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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신작시/이영광/겨울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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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겨울비 외 1편
책은 아주 싫고 음악도 희미하고 영화라,
영환 곧 끝나지, 극장 문전에 또 축축이 겨울비
내릴 테지 갈 곳도 오란 곳도 없을 테지 아무려나
볼일 없어 갈 수 있는 곳 아무 일 없어서
반드시 가고 싶은 그런 데는 없나? 진짜?
12월은 왜 와서, 겨울비는 왜 와서, 만화 보러 간다
내가 제일 오래 전에 배운 그림 이야기, 이야기 그림
오래고 깊은 것이, 인정사정없는 깊음이 필요해
나를 제일 잘 감춰주는 때 절은 심야 응급실
들어가면 못 나오는 감금, 매몰, 수혈이 필요해
이 나이에 만화방이라니 아니, 이 나이가 어때서
비 내리는 것 좀 봐, 젖는 사람 좀 봐, 한 발짝만
내디디면, 그칠 줄 모르는 이 비 피할 텐데 번개에
맞은 속이 다 타지 않았을까, 네거리의 청동상도
비를 맞네 이가 딱딱 부딪치는 젖은 웃음을
웃고 있네 만화방 가야 하는데 어서 비 맞고 가서
불을 꺼버리자 벌건 마음을 웃어버리자! 책은 싫고
음악도 시시하고, 뜨거워 떠는 일 추워 떠는 일
숨어서 수음하는 아이 같구나 들키고 싶은 거니
밥 먹기도 밥 벌기도 싫은 늙은 발정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생각도 싫고 생각을 생각하기도 싫고
젖다가 타다가, 젖다가 다시 타는 겨울비
모든 것을 다 싫은 걸로 바꿔버리는,
너무 좋은 것이 와선 안 가네 안 나가네 벌거벗은 겨울비
궁리
궁리가 좋다
공부하기 싫어 볼펜 돌리거나 손가락 깨무는
아이들의 놀 궁리가 좋다
(노는 데 놀 궁리가 필요하다니)
인간은 놀아야 한다
모든 궁리가 좋다
살 궁리가 좋다
(사는 데 살 궁리가 필요하다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뼈아픈 궁리들이 좋다
인간은 살아야 한다
웰빙에서 웰다잉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죽을 궁리가 좋다
갑이 됐든 을이 됐든,
그 모든 죽을 궁리가 좋다
(죽는 데는 죽을 궁리가 필요하다)
인간은 죽어야 한다
이영광 - 1998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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