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58호/신작시/신현락/자작나무숲 외1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739회 작성일 15-07-13 11:42

본문

신작시
신현락

자작나무숲


세외世外의 누드촌이다 
빛이거나 새이거나
시베리아의 검은 바람이 아니면 들어가지도
나올 수도 없는 곳 

그런데
누가 자작나무숲을 보았다고 했을까

배고프면 짐승을 잡아먹고
졸리면 잠을 잘 뿐!
때가 되면 짝을 짓고
새끼를 기르는
늑대의 순수 혈통이 아니면
자작나무숲의 주민이 될 수 없는 곳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건
세간世間의 만남이거나 출세간出世間의 이별이거나
모두 나무와 나무 사이의 인연이다
자작자작 태우는 카르마의 장작불이다
몸과 입이 만나고 헤어지는 먼 길이다

햇빛과 나뭇잎의 각도를
새의 언어로 옮겨 온 저 광합성의 바람은 
전생과 이생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시간의 빛이다

알몸의 내시경이다
세세생생의 구곡간장 
육필로 쓴 수만 평의 나무대장경이 펼쳐 놓은
검고 흰 목숨의 언어

천지이거나 천지간이거나
해탈은 탈속脫俗과 환속還俗 사이가 지척인 시간이다
물론 숲이 만드는 길은 이 보다 더 오묘하다 
천 명의 궁수가 맹렬하게 화살을 쏜다고 해도
단 하나의 이파리도 맞힐 수 없다 

수천 겹의 시간이 닫히고 열리는
검은 흰 몸을 오래 들여다보면 
누구나 별빛의 눈동자를 가진 장님이 되는 
세외의 눈부신 무채색
자작나무숲은 없는 옷마저 벗어 버린다 

그런데
누가 자작나무숲을 보았다고 하는가




코스모스 혼례


산책길에 만난 때 이른 코스모스 혼례
우연찮게 들른 잔칫집처럼 반갑다가도
이게 뭐지?
이내 그리기 숙제를 받은 아이처럼 골똘해진다

꽃잎을 그리기 전에 꽃잎의 몸을 헤아려본다
코스모스 신부의 국적을 알기 전에 주변의 것들을 스케치해 본다

우선, 여름이 가기 전인데 벌써 가을이 오면 어떡하나 혼기를 놓칠까 초초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중신아비나비가 읽고 간다고 쓴다, 가끔 홀아비벌이 찾아와 젖은 지폐 같은 날개들을 포개어 놓고 간 꽃잎을 본다고 쓴다, 그리고, 오늘 밤 초야의 체온이 잊지 않고 분홍의 꽃잎 속으로 슬쩍 넣어둘 이슬 한 방울도 눈여겨보리라, 마음을 먹다가

총천연색 물감으로 꽃잎의 문자와 계절의 기호에 덧칠하려다가
문득, 나비는 저 혼색의 문법을 어떻게 알고 찾아갔을까
나는 벌이 아닌데 어찌 채밀의 사투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빨강과 노랑을 섞으면 주황이 나온다는 사실은 초등학생이라도 아는 사실
헌데 나는 저 우주적 조혼의 풍습을 그려낼 언어의 미학을 알지 못 한다

간밤의 청첩장을 받은 하객들이 도착도 하기 전인데
혼혈의 씨앗을 머리에 인 저 미혼모의 만삭은 또 무어란 말인가

그냥 나는 벌이 아니고 나비는 내가 아니지만 우리는 코스모스의
육친이라고 쓸까, 숙제를 마치지 못한 아이처럼 안절부절 하다가 
아니다, 아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저 카오스의 코스모스 잔칫집을 그리기에
내 언어는 성글기 그지없구나! 
코스모스는 한 송이의 화관을 쓰기 위해 생애를 바쳤다
하물며 건들거리는 산보자의 축의라니! 

뒤돌아보니 바람은 바람의 방식으로 
이 철없는 코스모스 혼례식을 가만가만 다녀가고 있었다


*신현락 : 1992년에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따뜻한 물방울』,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 『히말라야 독수리』를 상재했다. 논저로 『한국 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 산문집으로 『고맙습니다, 아버지』 등이 있다. 1998년 한국비평문학상 우수상, 2012년 제3회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