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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특집/제 5회 김구용문학제/진순애/구원을 찾아가는 불온한 고발-김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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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3,447회 작성일 15-07-10 10:20

본문

진순애

구원을 찾아가는 불온한 고발

- 김 안 론

 

 

1. 불온한 진화

진화는 불온하다. 비록 불온할지라도 진화가 양가적이듯 불온성도 양가적이며 김 안의 불온한 진화의 시쓰기 또한 양가적이다. 그것은 금기된 것들, 예와 풍속과 제도를 위반하면서 은폐된 것들을 들춰내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자유를 부여하면서 문명이 불온하게 양가적으로 진화해온 데 있다. 문명의 역사는 진화하므로 시 혹은 예술의 진화도 오늘에야 비롯된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독자와의 의미소통을 차단한 것도 시의 진화이며 운문을 파괴한 것도 시의 진화이다. 상징도 해체되고 이미지도 해체된 것 또한 시의 진화이다. 시짓기가 아니라 시쓰기로의 이행이야말로 시의 진화 중에서도 가속도가 붙은 행로이며 거기에 불온성의 고발이 더해진 시쓰기에 이르러 진화는 첨단화한다. 때문에 첨단이 진화이고 첨단 또한 양가적이다.

김 안의 시쓰기는 바로 이와 같은 양태로, 곧 첨단적으로 혹은 진화적으로 불온하다. 그것은 육식의 지상에서 구원을 찾아가는 불온성으로 양가적이라는 데 그 가치가 더한다. 물론 진화의 첨단이란 단지 시의 장르적 진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삶의 일상에서 비롯된 데 있다는 점으로 김 안의 불온한 시쓰기는 첨단이면서도 첨단이 아니고 진화이면서도 진화가 아니다. 일상인 것이다. 진화한 일상이 시적 초월성을 초월한 지 오래인 까닭에 그러하며 진화와 첨단이 양가적이라는 데서 그러하다. 그럼에도 진화는 더 이상 진화가 아니라 현대의 일상일 뿐임에도 이를 불온하게 고발하는 김 안의 시쓰기가 독자적인 실험성의 특장을 지니는 것은 구원을 찾아가는그만의 불온성에 있다.

김 안의 불온한 시쓰기는 진화의 비인간화가 화석화에 이른 우리의 일상이 부당하고 의롭지 못하다고 일깨우는 고발의 효용성에서 동시대적 의의에 직면한다. 아직은 살아있어야혹은 살아나야 한다는 정의와 진리와 진실을 향한 항변을 불온한 고발이 유인하는 데 그 의의가 남다른 것이다. 물론 화석이 된 현대의 진화가 부당하다는 불온한 고발 앞에서 경우에 따라 불편해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나, 누구나 불편에 직면할 때까지 불온한 고발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데 불온한 진화의 시쓰기가 지닌 동시대적 의의가 그리고 김 안이 시를 쓰는 의의가 무궁하다고 봐야 하리라.

 

2. 사람이 부재중이고

 

왜 사람이어야 합니까,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든 것이.

왜 군중들은 범죄자에게

네가 사람새끼냐,

라고 외칩니까, 언제 한 번 사람인 적이 있었다는 듯이.

그들을 향해

노동하는 시체,

라고 말한 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이곳에서 만족하려면 쥐새끼보다 더 쥐새끼가 되어야 하지,

라고 말한 이는 쥐새끼입니까?

아직도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을 묻지 못하고 <사람> 일부

 

왜 사람이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불온한 고발이다. ‘사람이어야 할 이유필요도 없어진 시대이므로 사람이기를 사유할 필요가 없다는 김 안의 불온한 고발이다. 진화한 세상은 사람이 부재중인 세상이므로 이와 같은 세상을 향한 항변적 고발인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사람이 사람이기를 사유해야 했던 시기에는 응당 불온했다. 그러나 사람이기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아닌 시대에는 불온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이 추락하고 형이하학의 자본이 사람이기를 좌우하는 시대에는 자본이 되거나 자본을 좌우할 능력이 될 때에만 사람일 수 있으므로, ‘사람새끼냐, 아니냐에 대한 불온한 질타는 더 이상 불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본질적으로는 불온하다.

진화조차 더 이상의 가속력을 상실한 지 오래인 시대에 강은 썩은 모액으로 가득하고 나의 병은 더 이상 자라나지조차 않는다. ‘의 깊이로 은유되기도 하는 진화는 더 이상 자라나지조차 않는 병의 상태앞에서 막다른 골목에 직면하듯 이제 막다른 포화상태에 직면해 있다. 우리의 일상은 방향 없는 혹은 이미 주어진 방향 앞에서 어둠이 뚫어놓은 이 동굴은 나를 어디로 배달하고 있냐?’고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게 하는 현실의 온상이다. 일상은 누가 사람이냐, ‘정의는 있냐, 혹은 구원은 어디에 있냐고 불온한 시쓰기의 중심이 된 것이다.

 

개새끼, 종로 3가 한복판에서 싸우고 있는 술 취한 연인을 바라보며 담배를 문다. 누가 누구를 먹고 누가 누구에게 먹히었던가? 말이 사라지면 나도 너도 그저 고기로 태어난 고기일 뿐이다. 사람에게 새끼를 잃은 코끼리는 사람을 잡아먹었고, 코끼리에게 새끼 잃은 인간들은 그 코끼리를 죽였다. 코끼리의 배 속에서 열일곱 구의 시신이 나왔다. 그 내부에서 너덜너덜해진 알몸 덩어리들. 의미가 멈추면 광기가 시작된다. 사랑을 나누던 모습 또한 그러했다. 사람은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을까?

<사랑의 역사> 일부

 

현대가 잊어버린 것은 살과 살/그것은 온통/피로 씌어진 언어의 화살,/서로의 감옥 속으로 쏟아져 들어와/모든 말이 없어질 때까지/서로의 입을 찢는,/찢긴 입 속으로 익사하며/기어코/기억이기를 단념하는,”(<서정>에서) 소멸한 서정처럼 사랑이므로 진화한 일상은 사랑 없는 일상이 그 하나다. ‘사람은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을까?’라고 사랑 혹은 그 사람의 역사조차 의문시해야 하는 현대란 불온하게 진화한 시대라는 고발인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아니라 물질이 있었다는 프로이트의 지적에 버금가듯 말이 사라지면 나도 너도 그저 고기로 태어난 고기일 뿐인 현대는 사람새끼개새끼, 쥐새끼로 불온하게 진화한 시대이며 의미가 멈추면 광기가 시작되는”, 아니 이미 의미는 멈추고 광기가 시작된지 오래인 시대이다. ‘사람이 사람을 먹고 사람이 사람에게 잡아먹히는약육강식의 불온한 현대에 의미는 무의미로 내지는 광기로진화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부재중이므로 사랑도 부재중인, 곧 사람의 역사, 사랑의 역사도 무화된 진화는 정당한 진화가 아니라는 불온한 고발은 김 안이 찾아가는 구원의 역설임을 놓칠 수 없다.

 

3. 신도 부재중이고

 

신은 굶어 죽은 이들의 입속에나, 불에 타 죽은 이들의 늑골 속에나 존재합니다. 아주 낮게 존재합니다. 당신은 지금 신을 밟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나의 무덤이여, 너는 이웃만큼 포악하지도, 이웃만큼 선량하지도 못하는구나. 입 속에 가득한 모래. 늑골 속에 태어나는 구더기들. 그리고 저 높은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영혼. 그래도 마음과 뼈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보호해주던 신비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이제는 알 수 없어 형벌의 목록을 펼치면 왜 내게 없던 가족들이 나를 보며 웃고 있습니까. 왜 그 입들을 피해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내 온몸이 입이 될까요. 내 입 속으로 처넣어지는 구둣발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일요일> 일부

 

신이 죽은 근대가 심화된 현대는 심화된 탈신성성의 시대이자 신이 빚은 인간 또한 지하세계로 깊이 묻힌 시대이다. 그러므로 죽어버린 신에 대한 불온이 더 이상 불온하지 않을 것이나 그렇다고 하여 불온하지 않은 것은 아니듯 김 안은 굶어 죽은 이들의 입속에나, 불에 타 죽은 이들의 늑골 속에나, 아주 낮게 존재하는 신이라고, ‘당신이 지금 밟고 있는지도 모르는 신이라고 불온하게 추락한 신을 묘사한다. ‘내가 일요일에야 정직해지므로’, ‘나의 불온한고발은 일요일에나마 멈추기도 할 것이나 그 가능성이 적다는 역설이 부상한다. ‘마음과 뼈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던 시절에는 우리를 보호해주던 신비가 있었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이 있었다. 그러나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냐?”(<알 수 없어요>에서)는 한용운의 신성한 사색이 김 안의 내 입 속으로 처넣어지는 구둣발의 주인은 누구일까요?”로 탈신성화한 불온성은 진화한 근대문명의 실체를 탈반영적으로 반영한다.

모든 전쟁은 스스로에게 성전이기에, 성스러움이 약입니다. 성스럽기에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나에게도, 적에게도, 저 악에게도. 겸손한 얼굴 속에 도리어 흉물스러운 이빨이 도사립니다.”(<일요일의 혀>에서)라는 성과 악이 전도된 양상처럼 그리고 그 말들을 사람이 하는 말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말이 아니라면 그 말의 관절을 꺾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난 지옥에서라도 몸을 팔겠습니다.”라는 불온한 역설적 선언처럼 성인가 악인가에 대해 일요일에 하는 의문은 의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신성성을 모욕한 것이라는 고발이다. 구원을 찾아가는 김 안의 시쓰기는 불온한 고발의 역설 속에서 길항적으로 모색된다.

 

4. 지상은 지금

 

창을 엽니다. 막 재개발이 시작된 창밖으로, 멀리 옥상이 내려다보입니다. 한 늙은이가 의자 아래로 흘러내리는 제 몸을 주워 담고 있습니다. 그 옆에 다른 늙은이가 담뱃불로 제 허벅지에 구멍을 내고 있습니다. 대기의 무게가 빈 몸통들을 채우고 있습니다. 무사히 종말이 오고 있었고 새로운 종말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켭니다. 누군가는 분신했고, 누군가는 얼어 죽었고,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는 약간의 두려움과 다량의 망각이 필요하다고 앵커는 말합니다. 독재자가 된 혁명가의 책을 펼칩니다. 질서는 공포로 완성됩니다. 어떻게 한 줄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두 줄, 네 줄, 그 어떤 문장의 질서로도. 앵커는 말합니다. 나의 질서보다 더 큰 질서가 무럭무럭 방 안으로 차오를 거라고.

<지상의 방> 일부

 

새로운 종말들이 태어나고 있는지상은 지금 누군가는 분신했고, 누군가는 얼어 죽었고,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망각이 필요하도록 진화됐다. ‘혁명가는 독재자가 되고, 질서는 공포로 완성되며, 방 바깥에서는 아무 비명도 없이, 피도 없이 다른 방들이 무너지고 또 다른 방들이 태어나고 있고, 누군가가 창 속에 갇혀 창밖을 바라보며 창을 긁고 있는불행한 형국이 진화된 지상의 풍경이다. 그러므로 나의 무사함이 죄가 되는지상의 지금은 사람은 과거에 있었고, 사람의 사랑도 그러했음을 회상하거나, ‘과거의 사람의 사랑조차 의심해야하는 새로운 종말로 진화하기도 하였다는 진단이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지상의 지금이, 진화되어야 마땅한 지상의 지금이 한 줄의 문장으로 바꿀 수 있기를 꿈꾸는 것은 꿈꾸기조차 부적절한 어불성설의 상황일 뿐이라는 자조 속에서 바꿀 수 있을까요라는 의문 아닌 의문에 희미한 구원의 희망을 탑재한다. 물론 이때의 의문은 의심의 불온한 의문을 넘어 구원을 희망하는 의문이므로 불온성의 역설이자 진화의 진화이다. 희망이 혹은 꿈이 유인하는 고발의 역설이다. 정의와 진리와 진실과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동반된 진화는 불온한 고발의 역설 속에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진화의 모체이므로 놀랄 일도 아니고 새로울 것도 없는 새로움이라고 불행한 지상의 방에서 김 안은 진화의 정당한 방향을 타진하며 구원을 꿈꾼다.

 

5. 구원은 어디에

 

언제나 패배하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 아름답고 더러워라. 승리만을 기록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은 이 모든 것들과 아무런 관계도 책임도 없다. 현실에서는 그 어떤 폭력도 눈물도 없다. 단 하나의 단호한 명명만이 있다. 단 하나의 거대한 입과 이렇게나 많은 찢겨진 입들이 있다. 이렇게나 많은 유령들이 또다시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사라지니 신도 사라졌다. 하지만 나의 조국의 내부에는 여전히 구원이 있고, 구원의 쾌락이 있다. 빌어먹을 마녀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이토록 나약한 말의 악몽이 있다; 언제부턴가 온 집안의 수도꼭지가 잠가지지 않는다. 얕은 잠 속으로까지 물이 넘쳐 들어온다. 엄마를, 아내를, 애인을, 진실 속에서 익사한 사람들을 불러본다. 내게는 숨겨진 벗들이 있으며, 숨겨진 입들이 있으며, 숨겨야만 했던 유령이 있으며……숨겨져 있으니 내게 이 현실은 아무런 관계도 무게도 없이 영원히 출렁이며 고인 채 썩고 있다. 단단한 벽과 늙어 소리를 잃은 악기들, 차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와, 벌레처럼 울고 있는 형광등, 찢겨진 입과 매일의 유언; 그저 악몽을 창조하는 것. 기억되는 악몽만이 가끔 진실이 된다. 우리 중 기록될 악몽의 주인은 누구일까. 누구의 악몽이 구원을 받을까. 그리고 끝끝내 구원을 단념할 수 있을까, 이후의 악몽들을, 이후의 삶을. <이후의 삶> 전문

 

불온한 진화의 시쓰기는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이후의 삶이 어쨌다는 것인가라고. 혹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라고. 탈의미, 무의미 등 의미의 은폐가 질주하는 진화의 시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이후의 삶이라는 단서를 따라가야 할 일이다. ‘언제나 패배하는 사람이 있다, 당연한 진단이다. ‘언제나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 이 또한 진부하도록 당연하다. ‘아름답고 더러운 것이라는 진단 또한 그러하다. 아름다움은 더러움으로 인해 아름다우며, 더러움도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러하므로, 양자는 지상의 방에서 공생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패배하고 도망치는 사람이 있는 지상의 방에 만연한 불온성은 불온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현실은 이 모든 것들과 아무런 관계도 책임도 없다니 이 또한 아주 당연한 지상의 진화한 현실상이다. “우리 중 기록될 악몽의 주인은 누구일까. 누구의 악몽이 구원을 받을까. 그리고 끝끝내 구원을 단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불온한 의문이면서도 역설이다. 그 역설 속에서 김 안이 진실로 이르고자 하는 단념할 수 없는 구원의 꿈이 자란다. 신의 시대에 구원을 의심하는 것은 불온했다. 그러나 신이 죽은 시대에 그것은 더 이상 불온하지 않다. 그럼에도 신이 죽어버린 시대에도 신을 향한 지상의 구원은 멈출 수 없는 혹은 멈춰지지도 않는 지상의 이전이자 이후라고 보자. 비록 이후의 삶이전의 삶보다 더 불온하게 진화할지라도 불온의 역설에 내재한 진정한 진화의 타진을 포기할 수 없다는 김 안의 의지에서 구원의 희망을 읽자. 그것은 실존적 존재의 구명줄인 까닭이므로.

 

문이 닫히면 시작합니다.

살이 부풀어 사방이 살로 뒤덮입니다.

붉은 살에 뒤덮여 눈 코 입도 사라지고 얼굴도 없어집니다.

얼굴이 없으면 가면이 없습니다.

가면이 없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에도 계급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우리 중 누구입니까.

당신은 다정하게 폭압적입니다.

나는 무책임하게 순종적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구원은 늘 우리가 눈을 감았을 때만 옵니다.

우리의 눈을 감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철거가 시작된 가재울 4구역은

문도 없고 밤도 없고 물도 없는 구원의 현장인데

우리는 왜 문이 닫혀야 시작됩니까.

문득 우리가 씹어 삼키는 이 살덩어리들의 국적이 궁금해집니다.

당신은 사랑합니까, 나를, 이 살덩어리만큼.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 웅크려

쌀벌레를 눌러 죽이는 노모의 오후만큼

우리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의 목록 속에

기록되어 있던 말들은 성스럽습니까.

그것이 과연 복된 소식입니까.

구원은 육식 속에 있고

우리가 나누는 전희 속에 있고

그래서

구원은 아직도 성스럽습니까.

문을 닫습니다. 아니

문이 닫힙니다. <육식의 날들> 전문

 

구원은 육식 속에 있고 우리가 나누는 전희 속에 있고 그래서 구원은 아직도 성스럽습니다는 불온한 진화가 문이 닫힌 육식의 날들의 진면목을 역설의 은유로 고발한다. ‘우리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의 목록 속에 기록되어 있던 말들은 성스럽습니까. 그것이 과연 복된 소식입니까.’라는 의문 아닌 의문 또한 신성이 소멸한 육식의 날들을 불온하게 고발한다. 불온한 고발 속에서 구원을 꿈꾸는 역설은 불온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육식의 지상은 살이 부풀어 사방이 살로 뒤덮이고, 붉은 살에 뒤덮여 눈 코 입도 사라지고 얼굴도 없어진날들이다. ‘얼굴이 없으니 가면이 없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실체 없는 지상의 아름다움이므로 육식의 지상은 여전히 다정하게 폭압적이고 나는 무책임하게 순종적인 이율배반의 방이다. ‘그것과 상관없이 구원은 늘 우리가 눈을 감았을 때만 온다는 데 육식의 지상은 부정되어야 하고 수정되어야 한다는 내밀성을 붙잡아야 하리라.

사람이 부재중이고 신도 부재중인 육식의 지상에서 김 안이 찾아가는 구원은 메멘토 모리의 실존적 인식으로, 혹은 미제레레의 속죄를 통해서 닿으리라는 신뢰와 희망을 보자. 진화는 신을 죽이고 사람을 지하세계로 내몰고 성과 악의 무분별을 혹은 그 분별의 무의미를 낳는 불온한 문명의 질주를 동반하듯 형이상학의 숭고는 입 속에 처넣어지는 구둣발의 주인이 누구냐는 물음 아닌 항변 속에서 내밀하게 자라는 의 믿음과 구원의 희망에 있다는 김 안의 시쓰기는 불온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진화가 낳은 불온의 양가성이므로 불온한 고발은 불온하기도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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