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8호/집중조명/박서영/말들이 돋아나는 거기, 은하수 - 정치산의 신작시
페이지 정보

본문
집중조명
박서영
말들이 돋아나는 거기, 은하수
1
일상은 어떤 보편적인 패턴을 갖고 있다. 그 속에는 폭력적인 이미지들과 반복적인 지루한 리듬들과 그것들을 벗어나려는 몽상과 환상이 혼재해 있다. 환상이 일상의 의미를 벗어나려하지 않을 때 그곳에는 경험적 사실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경험은 날것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이 일상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그래서 새로운 의미를 품게 된다. 시가 진부함을 벗어나는 이유다. 일상적 이미지가 몇 겹의 과정을 거쳐 시인의 머리, 혹은 심장에서 걸러지고 또 걸러져, 시인의 감각에 의해 새로 탄생하는 순간이 있다. 처음 시가 탄생하게 된 자리를 쓰다듬는 게 아니라 먼 곳에서 시를 불러오는 경우가 그렇다. 일상의 가까운 곳을 보여주지 않고, 시인의 개인적 사유가 튀어나오는 시를 읽게 될 때 독자는 당혹감을 느낀다. 시 속에 명확한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시. 미지의 세계에 몸을 담으려는 시. 보이는 것을 재현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려는 시. 하나의 이미지를 묘사하거나 진술하지 않고 말이 흘러가 버리는 시. 도망쳐버리는 시인. 어떤 시들은 곧잘 이런 직관에 자신의 몸을 맡긴 채 흘러가 버리곤 한다. 그래서 분명한 의미보다는 아름다운 감각에 몸을 맡긴 시를 읽게 될 때 독자는 시인의 아름다움을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산의 시들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래 인용한 부분은 시인이 이번 신작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당신은 당신의 경험에 갇혀 있습니다.
문을 만들어 탈출해야 합니다.
숨구멍을 틔어 놓았습니까?
「그의 말을 훔치다·3」부분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에 갇힌 일상에 문을 만들어 탈출해야 하고, 숨구멍을 틔어놓아야 한다는 전언이다. 갑갑한 경험이 배치해 놓은 일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욕망이 읽힌다. 그 욕망은 상상력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시인에 의하면 일상의 욕망은 천개의 눈과 천 개의 말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것이다. 말들은 곧잘 자라고 변주된다. 말들은 어떤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며 돋아나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아래 인용한 시를 보면,
그의 손에서 천개의 눈이 자라나 천개의 꽃으로 핍니다.
천개의 눈에서 천개의 말이 피어납니다. 천개의 눈과 천개의 꽃,
천개의 말이 당신의 방을 빙글빙글 돕니다.
북극성은 여전히 제자리입니다.
시간을 멈춘 벽이 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의 어깨에서 뱀들이 자랍니다.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나는 뱀.
제 살을 깎아 먹고 다시 돋아나는 뱀들이 자랍니다.
그의 어깨에서 말이 돋아납니다. 잘라도 잘라내어도
다시 돋아나는 말들이 날개로 피어납니다.
날개로 피어난 말들은 천개의 문입니다.
그 문밖에 시간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기억을 먹고, 생각을 먹고, 꽃을 먹고, 말문이 열립니다.
말문이 트입니다. 그의 어깨는 말들이 드나드는 문,
닫아도, 닫아도 자꾸만 열리는 그의 어깨에서
그대가 돋아납니다. 그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천안천화(千眼千話)」 전문
손에서 자란 “천 개의 눈”은 “천 개의 꽃”으로 피고, 다시 “천 개의 눈”에서 “천 개의 말”이 핀다고 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북극성에서 멈춘 시간의 벽이 문을 만들었고, 그 문(숨구멍)을 통해 천 개의 말들이 자라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초에 눈을 통해 바라본 것들은, 천 개의 눈-천 개의 꽃-천 개의 말을 거쳐-자라나는 뱀-피어나는 날개-다시 천개의 문을 거쳐-밀려오는 시간-기억, 생각, 꽃, 열리는 말문-돋아나는 그대 등으로 다양하게 이미지가 변주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이렇게 다양하게 변주되는 시적언어들(말)은 곧 숨구멍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시적 표현들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핍니다”,“돕니다”,“자랍니다”,“열립니다”,“쏟아집니다”.“만들어놓고 있습니다”.“튀어나온다”,“넘친다”,“걸어 나온다” 등에서 느껴지는 것은 상승의 기운이다. 말들은 바닥에 가라앉거나 숨어있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 다니고 있다. 말들은 그렇게 흘러 다니면서 생성되고 또 다른 것들과 접 붙기도 한다. 인용한 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말들이 태어나는 장소다. 손-눈-어깨로 움직이는 시선은 곧 몸을 의미 한다. 인간의 몸은 “기억을 먹고, 생각을 먹고, 꽃을 먹고, 말문이 ”열리는 곳이다. 곧 몸은 “말들이 드나드는 문”인 셈이다. 비록 “어깨”라는 특정한 부위를 통해 ‘그대’를 생각하고 있지만, 그대는 온 몸 속을 흘러 다니는 말들에 다름 아니다.
돌덩이가 발에 채여 굴러다닙니다.
한 번 구우면 금덩이가 되고
두 번 구우면 다이아몬드가 되고
세 번 구우면 은하수의 별이 됩니다.
구우면 구울수록 변하는 돌덩이를
아흔아홉 번 구웠더니 그녀가 됩니다.
구우면 구울수록 변한다는 돌덩이를
아흔아홉 번을 구웠더니 뻥튀기가 됩니다.
그의 말은 참말보다 더 매력적인 거짓말들,
그래도 그의 말이 믿고 싶어
아직은 은하수별로만 반짝이는 돌덩이를
자꾸만 굽고 있습니다. 정말 그녀가 되었습니까?
그녀는 간데없고 우루루 뻥튀기가 쏟아집니다.
「그의 말을 훔치다·3」부분
시 속에 나오는 “돌덩이”를 ‘말덩이’로 바꿔 읽어본다. 앞에 인용한 시와 같이 ‘말’들은 다양하게 바뀌고 있다. 우선 말들도 발에 채여 굴러다니기 일쑤다. 말들은 소문처럼 번져나가고 급기야는 “은하수의 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말은 어떻게 굽느냐에 따라 형태와 내용이 변하고 본질이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래도 그의 말이 믿고 싶어”라고 한다. 믿고 싶기에, 어쩌면 이미 믿고 있기에 “은하수별로만 반짝이”고 있다고도 한다.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은 은하수에서 온 것이다. 비루한 일상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환상과 몽상이 뒤섞여 있다. 결국 그녀의 현실은 ‘뻥튀기’가 되어 쏟아지는 것. 그러나 그것이 ‘숨구멍’이기에 계속 돌덩이를, 아니 말덩이를 구워야 한다. ‘은하수의 별’이 될 때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그리움이 될 때까지.
지금까지 쏟아놓은 그의 말들은
참말보다 더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거짓말들,
그래도 당신은 그의 말이 믿고 싶어져
한여름 태양 아래 다시 돌덩이를 굽고 있습니다.
숨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훔치다·3」부분
그의 말들은 “참말보다 더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거짓말들”이기 때문에 당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돌덩이’는 ‘말덩이’가 되고, 그 돌덩이는 ‘심장’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것은 멈출 수 없고 끝이 없다. 잘라내도 계속 자란다. 시인은 그 말들을 태양아래서 굽고 있다. 은하수에서 불러오고 있다. 숨구멍을 틔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2
은하수에서 말들이 왔다. 그런데 은하수는 정말 먼 곳에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일상 곁에 슬그머니 와 있는 건 아닐까. 과거는 정말 과거일 뿐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현실은 곧잘 우리를 배반한다. 현실은 “도깨비 난장”과 같은 곳이다. 천개의 눈으로 말하는 천 개의 언어들이 은하수를 가득 채운다. 은하수에 떠있는 말들은 점점이 떠다닐 뿐, 어떤 일정한 배치 속에 붙들려 있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산 시인의 신작시는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검은 길을 따라 개미가 기어가고 벌레들이 기어간다.
소년과 소녀가 기어가고 그와 그녀가 기어간다.
수박을 깨면 도망간 그녀가 걸어 나오고
도망간 그가 허우적허우적 걸어 나온다.
십년 전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우당탕탕 도깨비방망이가 튀어나온다.
검은 반점을 타고
그녀가 훔쳐간 태양이 튀어 나오고
그가 훔쳐간 태양이 튀어 나온다.
도깨비방망이 훠이훠이 춤을 추고
어머니 까무룩 먼 길 떠나신다.
검은 길을 따라 태양이 숨어들고 달빛이 스며들고
그와 그녀가 스며들고 빙하가 숨어든다.
검푸른 줄을 타고 한여름 밤이 도깨비 난장이다. 「그의 말을 훔치다·4 -수박」 전문
인용한 시에서 “수박”은 은하수와 같다. 수박은 온전한 한 세계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수박의 모습을 통해 형상화된 것들을 보자. “검은 길”, “검은 반점” “검푸른 줄” 등은 수박의 무늬다. 시인은 그 길을 따라 “개미가 기어가고 벌레가 기어간”다고 한다. 급기야는 “소년과 소녀가 기어가고 그와 그녀가 기어간”다고 한다. 그들은 수박 이라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수박이 깨지면 다시 걸어 나오는 존재다. 수박을 들여다보며 시인은 더 깊은 몽상 속으로 빠져든다. “어머니”가 걸어 나오는가 하면, “도깨비 방망이가”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일상, 체험에 대해 시를 건져 올리다가 불현듯 우주의 상상력으로 나아간다. “검은 반점을 타고/그녀가 훔쳐간 태양이
튀어 나오고/그가 훔쳐간 태양이 튀어 나온다”는 표현에서 말들이 은하수에서 시작되었고, 은하수를 떠돌아다닌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은 은하수별로만 반짝이는 돌덩이들”(「그의 말을 훔치다·3」)에서도 알 수 있듯 정치산 시인에게 ‘은하수’는 ‘숨구멍’처럼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야 계속 말을 구울 수 있고, 사랑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의 상상력은 다시 수박이라는 현실에 스며든다. “검은 길을 따라 태양이 숨어들고 달빛이 스며들고/그와 그녀가 스며들고 빙하가 숨어든다./검푸른 줄을 타고 한여름 밤이 도깨비 난장이다.”는 수박의 기본적인 속성과 특성에 기댄 표현이다. 시적 소재의 특성을 잘 이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우주적 관심사는 이번 신작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삼백육십오일 해가 깃들고 달이 깃드는 거기가 있다.”(「그의 말을 훔치다·5」),“북극성은 여전히 제자리입니다.”(「천안천화(千眼千話)」), “은하수별로만 반짝이는 돌덩이들”(「그의 말을 훔치다·3」), “번개 치면 후다닥 번쩍 정신 차리고”(「여우비」) 등에서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우주적 상상력은 날씨와 계절의 영향아래 시인을 앉아 있게 한다.
살짝 눈 흘기며 눈물 흘리는 걸 보았지.
살랑살랑 보일락 말락 살짝살짝 내비치며
살그머니 유혹하며 살랑대는 것도 보았어.
감쪽같이 숨겨 놓고 폭폭 안기는 것도,
빛나는 아홉 개의 표정은 들키지 않았어.
호리병 속에서 몽글몽글 안개 피우며
살짝살짝 눈짓 보내고 있는 것도,
그 눈짓, 그 몸짓, 눈치 채지 못했어.
간도 쓸개도 다 빼가는 걸,
다 녹아내리는 걸 눈치 채지 못했어.
번개 치면 후다닥 번쩍 정신 차리고
깜찍하게, 해맑게, 천진한 얼굴로
그냥,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을 거야.
후드득, 잠깐 그의 가슴에 실종된 빗방울이잖아.
그냥 잠깐 적시고 지나간 거잖아?
해가 환해지잖아. 한 눈 찡긋 감고 느껴봐.
바람이 부는 대로 그냥, 그냥, 지나갈 거야.
잠깐이잖아, 아주 잠깐, 아주아주 잠깐이잖아.
「여우비」전문
인용한 시는 “여우비”라는 날씨의 현상을 감질나게 표현한 작품이다. 자세히 읽어보면 ‘여우’와 ‘비’의 속성을 잘 드러냈고, 만났다가 홀연히 헤어져버리는 관계의 속성까지 잘 드러냈다. 어휘 선택 역시 여우의 살랑대는 꼬리처럼 명랑하고 발랄하다. “살짝”,“살랑살랑 보일락 말락 살짝살짝”, “몽글몽글”,“깜찍하게, 해맑게, 천진한 얼굴로”, “후드득”,“한 눈 찡긋 감고 느껴봐”에서 여우의 속성은 극대화된다. 깜찍하고 예쁜 여우처럼 비가 내린다. 그것은 눈물방울. “그냥,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을 거야./후드득, 잠깐 그의 가슴에 살종된 빗방울이잖아./그냥 잠깐 적시고 지나간 거잖아?” 이렇게 잠시 맺은 관계가 끝났을 때도 우리는 살짝 눈물을 보이게 된다. 그 순간 내리는 여우비는 감성에 젖게 만든다. 햇빛이 난 날에 “아주 잠깐” 흩뿌리는 여우비의 속성은 가벼운 관계의 속성이기도 하다.
사실, 시는 먼 곳이 아닌 일상에서 태어난다. 말도 그렇다. 말을 한다는 것은 대화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대화는 필수적이다. 일상적 언어는 계산적이거나 폭력을 수반한다. 일상의 언어가 시적 표현으로 승화될 때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마저도 아름답게 읽히는 걸 경험하곤 한다. 시를 쓸 때 시인은 깊은 사유 속을 헤엄치며 상상력에 자신의 몸을 맡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시는 ‘숨구멍’처럼 타인과 소통하는 매개체다. 그렇기에 시인은 일상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고, 다시 은하수를 여행하곤 하는 것이다. 우주를 여행하다 온 말들은 백지 위에서 은하수를 그려낸다. 반짝이는, 흩뿌려지는, 은하수의 말들이 시의 감각을 열게 하고 빛나게 한다. *
추천0
- 이전글58호/소시집/박해미/운주사 외 4편 15.07.13
- 다음글58호/집중조명/정치산/그의 말을 훔치다∙3 외 4편 15.07.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