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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미니서사/박금산/무라카미 하루키를 질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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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서사
박금산
무라카미 하루키를 질투하다
잠깐! 물을 내리기 전 덮개를 덮으셨나요? 덮개를 닫지 않고 물을 내리면, 대변과 소변에 상재하고 있던 세균들이 변기의 물과 함께 전파되어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을 내릴 때 꼭 덮개를 닫고 물을 내려주세요. 서울시 노원구 한글비석로 68번지 을지병원의 화장실에 스티커가 붙어 있다. 산책을 하다가 볼일을 본다.
최근 약 두 달간에 걸쳐 매일 아침 변기가 막혀 미화원이 애를 먹고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매일아침 휴지를 많이 쓰시는 분이 용변 후 변기에 버리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많은 양의 휴지는 분해되는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U트랩에서 막히는 현상이 생깁니다. 쾌적한 화장실 환경을 위하여 휴지는 반드시 휴지통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노원구 공릉로 232번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숙사 화장실에 코팅된 경고문이 붙어 있다. 산책을 하다가 볼일을 본다.
하루키를 읽는다. 장편소설 <해변의 카프카>에 이런 문장이 있다. 미궁(迷宮)을 만든 사람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습관을 이어받았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짐승이나 인간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점을 쳤다. 얼키고 설킨 내장의 미로에서 길흉화복을 읽었다. 책을 덮고 집을 나선다. 어디로 갈 것인가. 을지병원. 대학교 기숙사.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내 머릿속, 젖은 휴지가 변을 막고 있는 U트랩의 내부 같다.
박금산 : 소설가. 1972년 여수 출생.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고려대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소설집 『생일선물』, 『바디페인팅』,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 『존재인 척 아닌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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