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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집중조명/이성혁/마지막 운지법을 발명하기 위하여-신동옥의 신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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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혁
마지막 운지법을 발명하기 위하여
- 신동옥의 신작시
여기 리토피아 2015년 봄호에 발표되는 신동옥의 신작시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그가 상재한 두 권의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2008)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2012)를 읽었다. 앞의 시집은 그 시집이 나온 직후에 읽은 바 있으니 다시 읽은 셈이었으나 뒤의 시집은 이번에 처음 읽은 것이다. 그러나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도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낯설었다. 두 권 모두 편안히 읽을 수 있는 시집이 아니다. 어떤 시집을 읽으면 세상에 맞서 자신만의 세계를 극단의 지점에까지 밀고나가 구축하고자 악전고투 하는 영혼과 만나곤 하는데, 신동옥 시집에서도 그러한 영혼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그 움직임을 좇으면서 나 역시도 어지러워졌고, 좀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마음까지 생길 정도였다. 후자의 시집 해설을 쓴 강정 시인이 “여러 번 이 원고를 찢고 싶었다”면서, 그것은 “저주와 자멸의 괴성으로 울림통을 적시는 소리가 또 그렇듯, 현실의 표면까지 물들이는 혼몽의 흔적들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가 이해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의 시집들을 읽으면서 시인의 손에서 풀려나간 어지러운 말들은 어떤 성실성에 따른 것임을 직감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신작시와 함께 실린 「시작노트」에 신동옥 시인이 쓴 “항시 끝까지 사유했다는 느낌과 끝까지 느껴버렸다는 사유 속에서 움직거렸다”는 문장이 거짓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것이 그의 시작법이요 그의 시적 욕망이며 시에서 나타난 그의 영혼의 움직임이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는 아나키스트로 자처하는 한 시인이 세상으로부터 모독당한 데 대한 분노와 절망, 니힐리즘과 자조를 펼쳐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면서 살기 위해, 시인은 2부의 「악공」 연작을 통해 개인적 신화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보였다. 「누전」이라는 시는 그의 세계인식과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보여준다. “단 한 줄기의 흐름이 탈취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당국은, “소리 분리 수거법”을 강화하여 “접지가 안 된 채 떠 있”는 “당신에게서 당신이라는 흐름을 매듭지”으려고 한다. 시인인 ‘당신’은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누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적하여 당신에게 “Anarchist 연맹은” “반국가적 복화술 책동을 고지”한다. 말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당국의 권력을 교란시키는 아나키스트의 복화술이 ‘당신’이 쓴 시일 것이다. 복화술은 현악기가 자아내는 선율처럼 말을 구성하는 시학에 의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당국이 통제하고자 하는 말을 누전처럼 흘리고자 하는 시인에게 그의 발에 채워진 족쇄와 같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완강한 주름의 책”인 “비명횡사의 가족력”(「아비 정전(正典)」)이다. “발목에 밧줄을 엮은 채/모든 아비들은 열쇠를 들고 앞장”서는데, 시인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항렬(行列)의 연쇄”(「성묘」) 끝에서 그들을 따라 갈 수밖에 없도록 강제된다.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의 앞부분에 진술되고 있는 “근친상간의 친밀감”(「회기(回期)」)는 수직적인 아비들의 혈통을 수평적인 근친상간으로 어지럽히고 가르려는 아나키스트의 전술 아닐까 생각된다. 이때 신동옥 시인에게 ‘친친’이라는 단어가 그의 사유를 나타내는 핵심어로 부상한다. 친친(親親)은 사전적으로 “실이나 노끈 따위로 꼭꼭 감거나 칭칭 동여매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면서 “도리에 따라 친하여야 할 관계에 있는 사람과 친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친과의 관계에 들어맞는 말이다. “어느 죽은 자의 머리카락이 너를 친친”(「왈츠」)감아 “너를 하늘 너머로 실어갔다”라고 시인이 말할 때, 그 죽은 자는 바로 아비와 같은 육친 아니겠는가. 그런데 시인의 개인적 선언문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는 「친친」에서 시인이 “사랑하는 나를 친친 죽이고 싶은 나를 친친 낳은 쌍둥이 엄마 하나를 지우는 호적 아래서 웃고 춤추고 여름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수직적인 ‘친친’을 수평적인 친친으로 전용(轉用)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수평적으로 손을 잡고 웃으며 춤추고 여름하는 근친상간적인 친친으로의 전용. 그것은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이 세상과의 전투를 위한 교전지도로서 친친을 전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일부를 인용해본다.
친친이라는 인칭 속에 깃들인 나라는 인칭 속에 잠든 당신이라는 피와 당신이라는 숨결 당신이라는 아침 우리의 인칭은 확전을 꿈꾸고 잠든 인칭 안에서 우리의 교전지도는 아름다워라 이 무지와 이 호기심과 이 미명 앞에 당신과 친친과 친친이 가진 유일한 비참 속에서 당신만의 그 모든 진창 속에서 나를 식별하리라 선언적으로 명제적으로 아침을 맞으며 뒤통수를 도끼로 깎아지른 것만 같은 직유의 몸으로 친친하리라 쓰리라
호적을 지우고 당신을 나라는 인칭 속에 친친 재우는 것. 비참한 근친상간의 친친으로 맺어진 당신 속에서 나를 식별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라는 인칭을 형성하고 확전을 꿈꾸는 것. 이때 씌어지는 교전지도는 아름답다. 이 비참하고 아름다운 교전지도가 신동옥의 시가 되지 않겠는가? 그 전투는 “뿌리를 박고 기둥을 세우고 지반을 다지는 것도 아닌 구덩이”를 만드는 것이요, “우리의 피와 잡념이 묻”힐 그 구덩이는 “언젠가 광장이 된다는 것”(「僞經」)이 시인의 희망이다. 구덩이를 파는 일이 바로 시 쓰기-교전지도 그리기-일 터, 시 쓰면서 사는 “내 삶은 잠 속에서 교전 지도를 확장”(같은 시)한다. 신동옥의 시집에 펼쳐진 다채로운 세계를 이렇게 요약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지만, 시의 정치성과 젊은 시인들의 세계에 대한 대응 양상에 관심 있는 나로서는 신동옥의 시집에서 이런 면이 주로 포착되었다.
신동옥 시인의 시집들에서 보여준 그의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세계에 대한 시적 대응과 비교해볼 때, 여기 실린 신작시들은 ‘시인’이라는 존재와 ‘시 쓰기’ 자체에 대해서 그가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맨 처음에 실린 시의 제목이 ‘시인’인 것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 듯싶다.
돌멩이로 누를 수 없고
책갈피를 끼워 넣을 수 없는 빈자리 끝에서
눕고 서고 기고 꺾이고 잘리고 닫히고 흩어지는
삶의 도화선
그 타들어가는 모양을 개미걸음으로 따라가는 일
그 끝없는 이야기의 바깥에 필터를 꽂아 숨구멍을 틔우는 일
그는 태어나면서 한 번 울고 살아가며 눈감고
마지막으로 한 번 웃으리라.
웃음은
타들어간 종이처럼 묘비명을 쓰겠지.
- 「시인」 부분
삶이 책이라고 할 때, 삶의 도화선은 “돌멩이로 누를 수 없고/책갈피를 끼워 넣을 수 없는” 책의 “빈자리 끝”에 놓여 있다. 삶을 발화시킬 그 도화선은 타들어가면서 “눕고 기고 꺾이고 잘리고 흩어지는” 변용과 운동을 거듭한다. 시인은 우선 이 타들어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도화선을 따라가야 한다. 그것은 개미걸음처럼 느리지만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노력은 그 타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도화선-삶의 이야기-에 “필터를 꽃아 숨구멍을 틔우”기 위해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화선은 삶이라는 책을 태우면서 마지막 폭파를 향해 타들어갈 것이다. 이때 책의 빈자리 끝에 놓인 삶은 도화선으로 인해 함께 타는 종이가 될 것이다. 시에 따르면, 삶의 “끝없는 이야기”에 숨구멍을 틔우는 일이란 이렇게 “타들어간 종이처럼 묘비명을 쓰”는 일 아니겠는가. 묘비명이란 죽음이 삶을 바라보았을 때 쓰는 문구다. 그렇다면 삶을 살면서 자신의 묘비명을 쓴다는 일은 도화선의 끝인 삶의 폭파-죽음-를 미리 앞당겨 세상에 드러내는 일 아니겠는가. 이때 죽음을 향해가는 삶에 도리어 숨구멍이 틔어지게 된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 아닐까.
묘비명을 쓰는 사람은 그래서 죽음을 미리 살며, “비워져가는” 삶을 산다. 묘비명을 쓰면서 사는 ‘시인’은 죽음에 이르러 폐허가 된 삶을 선취하여 그곳에서 언어를 길어내야 한다. 하여, 그는 역설적으로 사라지는 말들을 보전한다. “무너진 종탑” 아래 “억새와 대나무가 우거진 옛 수풀”이 되어버린 폐허에는 샘물이 있는 것이다. 그 폐허를 비출 샘물은 시를 구성할 말들을 품고 있다. ‘시인’은 그 “수면 아래에” 있는 “만질만질한/돌멩이”, 그 “투명한 어휘들”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가 발견한 어휘는, 삶을 태우고 태워서 얻은 증류수를 잉크로 삼아 종이에 씌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는 ‘시인’에 대해, 비약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연에서 신동옥 시인은 “눈먼 여백 제도사”라고 지칭하고 있다. ‘여백 제도사’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존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여백을 제도한다는 일이 가능한 일인가?(이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막 출간되었다는 시인의 산문집 서정적 게으름을 읽어봐야 하리라. 아직 입수하지 못한 그 책에는 「여백 제도사의 삶」이라는 산문이 들어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말이 시인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못한 채로 시를 읽어보는 것도 의미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여하튼, 이 제도사는 여백을 제도하는 사람일 텐데, 「시인」에서 그 여백이란 바로 삶의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책의 “빈자리 끝”을 의미할 것이다. 시의 문맥에 따르면, 여백 제도사는 삶의 여백에서 타들어가는 그 도화선을 따라 걸어가서, 숨구멍을 틔우는 필터를 삶의 바깥에 꽂으며 여백을 제도하는 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는 눈먼 사람이다. 어떻게 눈먼 그가 여백을 제도할 수 있었는가? 폐허에서처럼 “늘어진 그림자를 끌고 선” 삶의 “빈자리 끝”(여백)에는 “경전을 새기는 철침 같은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눈 먼 시인은 폐허 마을에 내리고 있는 철침 사이를 걸어가면서, ‘철침’이 새기는 경전의 문자를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감지한 경전의 문자들로 타들어가는 삶의 도화선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있는 삶의 빈자리 끝을 그 문자로 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제도는 필터 꽂기, 즉 묘비명 쓰기 등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묘비명 쓰기는, 시에 따르면 구약의 경전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비워져가는 시인이란 존재는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신동옥 시인은 ‘시인’이란 “기도하는 손아귀처럼 등이 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에 관련하여 읽으면, 「손가락을 맞대자」에서 신동옥 시인은, 기도하듯이 손가락을 맞대는 것, 더 나아가 타자와 세계의 손가락을 맞대는 것이 시를 쓸 때-연주할 때-의 운지법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이 시에서 시의 이상(Idea)을 음악과의 유추를 통해 사유한다. 그리고 이 사유는 낭만적으로 웅장한 시적 상상을 통해 전개된다. 이 시에서 ‘시인’이란 존재는 “오아시스를 연주”하고 “태평양을 두드”려 “새를 불러 모으고 꽃 피우”게 만드는 신적인 능력을 갖춘 자다. 그런데 곧 ‘나’는 우리로 확장되어, “우리의 손가락은 5대양 6대주 위에 떨고 있”다는 진술이 뒤를 잇는다. 이에 시를 연주하기 위한 악기는 우리의 “서로 가장 아파했던 뼈”이며, 그 악기의 현은 우리의 ‘힘줄’이다. 이러한 악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연주”를 통해, “하늘이 열리”고 “밤하늘은/말 넓적다리 궁둥이처럼 빛”난다. 하여, 사막으로 가고자 하는 화자의 주변에는 “당신 얼굴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불빛이 너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는 시의 이상이 열어놓은 세계이며, 지금 이 땅에는 “별을 저녁으로 들이기에는 차 우리는 향기가 부족한 시간”이 흐를 뿐이다. “어제 죽은 자들을 묻고 애도의 주문을 흙 뿌리”듯이 무덤에 넣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 무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 소리는 “우리의 아이가 태반 밖으로/귓바퀴를 돋우는 몸의 사랑”이 내는 소리다. 이 소리를 들은 시인은 다짐한다. “꽃피는 임신선을 따라 자맥질하겠”노라고. 머지않아 “갈라터지는 살무덤 속에서 다시 몸의 사랑을 발명하겠”노라고. 위에서 언급해본 시 「친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시인은 “곤두선 핏줄은 더욱 기괴한 자세로 친친을 짓누르고 찢긴 나의 윤무에 끼어들어 너 자신을 발명하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와는 달리 이제 시인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 몸의 사랑을 시의 연주를 통해 ‘발명’함으로써, 저 애도를 넘어 죽음의 세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시의 연주가 어떤 세계를 펼쳐내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연주는 “음표의 날렵한 물고기들”이 “음악도 없는 바다를 잘도 헤엄쳐” 이곳과 바다 건너의 세계를 연결해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바다 건너의 세계란 죽은 자의 세계 아닐까?) 연주할 때 발산되는 음표는 음악 없는 바다 “깊은 곳으로 자맥질”하여 바다 건너 세계를 맞잡을 수 있는 “창백하고 긴 긴 손가락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창백한 손가락과 바다 건너에 있는 이들의 손가락이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손가락을 따라 전류가 흐르고 침묵이 고이고 우리/서로의 지문이 얼굴에 파이는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지문은 저편의 존재와 여기의 존재가 침묵 속에서 부르는 노래의 악보가 잠재되어 있다. 시에 따르면, 이 노래가 들릴 때 “절망이 부족한 제국의 하늘 위로 악보 하나 떠오르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며, 이 악보의 “구름의 무한 도돌이표”를 따라 지상에 뿌려지는 비를 통해 그 노래를 연주하는 심벌즈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다 건너의 너와 나, 하늘의 심벌즈를 닦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연주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며, 너와 나의 손가락을 맞대는 것은 “삶의 몫으로 남겨진 마지막 운지법을 발명”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읽어보니, 신동옥 시인은 이 시를 작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몸의 사랑을 발명함으로써 저 바다에서 죽어야 했던 자들과 손가락을 맞댈 수 있을 때, 살아 있는 자들의 몫으로 남겨진 음악-시-을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할 수 있음을 사유해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죽은 자들과 손을 맞잡고 연주하는 음악, 그것은 「말 우는 밤의 노래」에서 죽은 말을 타고 그 말과 함께 내는 울음소리일지도 모른다. 이 시의 1연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지음(知音)’이었던 말의 죽음에 대해 “유령처럼 나의 말이 뛰놀던 생시의 수풀을 어슬렁거”리면서 슬퍼하고 있다. 말이 죽던 밤에는 “채찍을 휘두르던 부끄러운 손으로 서투르게 손풍금을 연주”하면서 슬픔을 달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호각 소리 휘파람 소리 찻물 끓이는 주전자를 빠져나와 천장에 맴돌 때” “꿀벌들이 소란을 몰고 돌아오는 꿈을” 꾼다. 그 직후에 그는 그 주전자 물 끓는 소리가 “나의 말이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부르는 “노동의 노래”였음을 깨닫는다. 끓는 물처럼 “뜨겁고 뜨거웠”던 그 노래는 “말갈기에 별빛을 적시어 토한 뜨거운 입김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더 나아가 그는 ‘나’를 태우고 달리는 말의 노동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은하의 물길을 차가운 피로 덥히며” “저 검은 하늘에 우리의 별자리를 만드는” 일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지음’인 말의 노동과 함께 한 날들이 얼마나 거대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는지를, 그리고 말의 삶이 “등자도 안장도 없이 발굽 하나로 무한을 구르기에 맞춤한 노래”였다는 것을 말의 죽음 이후에 더욱 사무치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리라. 하여, 그는 이 시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가끔 나의 말과 고개를 마주하고 안개 속으로 뻗은 길을 끝 없이 끝 없이 달리는 꿈을 꾼다네 그때마다 나의 말은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해 서녘으로 기운 태양을 등 돌리고 동녘을 향해 뻗어가는 말머리성운을 보여주었다네 그러고는 촉 없는 깃 없는 움켜쥘 손목조차 잃어버린 가난한 나의 붓에 갈기를 한 움큼씩 채워 넣었지 발걸음도 경쾌한 나의 붓은 말 우는 밤의 노래를 받아 적기 시작했지
어느 밤 나의 말은 뜨거운 콧김 속에 빛나는 눈망울로 속삭였다네 당신은 나의 지도입니다 발치에는 뭉개진 지푸라기 땀방울로 반질반질한 여물통 나는 헛간을 나와 휘파람을 불었다네 눈보라 치는 허공에 긴 뒷덜미들이 달리는 소리 들렸네 아니라네 그건 나의 말과 나를 가로지른 기압골이 몸 바꾸는 소리였네 나는 뜨거운 침을 목덜미에 문질러 닦고 한바탕 울었네 히이힝 말머리성운 한복판에서 나의 말이 덩달아 우네 히이힝 히이힝
죽은 말은 이제 화자를 “안개 속으로 뻗은 길을” “끝 없이 달리는 꿈을” 꾸게 만든다. 그 말은 “마법 같은 힘을”갖고 있어서 “동녘을 향해 뻗어가는 말머리 성운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죽은 말은 화자의 시적 상상을 이끌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말은 신동옥 시인의 상상력을 이끈 타자로서의 존재였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알게 된다. 하여, 죽어서도 그 말은 “손목조차 잃어버”려 시를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시인의 붓에 “갈기를 한 움큼씩 채워 넣”어주는 존재가 되며, 그래서 그렇게 갈기처럼 가벼워지고 말의 발걸음처럼 경쾌해진 “나의 붓은 말 우는 밤의 노래를 받아 적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은 말은 시인을 태우고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어 그가 시를 쓸 수 있도록 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리하여 죽은 말이 화자를 태우고 달린 길이 기록되는 것이 바로 시다. 그 죽은 말이 화자에게 “당신은 나의 지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친친」을 살펴보면서 신동옥 시인에게 시 쓰기란 ‘교전지도’를 작성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 시인은, 그 지도를 작성하는 것은 말이었으며 시인이란 말의 행로에 따라 지도가 새겨지는 종이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말의 행로를 기록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 기록은 그가 “눈보라 치는 허공에 긴 뒷덜미들이 달리는 소리”를 시인이 들었을 때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나의 말과 나를 가로지른 기압골이 몸 바꾸는 소리”다. “나의 말과 나” 사이에 그려진 기압골-사전에 따르면 여러 개의 등압선이 모여 골짜기를 이룬, 기압이 낮은 부분-이 주름처럼 생성되다가 그 기압골이 몸을 바꾸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떤 소리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은 말 홀로 지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지도는 죽은 말과 ‘나’ 사이의 인력이 만들어낸 주름에 따라 그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과 ‘나’ 사이에 형성된 인력의 주름은 울음소리를 내게 만든다. 그 주름에 의해 ‘나’는 말을 타고 가면서 “뜨거운 침을 목덜미에 문질러 닦고 한바탕” 말처럼 울게 되고, 그 울음소리에 호응하듯 나의 말도 덩달아 울게 되는 것이다. ‘나’의 ‘죽은 말’되기가 이루어지면서 울음소리-시-가 발생되는 것, 즉 시를 이끄는 어떤 타자-힘-을 타고는 그 힘과의 관계 속에서 그 힘에 ‘히이힝’ 미메시스 될 때, 시 쓰기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시인 안의 노동자이자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만들어주었던 타자로서의 노동자. 위의 시는 시인의 시 쓰기를 이끌었던 ‘시의 노동자’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그 죽은 자-힘-를 재발견하고는, 죽은 자-힘-와의 관계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시 쓰기의 힘-말과 같은 노동자-을 다시 얻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이와 더불어 「연해주 1937」은 실제 인물로 보이는 ‘신석휴’의 삶을 그려내면서, 시인이 아니지만 시인의 영혼을 가졌던 어떤 이민 노동자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1894년에 1987년까지 살았다는 신석휴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이 연도에 산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 유명한 사람은 아니다. ‘신(申)’씨인 것을 보면, 그는 신동옥 시인의 할아버지 또는 친척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신석휴의 삶을 상상하고 재구성하고 있는 신동옥 시인은 자신의 ‘아비들’과 화해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며 자신의 삶에서 그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물론 그가 실제로 누구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이 시의 독해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화해와 이해는, 신석휴라는 인물이 고향을 잃고 디아스포라가 된 노동자이자 시적 영혼을 가진 이였기 가능했을 것이다. 시인 안에서 시를 이끌었던 ‘노동자-타자로서의 말’을, 시인의 삶 밖에 존재했던 신석휴라는 과거의 실제 인물에서 발견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석휴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이 시의 화자-1937년을 살고 있는-일 것이다. 조선인 이민자인 그는 조선을 떠나 사할린에서 살아가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지나 청진 지나 부산 지나고 더 더 남쪽”인 고향 남양으로 내려가기를 동경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고향은 “유자나무 그늘에서 죽은 자들이 따뜻한 노동요를 부르는 곳”이다. 그곳은 죽은 자들이 산 사람을 따스하게 품어주는 곳이다. 이에 반해 그가 살고 있는 추운 사할린 북녘은 “툰드라의 끝으로 추방되어간 노예들과 세포 속에 간직한 미토콘드리아의 노동을 눈이 무언지 모르는” 곳이다. 시인은 그 땅을 벗어나길 원한다. 그래서 피리를 불어 “영원히 얼지 않는 저주받은 바다”를 얼어붙게 하고는 “빙하기의 매머드를 타고” 고향까지 내려가기를 꿈꾼다. 그러한 귀향에의 염원은 한국어에 대한 그리움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시의 화자가 “우리의 아이들이 ㄱ ㄴ ㄷ ㄹ ㅁ ㅂ ㅅ 자라는 들 위에 강이 흐르고 강물에 다시 버드나무 잎새가 낭창낭창 드리울 때”를 추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리고 “아리랑은 아리랑이라는 뜻이고 안녕은 안녕이라는 뜻이고 노래는 노동에 좋고 술은 잠에 좋다네”라면서, 타국인-아마도 ‘아이누’일 것이다-에게 동어반복적으로 한국어의 뜻을 말하고 있는 것은, 한국어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 한국어의 존재 자체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그의 의지의 표명이라고도 여겨진다.
그는 “얼어붙은 내 피는 이제는 거의 연보랏빛 핏속에 움직이는 세포는 작은 뗏목이라네”라고 말할 정도로 언제나 고향으로 내려갈 뗏목을 핏속에 준비해두고 있다. “항구에 호박돌을 박아 넣”는 노동을 하다가 “핏속에 숨겨둔 뗏목을 꺼내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뗏목을 타고 고향에 갔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배를 타고 이곳에” 와서는 후손에게 한국어를 전달하겠다는 뜻을 품는다. 한편 그의 핏속의 뗏목은 한국어를 태워 후손에게 전달하기도 할 것이다. 이는 그의 피가 후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먼 훗날 나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은 살아 돌아온 나의 곰방대에 머리통이 깨져가며 ㄱ ㄴ ㄷ ㄹ ㅁ ㅂ ㅅ 배위 시인이 될 것”임을 희망할 수 있다. 대대로 전해내려가는 피를 타고 한국어가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국인 앞에서 한국어를 쓰기만을 고집할 수는 없을 테다. 그래서 그는, 고향을 향하여 “얼어붙지 않는 질척질척한 바다를 걷다가” 결국 “추위 속에 따뜻한 국물 따뜻한 술하고 키릴어를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 역시 타향의 언어에 동화될 것인데, 하지만 화자는 이를 슬퍼하지는 않는다. 그가 “건강을 위하여라는 뜻”의 타향의 말 “즈다로비야”를 ‘아리랑’과 함께 외치면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읽어보니, 이 시 「연해주 1937」은, 신동옥 시인이 디아스포라적인 한국인에게 한국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깊이 사유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이는 시인인 자신에게 언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성찰하고 있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굴」이라는 시는 이러한 성찰에 덧붙여, ‘gul’로 발음되는 한국어 ‘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극한으로까지 전개해본 실험시 아닐까? 어떤 한국어에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를 증폭해내겠다는 실험. 이 시는 지금까지 보아온 신동옥의 시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를 해석한다는 것, 현실에서 통용되는 의미의 층위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굴’에서 산출되는 이미지들이 그 단어에 잠재되어 있는 결에 따라 자기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개는 눈부신 면이 있다. 그래서 이 시에 대해 어떤 해설의 말을 덧붙이기보다는 독자에게 이미지의 전개 그 자체를 따라가 보라고 권유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성혁 - 문학평론가.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저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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