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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신작시/김경인/음악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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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경인
음악
건넛방에서 누군가 성경을 읽고 있다
(이상하다, 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나는 소파에 눕는다 겨울 땅속의 벌레처럼 캄캄하고 아둔해져서
흩날리고 흩어지는 것
잠들고 출렁이다 끝내 돌아오는 것
어둡게 속삭이는 이것은 정교하고 무겁다
너는 왜 공상 속에서만 용감해지지
끌려나온 몽상과 비굴이 남루한 우산을 펼치고 부랑자처럼 웅크리고 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수신인이 없을 때 가장 아름다워지는 편지를
음이 사라질 때 떠오르는 몇 개의 가능성들을
잘. 못. 했. 어. 요
기묘한 목소리가 나를 흉내낸다
설탕 한 스푼으로 금방 달콤해지는 인생
누가와 마태가 알 수 없는 이국어로 나를 용서하노니
나는 나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부드러운 커튼 뒤에서 누군가 운다면
그건 음악이 계속된다는 뜻이고
내 얼굴이 천천히 무너져
검은 흙 위로 주르르 흘러내린다면
그건 내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나의 눈동자들
무인칭이 불러주는 다정한 노래
창문은 잘 잠겨 있다, 빛이 스며들지 못하게
터널
길어지고 있어, 멀어지는 빛, 내 손가락, 서서히 감추어지는 일그러진 얼굴. 찢긴 페이지. 비명, 나는 여기에 목소리를 두고 온 것 같다.
하나의 생각이 태어나고 두 번째 생각이 죽어간다. 내내 가벼운 생각을 했는데.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했지. 아님 요리를 했던가. 부풀어 오르다가 쉽게 꺼지는 더러운 거품들. 하얗게 빨래를 할 수 있다면. 가장 가벼운 비눗방울이 지붕을 부수고 날아간다면.
올해 가장 좋았던 책은? 인상적인 장면을 얘기해주세요. 책처럼 너를 펼치고. 책장을 넘기듯 너를 열면서. 어둠 직전의 노을처럼 황홀하게 읽혀지기를. 너의 빛나는 페이지와 우리의 찢긴 페이지를, 잘 모르겠어요. 아, 정말 잘 모르겠어요. 생각은 죽어서 목구멍에 박혀 있다.
너는 고통조차 아름답구나. 상처를 부드럽게 덮는 비단과도 같이. 목구멍은 몇 개의 뼈로 이루어져 있는지, 소리는 뼈를 뚫지 못한다. 가장 멋진 답을 하고 싶어.
우리가 몸을 털실 풀듯 풀어놓는다면 우리의 밤은 영영 같아지나. 길어지는 혀로 무엇을 또 할 수 있나. 터널은 몇 개의 철근을 감추고 있나.
*김경인: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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