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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신작시/오은/어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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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893회 작성일 15-07-13 11:54

본문

신작시
오은

어른


종이가 찢어지고 있다

“나는”으로 시작되는 문장과
“뛰어갔다.”로 끝나는 문장이 
“여기”와 “거기”를 경계로 나뉘고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할 것인가

여기에 있으면
뛰어가지 않아도 된다
끝장을 보지 않아도 된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나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거기로 가면
뛰어간 이유를 알 수 있다
결말을 점치지 않아도 된다

“뛰어갔다.”고 말하고 한동안 헐떡일 수 있다
부른 배를 움켜쥐고
다음 문장이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 있다

종이가 찢어지고 있는데
두 다리가 컴퍼스처럼 찢어지고 있는데
여기와 거기가 멀어지고 있는데

중심이 두 개라
원을 그릴 수가 없는데
둥글게 살 수가 없는데

다시 꿈꾸기가 겁나는데
섣불리 끝내기가 부끄러운데

두 다리를 오므리기에는 너무 커버려서

나는 여기에서                                 
                                              
                                              거기로 뛰어갔다




법석이다
―세월호 참사 1주기에 부쳐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고 “앗 차가워!”라고 소리쳤습니다. 뜨거운 것을 차갑다고 말해버렸습니다. 차갑다는 말 한마디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욕실 안이 뿌예졌습니다.

일 년이 흘렀습니다.
 
사람이 가라앉으면 물거품이 떠오릅니다. 부딪쳐야만 발생하는 것 앞에서 아무도 순순히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물거품이 스러졌습니다.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순간, 가라앉아야 떠오른다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약이라는 약은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한숨을 아무리 쉬어도 숨이 막혔습니다. 바닷속처럼 깊은숨을 쉬어도 숨이 가빴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은 두 손이 물거품이 되자 우리는 모두 숨죽여 울었습니다. 마음만 늘 법석였습니다.

일 년이 흘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있었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구조하겠습니다. 지켜지지 못한 말과 지켜지지 않은 말이 있었습니다. 아직 아홉 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가도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 법석입니다. 매일매일 안간힘을 쓰고 말하는 그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가 차갑습니다. 사방이 차갑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내밀던 손을 잡지 못했습니다. 목울대만 뜨겁습니다. 마음만 겨우 법석입니다.

일 년이 흘렀습니다.
일 년이 또 흐를 겁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법석이겠습니다.


*오은 :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가, 그 밖의 책으로 『너랑 나랑 노랑』,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가 있음.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 중. 제15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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