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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신작시/강재남/새삼스러울 것 없는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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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남
새삼스러울 것 없는 외 1편
기척 없이 날이 밝았다 통나무집 개암나무에 물이 오르고 잎맥으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미명으로 터지는 하늘을 혀로 천천히 녹여먹으며 나는 회갈색 마음과 가출하기 좋은 나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다 혀끝에서 녹아난 세상이 엷은 기색을 바르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읽어내는데 능통한 어느 날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는 구름을 삼켰다 그것을 바삭하고 정다운 맛이라 설명하기로 했다 구름에게 어떤 생애가 있다는 걸 혹은 어떤 생애를 달리 읽어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거나 뭐 이런 일들로 허비하고 싶어서였다 가끔 허세를 실속처럼 사용하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최소한 그때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저 구름을 구름이라 부르고 개암나무를 개암나무라 부르고 그리고 나는 회갈색 마음이어서 가출하기 좋은 나이를 가졌다는 돌림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뿐, 세상 밖에는 여울이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개암나무에 꽃이 핀다 꽃이 피었다 사이에서 혈맥을 끊어버리고 싶은 나는 내가 아닌 나를 꿈꾸는 아름다운 이단아, 흰토끼가 동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번져오는 햇살줄기는 반드시 창가에 심어야한다고 우겨보기로 했다 창문은 모조리 깨버리자 마음먹은 날이었다
호밀빵을 먹는 일요일 오전
그날 일기를 쓰지 않은 건 어려서 살해당한 네 아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네 아기는 양일수도 염소일수도 있다는 것인데 어느 부족 의식에 제물로 받쳐졌다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
너의 식탁에서 너의 죄가 모조리 깨어나 너를 갉아먹었다 창밖에는 하현달이 하혈을 하고
우유를 데웠다 푸석한 빵을 뜯는 손가락과 손가락, 끈기라곤 하나 없는 것이 처음부터 바싹 말라있었던 몰골을 더듬으며
너는 북반의 차갑고 서늘한 땅을 써내려갔다 네 아기의 죽음에 싱싱하고 엄숙한 제의가 필요치 않은 것에 대하여 야생화로 장식한 제단에 너를 올리는 일은 없을 것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너를 숭배하지 않겠다는 것에 대하여
비어버린 네 자궁과 창백하게 묻힌 네 아기와 창밖에 걸린 하현달 그리고 지금은 일요일 오전 푸석한 호밀빵을 뜯으며 지난 일기를 쓰는 시간
강재남 – 2010년《시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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