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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신작시/최금진/드라이아이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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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드라이아이스 외 1편
여길 뜨고 싶어요
혼령이 되고 싶어요
차가운 이성, 뜨거운 감정, 이 모든 세계를 다 겪고서 마침내 얻은 결론이에요
날 비웃겠죠, 그래봐야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고 아침이면 뜨거운 국을 말아먹고
눈 내리는 거리로 걸어가면서, 지워지면서, 구름이 되죠
울음, 슬픔, 한숨, 아아, 이 가벼운 것들의 이름으로 뭉쳐진 나를 조금은 용서해 줄 수 없나요
내가 당신의 대문을 두드릴 때 조금은 관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는 없었나요
차가운 열 손가락에 성냥불을 지펴 환상 속에서 눈이 감기는 나의 졸음
할머니, 흰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비녀에 찌른 채
아가, 이리 온, 할미가 맛있는 거 주마, 할머니 치맛자락이 연기처럼 굼실굼실 펼쳐지며
내 쏟아지는 하얀 코피를 다 받아 주시던 세계, 그 세계가 무너지고 있어요
불타서 활활 날아가고 있어요
나는 가벼운 몸을 가졌어요, 나 하나 빠져나간다고 지구에 구덩이라도 푹 꺼질까요
나는 온도계의 수은처럼 오르내리던 저 진공의 시간을 버려야겠어요
사람들이 입김을 호호 불며 풍선이 되어 사라져요
소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거리를 빠져나갔다고 다시 다음 신호등 앞에서 우릴 기다려요
도시, 내가 사랑한 가벼운 인간관계, 안녕
사랑은 성욕, 겸손은 교만, 자비는 자만, 죽음은 부활, 육체는 공기
이제 그만 당신의 눈동자에서 스르르 풀려나고 싶어요
딱 하루쯤 맑은 날, 아무것도 없는 날
차갑고 푸르게, 뜨겁고 가볍게
쿠쿠
밥이 다 되면 떠나간 사람들도 흰 수의를 입고 모여요
미꾸라지 입 같은 주둥이를 내밀고
아, 입을 벌려 한 숟가락 따뜻한 밥을 씹겠죠
쿠쿠, 우리들의 친구여
일터에서 돌아올 때, 제일 먼저 몸을 위로해 주는 안마사여
삭신을 칼등으로 다지고 쫑쫑 썰어 흰 접시에 펴주세요
당신이 떠났을 때, 나는 문득 배가 고팠어요
가벼워지기 위해 밥주걱을 타고 날고 싶었어요
누군가는 크레인에서, 옥상에서 뛰어내렸어요
돌아오는 길엔 쌀을 한 봉지 사올게요
이렇게 슬픈데도 거짓말처럼 우린 또 저녁을 먹고 있어요, 쿠쿠
타이머가 우릴 깨울 거에요
우리가 증발되는 데 걸리는 시간, 쿠쿠
허기는 노예의 힘이니까요
내일쯤 말세가 오겠죠
수의를 입고 등이 휜 영혼들이
고수레, 고수레, 흰 쌀밥을 뿌리며 이 나라를 뜨고 있어요
영원히 밥이 기다려 주는 곳으로 가고 있어요
쿠쿠, 내가 너무 많은 걸 원한다고는 말하지 말아요
날 지워요, 날 먹어요, 텅 빈 밥그릇에 걸쳐진 수저 한 벌로 남는 나를
최금진 - 200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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