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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책 크리틱/남승원/불씨를 되살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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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남승원
불씨를 되살리는 것처럼
- 신미나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창비, 2014)
민구 시집, 배가 산으로 간다(문학동네, 2014)
그러니까, 어른은 성큼 왔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온통 둘러싸여 보냈던 기억들은 선명한데, 이제 그 ‘어른’이 되었으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선언을 누군가 해 주었다든가 하는 기억은 전혀 나질 않는다. 글쎄, 정말 우리는 어떻게 어른이 된 걸까. 이제는 누가 봐도 어른인 친구들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한바탕 나누면서도 언제부터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어른이라는 기준으로 나누기 시작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신미나와 민구, 얼마 전 첫 시집을 낸 두 시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불현듯 스치게 된 생각이다. 서로 다른 개성을 뚜렷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은 공교롭게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한사코 붙든 채 스스로의 내면을 더듬어 가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들의 작품은 어른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애어른’의 고백담으로 불릴 만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고백이 읽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빈번하게 말이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라면 당연시하게 뒤로 밀쳐두고 더 이상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일은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다. 종종 우리가 시문학에 기대를 걸어보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미나의 「싱고」에서 시작해보자. 시집의 제목으로 사용된 구절이 포함된 이 작품에서 ‘싱고’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이 시인을 이해하고 또 시인이 시쓰기를 통해 결국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싱고’는 일종의 “기분”, 그것도 오래 기르던 개를 잃고 찾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정보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싱고’를 보다 자세히 드러내기 위해 이어지는 진술들을 지나면 이제는 ‘싱고’가 대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에 다시 이르게 된다. 일종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등장한 단어이니까 “맛도 냄새도 없”는 것이야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뿔 달린 고양이나/수염 난 뱀일지도 모른다”면서 구체적인 형상을 떠올려본다는 것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화자 역시 구체적인 형상으로 ‘싱고’를 짐작해보는 일이 “싱고답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크기를 가늠해본다든가 비유적으로 변화 양상을 표현해본다든가 하는 진술이 지속되면서 우리들은 점차 ‘싱고’가 주체에 귀속된 감정이 아니라 어떤 독립적인 개체임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화를 내면
싱고와 나는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장면도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이내 ‘싱고’의 의미와 정체를 파악해보고자 했던 시읽기는 변화를 겪게 된다. 유년 시절 서러웠던 순간과, 그것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아늑하게 여겼던 공간과 또 그 때 유일하게 나와 같이 있어주었던 애착의 대상(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든 단순한 물건이든)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보는 일로 말이다. 고백하자면, 이것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놀라운 감정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시인이 보여주는 기억이나 공간, 또는 대상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의미의 외연을 찾아 두리번대던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으로 뛰어드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놀라움이다. 이것이야말로 시를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의 최대치가 아닐까.
여기서 신미나 시인의 특징을 한 번 더 언급해 두고 지나가야겠다. 이같은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애착의 대상이 “십년 넘게 기르던 개”라는 것은 흔한 결론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내 고유의 형상을 잃고 특정한 감정으로 변형되었다가 다시 보편적 경험을 이끌어내는 출발점이 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신미나 시인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 의도 없이 “막대기로 재를 파헤”치는 ‘어린아이 짓’과 같은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편의적이지만 ‘명사화를 거부하는 방식’이라고 (모쪼록 신미나의 이같은 특징이 강조되길 바라면서)이름을 붙여 불러보자. 먼저 역사적인 과정과 얼마나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명사’가 만들어진 것을 상상해보았을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든 점이 발생한다. ‘동사’나 ‘형용사’가 순간의 속성이나 상태 등 대상의 한 부분과 관련되어 있으며, 대상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동사나 형용사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하면 대상의 속성이나 외양과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칭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명사’가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이다.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른’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종종 만나게 되는 것 또한 명사가 지칭하는 의미로 덮여왔던 것들이 실제로는 그 아래에서 개별적 대상의 속성이나 상태들과 온통 어긋난 채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싱고」에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 바로 명사화를 거부하고 그 힘에서 벗어나 끝내 살아남은 것들을 마주한 데서 오는 활력이다. 그것이 바로 “불에 타지 않는 것들”이며, 시인이 “파헤”치고 “골라”내기 전까지는 우리의 무의식 속(“아궁이”)에 그대로 묻혀 있었던 것들이다.
우리는 이제 이것들을 다시 ‘싱고’라고 부르기만 하면 된다. 신미나의 작품들은 싱고를 찾아 나선 기록이자, 싱고들의 기록이다. 작품을 통해 다루고 있는 세계가 지나가버린 첫사랑의 기억부터 엄마, 오빠, 형부, 할아버지, 할머니 등 혈육의 범위 바깥으로 성큼 벗어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족으로 대표되는 관계야말로 명사화의 과잉에 기대고 있는 동시에 항상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이 풀려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억압적 관계의 거부를 위해 ‘가족’이라는 기본 단위와의 단절을 그리는 기존의 작품들에 대한 흔한 이해(와 오해)를 주의해야겠다. 신미나가 보여주고 있는 세계는 혈육에 기반한 관계를 거부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불이 안 붙네 형부는 번개탄 피우느라 눈이 맵고 오빠는 솥뚜껑 뒤집어 철수세미로 문지르고 고기 더 없냐 쌈장 어딨냐 돗자리 깔아라 상추 씻고 마늘 까고 기름장 내올 때 핏물이 살짝 밸 때 뒤집어야 안 질기지 그럼 잘하는 사람이 굽든가 언니가 소리 나게 집게를 내려놓을 때 장모님도 얼른 드세요 차돌박이에서 기름 뚝뚝 떨어질 때 소주 없냐 글라스 내와라 아버지가 소리칠 때 이 집 잔치한댜 미희 엄마가 머릿수건으로 탑새기를 탁탁 털며 마당에 들어설 때
와 같은 ‘여름휴가’의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재단될 수 없는 의미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이면서 원초적인 차원에서부터 발산되는 활력으로 가득한 공간이 된다(「여름휴가」). 이 활력들이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짐작해보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활력이 “형광등을 끄면 낮에도 캄캄”한 “일층 같은 반지하”로 이사를 가게 될 때라면 ‘손 없는 날’이라도 알려주면서, 체했을 때에는 “바늘로 손을 따”주면서 고단한 삶을 같이 이어가게 만들고 있을 뿐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손 없는 날」). 또 때로는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작은 것들에도 그저 몸이 들떠 “옷장을 열었다가 그냥 닫고/교복 치맛단을 접어 입”을 수밖에 없던 시절들을 만나면 곧 “동생이 혀를 동그랗게 말아/침방울을 날리는 사이” 지나가버린 추억으로 꺼내놓을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안식일」).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시를 쓰는 시인 자신의 내면에 이르게 되면
내 머릿속에 지금 고인 것은
한사발의 붉음인데
처음 본 붉은빛은 다리를 달고 달아났다
뿔뿔이 흩어져 천만갈래 비슷한 붉기만 번지고 있다
고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명사’ 속에 갇히지 않고 애써 달아나고자 하는 움직임 그 자체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시」). 그것이 비록 “한쪽 귀가 흔들리는 냄비를 들고 가”는 일처럼 위태로운 일일지라도 결국 우리는 과잉과 만족이 아니라 결핍과 거리감이 삶을 지속시키는 힘이었음을 알게 된다.
민구가 첫 시집에서부터 「房」과 「공기」 연작을 통해 애써 그려보이고자 하는 풍경도 이와 나란히 두고 이해해볼 수 있다. 민구 역시 시쓰기를 포함하여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결국
“오늘 아침
바다에서 잡은 도미는
본래의 색을 잃고서 죽어버렸네
누군가의 시
그의 날렵한 문장에 의해”
벌어지는 일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공기-익명에게」). 더불어 연작시의 제목이 빚어내는 의미를 먼저 짐작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듯한데, 시인이 지목한 두 소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공통점으로, ‘방’과 ‘공기’가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면서도 또 다른 필수적인 것들을 떠올려보는 과정 중에 쉽게 잊히고 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민구가 집착하듯 들춰내고자 하는 것은 후자에 보다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방’과 ‘공기’를 통해서 다른 가치들이 연쇄적으로 틈입하기 이전의 어떤 지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명사화’라고 불러봤던 의미 생성 과정(인 동시에 현실화 전략에 의해 대상이 해체되고 그 의미의 일부만 전유되기) 이전의 구체적인 모습은 민구 시에서
거울아 녹아라
내가 흐르게
흘러나오게
근데 우리 둘
같이 있으면
얼마나 어색할까
문득 바라본 그곳에
누가 서 있을까
나는 기다려 천천히 녹는 거울을
흐르는 평범한 세계를
거울이 녹으면
내 방은 잠기겠지
치워지지 않은 주검들도
떠내려오겠지
처럼 그려지고 있다(「房-거울」). 욕망과 억압이 뒤섞인 채 승화를 거쳐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 첫 단계는 ‘거울’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것을 나르시시즘으로 이해하든, 이상적 자아와의 동일시라고 부르든 자아를 (왜곡된 모습으로나마)확인하기 위해서 거울이 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상징적인 질서들로 구성된 세계 속으로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거울”이 녹는 것을 원하는 진술로 시작하는 이 작품이 ‘거울 단계’ 자체의 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결론을 미리 지적해두자. 민구는 (상징적)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시적)언어를 통해 기어이 시를 쓰는 불가능한 일에 매진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결국 거울이 폐기된 이후의 모습은 주체(sujet)도 자아(moi)도 성립되지 못한 ‘우리 둘의 어색함’만 남게 되며, 상징적 체계로 진입하지 못(안)한 “주검들”만이 가득한 세계이다. 그 세계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보다 이 불가능한 작업이 가진 운동성에 기대를 갖는 것이 민구의 첫 시집을 읽는 온당한 일이 될 것이다. 다소 도식적인 면도 언뜻 보이지만, 자신이 찾아낸 공간으로서의 ‘방’에 대한 의미탐색이 착실하고도 집요하게 이루어지면서 처음으로 ‘너’(autre)의 “속삭”이는 소리가 ‘나’에게 들리는 세계로서 “거울 너머 펼쳐진 백사장을” 향해 달려가는 데에까지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房-거울 너머」).
그곳이 우리에게 어떤 환한 약속이나 전망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명백하다. 하지만 시인의
눈감으면
캄캄한 세상
다양한 반디가 서식하네
라는 고백을 듣고 있다 보면(「房-눈감으면」), 달빛에도 한참 못 미치는 “가로등 불빛”이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도/잠을 깨시는 어머니”를 다독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믿음까지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불청객」). 그리고 반딧불의 작고 미약한 빛에서 지평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읽어내고 있는 위베르만의 말에 수긍을 한다면, 민구 시인의 ‘방’과 ‘공기’라는, 그 자체로는 규정이 불가능한 ‘비어있음’을 내세워 다양한 이미지를 불러들이는 시도에서 우리는 그 믿음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 또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민구의 ‘방’ 도처에서 등장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하는 이미지들은 우리의 미약한 내재성에 형태와 미광을 부여하는 ‘반딧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남승원 : 문학평론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계간 <포지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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