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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산

일회용 시대 외 4편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아침을 때운다는 어느 집 며느리

원터치로 끼니가 해결되는 시대,

남아도는 시간은 어느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까

아궁이에 바친 시간과 밑불로 간을 맞춘 가마솥의 시간은

또 어디로 갔을까

오나가나 속도 전쟁이다

종이컵이 3분 만에 라면을 안치고 끼니를 짓는 사이

몇 초 만에 자판기가 커피를 끓인다

면도기, 비누, 기저귀, 종이접시, 젓가락…

소비는 가볍고 흔적은 무겁다

지하철 서울역 가판 광고대가 ‘일일 애인’을 팔고 있다

사랑도 일회용

단명한 사랑들이 곳곳에 쌓였다

대충대충 빨리 빨리

쓰레기통마다 버릴 것이 넘쳐난다

버려진 시집 한 권

시인의 진심도 누군가에게는 일회용이었다

이런 가벼운 순간들은

날마다 날개를 달고 태어난다

궤도를 이탈한 속도에 포위된 나는

눈만 껌벅이며 그 뒤를 어설프게 따라간다

국주論

탁주의 탁한 끝 맛에는

농로에서 새참을 때우던 서민들의 컬컬한 소리가 들어있고

배곯던 시절 허기의 여운도 있다

국주란 나라마다 국민성이 들어있다

보드카는 슬라브 족의 저력이

스카치에는 앵글로 섹션의 질긴 줄기가 들어있고

맥주는 골 깊은 겔만족 끈기이고

라틴족은 와인빛의 여유이다

벚꽃 향 일본 청주가 있는가 하면

중화대륙은 화주火酒의 품속이다

그러나 막걸리는 순한 숙성을 거쳐

막 걸러 탄생시킨 술

그 속에 하늘 냄새 흙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품고 산 서민들의 땀 냄새가 익어서이다

잔과 입술에 묻어나는 희끗한 앙금

탁한 살은 무겁지만

컬컬한 취기는 하늘을 난다

맑은 빛과 향의 취기가 배어있는

안동골과 대동 강변, 경주, 전주 산기슭에서도

고유의 취기를 담은 맑은 물소리 들린다

현금 인출기

현금 인출기 앞

기계는 나를 향해 명령한다

—카드를 넣고 암호를 누르시오

스르르 내가 열린다

더는 숨을 곳이 없다

마이너스로 차곡차곡 쌓인 골 깊은 주름살

출혈과 수혈의 균형이 깨져있다

오랫동안 앓고 있는 중병을 눈치 채고

마이너스 연장을 하라 한다

통장을 들고 은행 안으로 들어서니

따가운 시선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경비원에게 대답할 용기가 없어

그 길로 돌아 나온다

몇 푼의 잔고가 나를 따라온다

다급할 때마다 수없이 나를 인출해 썼다

사람냄새

장마 초입

종일 비가 오락가락한다

저물녘 돌계단에 멈춰 서서 젖은 텃밭을 내려다본다

옥수수 키가 제법 힘차다

짙푸른 고구마 이랑을 밟고 있는

새끼 고라니 두 마리

나를 마주 보고 있다

뒤에서 집사람이 작은 소리로

그대로 두라한다

원래는 그들의 놀이터였다고

나의 노동력을 넘어선 곳

이미 강아지풀 쇠비름 개망초 떼가 점령한 곳이기에

불러보고 싶은 마음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사람냄새를 맡았는지

재빨리 숲길로 숨어버린다

고라니를 놓친 텃밭이 무춤하다

나를 쓰다

오늘 또 하루 나를 써 간다

한 번 짚은 발자국 지우지 못하고

뒤로 돌아서지 못하는

삶의 운행, 이미 퇴색한 책갈피 속은 골이 깊다

채색에 매달린 얼룩진 시간

비워지지 않아 놓쳤던 일들

아슬아슬한 중독의 흔적들이다

내 生의 대차대조표는 어디서 어긋났을까

어느덧 4부 목차를 쓴다

또 성글어가는 하루가 바람에 날리고

남아있는 페이지는 많지 않다

어차피 나는 ‘나’의 저자이다

수많은 목차들

그 마지막 사진 아래 펼쳐질

나를, 어떻게 읽어줄까

남이 보는 내가 진정 나일까

오늘 하루도 페이지가 느슨하다

남은 여백에 하현달을 걸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