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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소시집/김명기/봄날은 안녕하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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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3,716회 작성일 15-07-10 11:07

본문

김명기

봄날은 안녕하다 외 4

 

 

삶과 죽음의 경계 명확한

도축장 한 귀퉁이

벙글대로 벙근 목련 진다!

그 그늘아래 조팝꽃 한창이다

죽음 대수롭지 않은 여기

목 떨어지고 다리 잘린, 속내까지 다 파 해쳐진

핏빛 축생의 응고되지 않은 주검을

이리저리 끌고 밀며 다니는 내가 안녕하듯

저렇게 지는 꽃그늘 속 또 다른 생은 안녕하다

세상 어느 귀퉁이에는 누군가의 찬란한 치장을 위해

팔 다리 잘린 아이들이 절룩절룩 자라고

그 애비들 평균 수명은 마흔이 채 되지 않는다는데

그토록 비참한 얘기마저 이 봄 같은 홀망한 날

막 봉오리 터뜨린 여남은 송이 철쭉처럼

군데군데 자주 빛 핏방울 번지는 작업복위로

이 살풍경의 배후 같은 햇살이 기울고

그 사이 꽃잎 몇 장 더 떨어지고

떨어진 꽃잎 몇 장 끌고 다른 꽃을 밀어 올리며

이렇게 안녕하신 봄날은 가고 있다

 

 

 

 

폐광지대

    

 

이곳을 떠난지 오래되었다

지나온 길 빗금처럼 차창을 스치는 풍경보다

생각이 더 많았다 나보다 한걸음 늦게 도착한 햇살이

능선 한 자락 걷어내자

꺾여버린 생가지 축 늘어뜨린 채

반쯤 몸을 접은 설해목 몇 그루

몸뚱이에 꽂힌 튜브로 생을 연명하며

사는 것에 질렸다는 듯 누렇게 말라가던

규폐병동 친구 아버지처럼

나무들도 이내 생장을 멈출 것만 같았다

어둠이 다시 어둠을 덮어버리는 시간 속

빛을 캐러 갔다 끝내 화석이 되어버린 사람들

거대한 무덤 같은 갱도 입구엔 연초록 잎사귀에 밀려난

참꽃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철마다 찾아드는 쓸쓸하고

유일한 조문이었다 떠나기 위해 증오를 키우고

떠날 수 없어 사랑을 키웠던 사람들

얼마나 무모한 저항이거나 절망이었든가

모든 영롱함이 몰락하기 전까지

다만 일용을 위해 악착같았던 날들을

안일한 낭만이 밟고 지나가는 아늑한 봄날 오후

, 그 증오와 사랑사이에서 나고 자랐음이 분명한데

저 언덕배기 어디쯤에선가 검은 화차 위로 팔매질하던

하얀 국돌처럼 먼 곳으로부터 그리움하나 챙기지 못하고

내가 지닌 최초의 불길不吉로부터 도망치듯

이곳을 떠난지 너무 오래되었다

 

 

 

 

별리

    

 

은행잎 노란 물 든다

청춘, 어느 날 우리처럼 한 사랑이

또 다른 사랑에게 고하는 이별 같은 소식

애태우며 바래다

작은 바람이라도 일면 와르르 몰락하겠다

몰락은 흩어지며 사라지는 일

마지막 순간까지

떨켜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 쓰지만

이별의 그늘은 줄다리기 승자처럼

힘의 반대편으로 점점 길어져

더 이상 감싸 안을 긴밀함이 남지 않을 터

한때 사랑하던 사이

잎 피고 꽃 지던 나무

오천년만 지나면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들

더 이상 시절이란 세상에 없는 시간

무너지는 시간의 기억 같은 빈가지 곁을

무심히 지나는 당신들과

몰락의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자동차들까지

모든 것들은 쓸쓸히 사라지고

사라짐을 위해 많은 시절이 또 오겠지만

그래도 우리를 기억해 줄 것 같은 이 순간

텅 빈 손바닥처럼 배웅하듯 흔들리는 나뭇잎 새로

막 당도하는 가느다란 몇 줄기 빛에게

나의 안부를 다시 묻는다

 

 

 

 

사끼야마 さきやま

 

 

슬픈 식민지시대와

내전이 멈추고도 한참 후 태어난 내가

말 떼고 처음 배운 외래어

툭하면 연탄가스 마시고

비바람 들이치는 광산촌 보로꾸 사택에 살며

고만한 또래끼리 하루 수 십 번도 더 하던 말

말의 색깔은 불완전 검정 명사

동시에 전사戰士였으며 불기둥이었다

 

어느 날은 처참한 주검이기도 했으나

애비들은 건사해야할 식솔과 제 목숨을

담보 잡히고 더듬이대신 캡램프를 뒤집어 쓴 채

두더지 보다 더 깊이 땅속을 파고들었다

사학년 때 담임은 가끔 먼 산을 응시하다

저 산 아래 등허리 구부리고 기어 다니는 아버지들을 위해

공부 열심히 해라 힘주어 말하곤 했지만

우리담임을 끝으로 그는 학교를 떠났다

 

뒷모습과 앞모습을 구분 할 수 없던 검은 사내들

먹고 사는 일이 한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의

경계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이승과 저승사이

피폐해져가는 애비들의 생을 빨아먹는 거미처럼

뼈마디 굵어지고 콧수염 거뭇거뭇해지던 시절

죽음의 순간이 와도 굴레를 벗지 못하는 하리잔*처럼

막장이 생의 시작이라던 애비들

희망이란 부도난 어음을 꼬깃꼬깃 말아 쥔 채

이 땅 마지막 불가촉 계급이 되어버린

*하리잔: 인도의 계급체계인 카스트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는 집단

 

 

 

 

이기적 유전자*

 

 

그의 아버지는 사끼야마**였다.

그의 큰형도 사끼야마였다.

그해 봄 아버지 낙반사고로 돌더미에 깔려죽었다.

그 가을 갱내 폭발로 큰형도 죽었다.

그는 봄엔 울었으나 가을엔 울지 않았다.

우린 열아홉 살이었고 죽지 않기 위해

날마다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대입학력고사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

담배를 물고 교련복을 입은채

운동장을 걸어 나가던 그의 뒷모습을

삼층 복도 끝 창가에서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태백역 근처에서

이십년 만에 종태를 만났다.

홍시빛깔 포장마차에 감씨처럼 틀어박혀

잘 먹지 못하는 소주와 산낙지를 시켜놓고

긴 세월만큼이나 물러터진 물오이만 씹었다.

객지를 떠돌다 돌아 온지 여섯 해

늦장가 들어 애들이 아직 어리다며

이제는 어둠이 익숙하다고

예전처럼 큰 사고는 나지 않아 다행이라며

묻지 않은 말에 혼자 중얼거리다

이런 것도 틀림없이 유전이라고

고개 돌리며 웃었다.

 

그 늦가을처럼

눈물대신 담배를 피우며

허공을 향해 둥근 연기를 쏘아 올리던 그가

유치원 다니는 큰애는

지 애비 직업이 사끼야마라고

어릴적 우리처럼 말한다고 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에서 차용

모든 유전자는 개체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자손을 남기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

**광산 막장에서 채탄 작업을 하는 선산부

 

 

 

 

시작메모

나의 생

 

 

객지와 먼 바다를 떠돌다 집으로 돌아왔다. 3년 전이다. 돈과 명예는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 가끔 위태로운 사랑이 깃들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위태로움으로 끝났다. 남은 거라곤 시 몇 편이 전부다. 이래저래 겨우 살아내는 생이다.

 

 

김명기 - 2005시평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북평장날 만난 체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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