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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신작시/이호준/밤기차를 타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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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호준
밤기차를 타다 외 1편
백향목 여윈 가지 서쪽 하늘에 걸린 겨울, 시간의 날갯죽지 마른 풀 돋고 날선 휘파람소리에 무두질 한창일 테다 골목마다 커튼이 내려지면 역으로 가자 빈숲으로 떠나는 기차를 타자 어떤 이, 훅 입김 불어 황혼 끄고 나면 차창 밖 세상 안식을 지어 입고 비로소 빛으로 태어나는 것들 교회는 빨간색 모텔은 파란색 안테나 하나씩 불뚝 불뚝 세우고 별들과 교신한다 구원은 여전히 구름의 골수와 바람의 견갑골을 떠돌고 안테나 불빛 좇아 허우적 걸어가는 이들 만날 수 있다 성聖스럽거나 성性스러운 것들이 오래전 약속한 듯 빈 칸마다 사랑이라고 적는 저녁
단풍들다, 단풍지다
길 잃은 계절 등에 지고 산으로 돌아가던 유혈목이
뒤란 돌담 틈에 밤새 각혈해놓은 새벽
세상 잎새들 온통 얼굴 붉혔다
된비알 누운 늙은 나무들까지 우럭우럭 일어나
잠든 잎 귀를 열고 속삭였다
너도 꽃이 돼야지 꽃으로 피어야지
우리는 같은 어미를 가진 난생卵生이었다
만월의 강가에 나를 버리면서 너는
사랑해요 사랑해요 열 두 번이나 속삭였다
돌아서는 것들은 빛나기 마련이어서
너는 돌 틈에서도 눈부셨다 나는
독액이 심장을 적시는 순간 황홀해서 울었다
이제 알겠다 저기 빈 나무, 여기 홀로 선 이
같은 족속이었겠다 아득한 전전생
기억이 태어나기 전쯤 한 몸으로 살았겠다
*이호준 : 충남 홍성 출생. 2013년 《시와경계》로 등단. 산문집 『문명의 고향 티그리스강을 걷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부』 외. 전 〈서울신문〉 선임기자. 현재 〈문화일보〉 ‘이호준의 나를 치유하는 여행’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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