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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신작시/이순현/역광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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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순현
역광
그때 너와 나는 똑같이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는 거룩한 그것,
깍지 낀 손끝에서 서로의 안쪽을 알아챘던 걸까
벼와 벼 포기 사이의 고요에게도 물이 흘려들듯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깍지를 끼었을 때,
벌판 먼 끝에서 덮쳐오던 빛,
그 황금빛에 도금된 입상으로 서서
산 육신을 봉인한 등신불로 서서
광채가 두텁게 덮여 있는 너에게
주물로 굳어 버릴까봐
빛을 따라 흩어져 버릴까봐
빵 하나 더 먹을래 중얼거릴 뿐
꼼짝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던 그때,
볼륨을 제로로 놓아도 들리는 소리
곧게 내달리다 몸에 부딪친 빛이 부서지는 소리
빛이 느꼈을 아픔과 비명이
그림자로 흥건하게 등 뒤로 흘러나가던
나보다 너를 바라보느라
나의 행색도 주책도 알아채지 못 하였던
눈이 멀 것 같던 그날 그때,
그 순간들을 지속시켰다면 사라졌을 거야
빛의 울음을 심장으로 관통시켰다면 그랬을 거야
그때 다 타버리지 않고 이렇게 진흙뼈대로 남아 있는 일이
너와 내가 원하던 것이었을까 그날, 저물어 가던 무렵
역 이름이 그럴싸해서 내렸는데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다음에 오는 거 타고 돌아가자며 재촉하는 너에게
이왕 왔으니까 좀 더 가보자며 슬며시 손깍지를 끼다
직구로 육박해오는 빛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던 그날 그때.
지우와 함께
지구온난화에 빙산이 녹아내린다는
마감뉴스를 싣고 버스가 달린다
한 방향으로 앉아 있는 승객들
같은 걸 바라보지는 않을 거야
스쳐가는 시가지는 언어에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없고
지우야 이모야 이모
이모 불러봐 이모
지우 이모가 입을 가리며 전화기를 반대쪽으로 옮긴다
언어가 불어나면 지구온난화도 빨라지겠지
버스가 달려가는 쪽은 지구 온난화가 깊어지는 방향
그 끝에 벌을 내리는 신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우야 네 네
잘 했어요 참 잘 했어요
북극바다의 일각고래가 언 수평선을 깨뜨리며
참았던 숨을 뱉어낸다
지우이모 옆에 앉은 아이는 양손으로 이어폰을 누르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는 지우이모가 참았던 숨을 뱉어낸다
또 다른 발성기관인 손에게도 숨구멍이 필요하다
뒷자리에 나는 메모지에다 대고 조용히 소리지른다
…지우야 이모야 이모
이모 불러봐 이모……
내 손을 타고 메모지로 옮겨 앉는
검은 지우를 싣고 버스가 향해가는 곳은
나와 모두의 정중앙이다
*이순현 : 1996 『현대시학』 등단.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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