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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집중조명/신동옥/시인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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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옥
시인 외 4편
비와 초승달처럼
바람과 칼날처럼
비워져가는 사람은
기도하는 손아귀처럼 등이 굽었다.
돌멩이로 누를 수 없고
책갈피를 끼워 넣을 수 없는 빈자리 끝에서
눕고 서고 기고 꺾이고 잘리고 닫히고 흩어지는
삶의 도화선
그 타들어가는 모양을 개미걸음으로 따라가는 일
그 끝없는 이야기의 바깥에 필터를 꽂아 숨구멍을 틔우는 일
그는 태어나면서 한 번 울고 살아가며 눈감고
마지막으로 한 번 웃으리라.
웃음은
타들어간 종이처럼 묘비명을 쓰겠지.
억새와 대나무가 우거진 옛 수풀을 지나면
먹줄로 그어놓은 선처럼 반듯한 담장 아래
샘물에는 무너진 종탑이 비치고
수면 아래는 만질만질한
돌멩이
그가 발견한 투명한 어휘들 속에서
그는 살아 있고 살게 되리라.
향료와 시든 꽃다발 대신
증류수 한 잔이
잉크를 대신하겠지.
늘어진 그림자를 끌고 선 마을
담벼락과
장미 넝쿨 사이로
경전을 새기는 철침 같은 비가 내린다.
아득한 구약 향기의 빗줄기 사이로
눈먼 여백 제도사가 걸어가고 있다.
손가락을 맞대자
새를 불러 모으고 꽃 피우고 가지를 하늘하늘 늘어뜨리게
나는 오아시스를 연주하겠어 태평양을 두드리겠어
우리의 손가락은 5대양 6대주 위에 떨고 있어
우리가 노래할 때마다 나였던 그자를 일깨우는 목소리는 침묵하고
서로 가장 아파했던 뼈가 악기가 되어 힘줄을 현으로 걸고 있으니
이파리는 가지 끝에 다른 생의 불길을 불러 모으는데
우리의 연주는 햄스트링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행진 또 행진하겠어
끓어오르는 손가락의 떨림으로 하늘이 열리면 밤하늘은
말 넓적다리 궁둥이처럼 빛나네 영롱한 어둠의 근육을 등대 삼아
사막으로 가겠어 불빛이 너무 많아 당신 얼굴을 볼 수가 없어
별을 저녁으로 들이기에는 차 우리는 향기가 부족한 이 시간
어제 죽은 자들을 묻고 애도의 주문을 흙 뿌리던 무덤 속에서
개 짖는 소리 들린다 그것은 우리의 아이가 태반 밖으로
귓바퀴를 돋우는 몸의 사랑 꽃피는 임신선을 따라 자맥질하겠어
갈라터지는 살무덤 속에서 다시 몸의 사랑을 발명하겠어
돌고래의 피를 마시고 새들의 응시를 견디는 꽃이 되겠어
나무로 만든 나비 한 마리 기타 위에 날아와 앉을 때
음표의 날렵한 물고기들은 음악도 없는 바다를 잘도 헤엄쳐
건너겠지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자맥질하고
마침내 바다 저편을 건너간 창백하고 긴 긴 손가락이 되겠지
방아쇠를 당기고 펜대를 지탱하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손가락을 따라 전류가 흐르고 침묵이 고이고 우리
서로의 지문이 얼굴에 목덜미에 파이는 노래를 듣겠네
지문 속에서 악보를 읽겠지 우리가 만든 빛의 제국
절망이 부족한 제국의 하늘 위로 악보 하나 떠오르는 것을 보겠지
구름의 무한 도돌이표 속에서 우르르 쾅쾅 비 뿌리는 심벌즈를 닦게
손가락을 맞대자 이 삶의 몫으로 남겨진 마지막 운지법을 발명하게
연해주 1937
- 申石休(1894~1987)
새로운 밤을 보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듯 저들의 영혼을 위해 마지막 술은 잔 바닥을 덮어두시게 찰박찰박, 툰드라의 끝으로 추방되어간 노예들과 세포 속에 간직한 미토콘드리아의 노동을 눈이 무언지 모르는 침목과 여름 날씨를 음악으로 대신해버린 정과 망치가 갱도에 모여들어 몬순의 흙비를 맞고 있네
검고 두툼한 이끼를 덮고 잠든 아가들 곁에서 누런 암소의 뜨거운 젖을 타고 흐르는 검은 우유처럼 시간이 가네 우리 지난 봄내 목숨으로 기르던 하얀 풀이 군화에 짓밟히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자 즈다로비야, 마지막 술이 잔 바닥을 덮고 출렁이듯 블라디보스토크 지나 청진 지나 부산 지나고 더 더 남쪽
하루 20시간 오로라가 흩날리고 유자나무 그늘에서 죽은 자들이 따뜻한 노동요를 부르는 곳 조선 하고도 남양, 대나무 뿌리를 깎아 만든 피리를 불면 영원히 얼지 않는 저주받은 바다가 얼어붙을 테고 빙하기의 매머드를 타고 나는 걸어서 그곳까지 갈 걸세
버드나무 아래서 손을 잡고 아내의 이마에 입맞춤하고 맹세하겠네 사랑하오 내가 돌아오거든 가정을 꾸립시다 우리의 아이들이 ㄱ ㄴ ㄷ ㄹ ㅁ ㅂ ㅅ 자라는 들 위에 강이 흐르고 강물에 다시 버드나무 잎새가 낭창낭창 드리울 때 이파리 끝에 매달린 물방울은 나뭇잎이 간신히 밀어낸 아가 같았소
검은 밤 가운데 노란 빛줄기 탐조등은 서서히 저탄더미를 넘어가 얼어 죽은 곰을 비추고 불빛이 느리게 돌아가는 철책 위로 제비꽃이 피는가 혁명을 지나온 가난한 러시아의 시인은 저들의 땅에서는 벚꽃동산을 쓰고 흑룡강 지나 사할린에 와서는 자유망명지대의 르포를 썼다네
‘아이누는 인간이라는 뜻이고 이따이는 아프다는 뜻이고 매머드는 크다는 뜻이다. 저들은 태양, 숲, 계곡, 언덕을 내지르는 물줄기를 사랑하고, 빗줄기를 불태워 예측할 수 없는 충동의 계절을 바다 한복판에 불러 세운다. 폭풍 속에 비는 내리고 저 바깥은 영원히 얼어붙지 않는 축복받은 항구.’
건배, 크고 아픈 나의 인간 친구여 내 고향은 조선 하고도 남양 내 영혼은 긴 그림자를 끌고 저 얼어붙지 않는 바다를 건너네 얼어붙은 내 피는 이제는 거의 연보랏빛 핏속에 움직이는 세포는 작은 뗏목이라네 건배, 아리랑은 아리랑이라는 뜻이고 안녕은 안녕이라는 뜻이고 노래는 노동에 좋고 술은 잠에 좋다네
나는 게으른 십장이 되어 채찍을 견디며 탄광에 들락거리다 연해의 항구에 호박돌을 박아 넣다가 핏속에 숨겨둔 뗏목을 꺼내겠네 먼 훗날 나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은 살아 돌아온 나의 곰방대에 머리통이 깨져가며 ㄱ ㄴ ㄷ ㄹ ㅁ ㅂ ㅅ 배워 시인이 될 테고 어느 가을 속초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배를 타고 이곳에 오겠네
시인은 얼어붙지 않는 질척질척한 바다를 걷다가 추위 속에 따뜻한 국물 따뜻한 술하고 키릴어를 중얼거리겠지 건배, 마지막 술잔을 비우세 그날을 위해 나는 갱목 위에 쓰겠네 자 즈다로비야는 건강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아리랑 자 즈다로비야
말 우는 밤의 노래
잔등 위에서 생강차를 나누던 知音은 떠났네 말무덤에 태양을 묻고 남은 빛을 행낭에 넣었네 그 여린 등불에 찬 볼을 비추며 유령처럼 나의 말이 뛰놀던 생시의 수풀을 어슬렁거렸지 나의 말이 죽던 밤 짚섶은 겨울처럼 쓸쓸했고 하늘이 없는 것처럼만 보여서 고삐를 당기고 채찍을 휘두르던 부끄러운 손으로 서투르게 손풍금을 연주했지
풀 베는 철 지나고 겨울었다네 느슨해진 무릎 뼈를 맞추어 계절의 관절께나 지나고 있었던 모양이야 호각 소리 휘파람 소리 찻물 끓이는 주전자를 빠져나와 천장에 맴돌 때 말먹이로 기르던 오랑캐꽃 아그배나무꽃 이파리 눈보라로 흩날리고 말발굽이 좋아 향기로 기르던 꽃잎 사이로 애써 치던 꿀벌들이 소란을 몰고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네
아니라네 그건 나의 말이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저 검은 하늘에 우리의 별자리를 만드는 노동의 노래였네 노래는 뜨겁고 또 뜨거웠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은하의 물길을 차가운 피로 덥히며 달리는 나의 말이 말갈기에 별빛을 적시어 토한 뜨거운 입김이었다네 이보게 자네 삶은 등자도 안장도 없이 발굽 하나로 무한을 구르기에 맞춤한 노래였나?
나는 가끔 나의 말과 고개를 마주하고 안개 속으로 뻗은 길을 끝 없이 끝 없이 달리는 꿈을 꾼다네 그때마다 나의 말은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해 서녘으로 기운 태양을 등 돌리고 동녘을 향해 뻗어가는 말머리성운을 보여주었다네 그러고는 촉 없는 깃 없는 움켜쥘 손목조차 잃어버린 가난한 나의 붓에 갈기를 한 움큼씩 채워 넣었지 발걸음도 경쾌한 나의 붓은 말 우는 밤의 노래를 받아 적기 시작했지
어느 밤 나의 말은 뜨거운 콧김 속에 빛나는 눈망울로 속삭였다네 당신은 나의 지도입니다 발치에는 뭉개진 지푸라기 땀방울로 반질반질한 여물통 나는 헛간을 나와 휘파람을 불었다네 눈보라 치는 허공에 긴 뒷덜미들이 달리는 소리 들렸네 아니라네 그건 나의 말과 나를 가로지른 기압골이 몸 바꾸는 소리였네 나는 뜨거운 침을 목덜미에 문질러 닦고 한바탕 울었네 히이힝 말머리성운 한복판에서 나의 말이 덩달아 우네 히이힝 히이힝
굴
굴은 개개풀어진 눈동자로 말없이 네 눈물 속으로 걸어 들어와 진주를 씨앗뿌린다
굴은 푸르딩딩하게 버려진 너를 이렇게도 많은 바다 앞에 날게 하며
굴은 아무도 오르지 않는 갯바위에 숨을 헐떡이는 조가비에 불과한가
굴은 석회질의 혓바닥을 움켜쥔 채 날아오르는 오두막
굴은 이파리를 돋우는 달빛마저 지우는 그늘에 그림자를 묻고
굴은 마침내 네 앞에 젖어 연녹색으로 굳은 어둠이 된다
굴은 우유를 흘린다 질질 질질 흐너지는 껍데기를
굴은 한사코 네 앞에 펼치고
굴은 하얀 수의를 걸치고 무거운 갑주를 짓누른다
굴은 밤바다에 떠오른 보름달에 가로놓은 가장자리에 달라붙고
굴은 가장자리에 남보랏빛으로 빛나는 복화술로 고동치고
굴은 남해바다에서 네 창가로 단숨에 날아와 비를 뿌리고
굴은 빗방울 무덤 사이를 헤집고 다시 굳어 뭉쳐가는 입술을 부른다
굴은 마침내 굶주려 떠는 네 쇄골에서 굳어가고
굴은 후루룩 피고 바삭바삭 지면서 한 살씩 한 살씩 껍데기를 굳힌다
굴은 은빛으로 타오르는 표정으로 이 연약한 종잇장을 가리다가
굴은 툭 툭 굳어 네 심장을 얼려 한 톨 핵으로 만든다
굴을 빨아 삼키는 네 입술에 초장이 남는다
번들번들
세계는
다만 한 송이 石花였다
시작메모
꿈꾸지 마라, 다른 세상은 없다
지난 몇 년, 집이라는 ‘테제’에 골몰했다. 몇 편의 시를 썼다. 내가 지은 집은 한쪽은 ‘비트’였고, 다른 한쪽은 ‘빈집’이었다. 비밀과 투기投棄로 지은 집 안에서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는 자였고, 또한 오직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자였을 따름이다. 생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애써 무관심했고, 오로지 목표가 금지된 미래의 창문으로만 흘러들어가는 세레나데에…… 귀를 막고 몸을 돌렸을 따름이다. 욕망은 자신의 성기 바깥에서만 대상을 구할 수밖에 없는 우정을 섬겼고, 상시적인 재난과 초현실적인 공포 속에서 애도는 감정을 이론으로 번역해 나달나달한 표정을 만들어서, 그것을 무기로 삼았다. 나는 자신의 죄가 신비한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
내게는 마땅한 직업이 없다. 눈을 뜰 시간이 넘쳐난다. 애써 눈을 감을 휴식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다. 어떠한 業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긴장과 무위 사이에 애써 자신을 부릴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시에 일상을 강요하지 않았으므로, 부러 발견과 성찰에 긴요한 강박을 부릴 일이 없었으나, 항시 끝까지 사유했다는 느낌과 끝까지 느껴버렸다는 사유 속에서 움직거렸다. 어쩌면 나의 시는 자본주의의 신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다. 나는 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당신들이 짓는 벌을 대신 받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집을 떠나고 또 떠나고 떠난 것이다. 그래, 나의 집은 한쪽은 비밀이 지키고 있고 한쪽은 허방이 지키고 있는 것.
*
인내, 인간은 스스로 돌아볼 기회를 박탈당한 후에라야 거울을 정면으로 본다. 응시한다. 인내의 결과는 고통이고, 새로운 고통을 사기 위해 새로운 공포를 판다는 것을 안다. 고통의 결과는 공포이고, 인내를 없애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시 속에서 너무도 많은 ‘자아’들이 너무도 많은 것들을 인내해야만 했다. 아무도 죽지 않는 나라에서 염장이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앞에는 가시와 불길이 치솟는 평원이 끝없이 펼치고, 뒤에서는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폭풍우가 뒤쫓고 있다. 이제 우산을 펼칠 차례인가? 피부가 아직 알지 못하는 빗방울을 받을 차례인가? 불을 택할 것인가? 물을 택할 것인가? 우리의 살인자들마저 살해당하는 나라에서 누가 관을 만들어 끌고 갈 것인가?
*
어쩌면 내 시가 말하는 희망이란,
우리가 불행이라는 이름의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사실이 주는 안온함.
*
어린 시절에는 철로에 앉아 해바라기를 했지. 녹아내리는 부젓가락처럼 길게 뻗은 레일 위에 구슬이며 동전을 올려두고 기차가 지나가기까지 한참을 앉아 기다렸어. 파직, 불길이 지난 자리에는 눌어붙은 유리조각이며 동전. 그걸 주워들고 뒤꼍에 앉아 불을 지폈지. 녹슨 프라이팬 위에 동전과 납을 놓고 한참을 녹여서 만질만질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본을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나 할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그곳에 돌아가 보았더니 역 광장은 손바닥만 하고, 철로에는 새로운 풀이 돋아나 있더군. 역시 제일 좋은 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나는 바랐지 내 아버지가 뱀장어를 만 마리쯤 죽이고 피를 마신 도살자이기를, 그리하여 그 피가 내 혈관을 가득 채우고 흐르는 양을 내 시가 바라보고 견뎌주기를.
*
역시 가장 좋은 아버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이고, 가장 좋은 시는 아직 쓰이지 않은 시인가?
먼 훗날 돌아보면 그곳에도 항시 새로운 풀이 자라고 있겠지. 그러니,
꿈꾸지 마라, 다른 세상은 없다.
신동옥 -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시작노트 『서정적 게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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