을 조문하는 늦은 7월의 오후

꽃이 꽃다운 건 
스스로 눈물을 닦을 줄 안다는 것
그러나 끝내 자신이 꽃인 줄 몰랐기에
꽃일 수밖에 없는 꽃

그도 처음엔 아무 것도 모른 채 
등 떠밀려온 여리디 여린 싹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꽃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치자꽃이 되었을 것이다
-「마른 치자꽃을 위한 노래」 전뭄

세계, 혹은 과거의 사건이 오늘의 나를 규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옅은 비유가 보인다. 한때 꽃이었지만 마르고  말라 그 형체를 잃었지만, 시인은 형상 이전의 원초적인 향기, 또는 본질적 심성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만, 시적 주체가 명제를 확인, 강화하지 않는 데서 이 모든 것은 예비 되었다.
이 작품은 시간의 비가역성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시적 화자는 이미 마른 꽃, ‘치자꽃’을 보고 있지만, 이를 통해 시인은 하나의 명제를 기획하지만. 가령“꽃이 꽃다운 건/스스로 눈물을 닦을 줄 안다는 것”을 참인 명제로 만들기 위해 다른 구절의 보강이 필요한데 불행하게도 난 찾을 수 없다. 그것은 그냥 허공을 떠돌 자기 위안의 논리처럼 보인다,

김인자 시인은 “꽃 진 자리마다 가득한 향기”를 시인의 시에 싣고자 한다. 그것은 가만히 지켜봤던 갈애와 풍장의 여러 몸짓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ㅐ, 시인은 오랜 여행길에서 마치 그것이 처음 만나게 되는 세계의 표샹일까? 시인은 여려 질문을 던지며, 작품 속에서는 스스로를 우회하거나 재배치하고 있다. 시인은 분명한 확실한 사실의 기록으써 풍장의 한 마디가 역었는데, 갈애와  연결되지 않는다. 많은 시인들이 오늘의 ‘갈애’로 조 사막의 밑바닥을 헤치리라. 시인은 묻는다.  시인은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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